물처럼 흐르지도 못하고 물에는 발자국도 낼 수 없는 사람이 물과 물 아닌 곳의 경계, 습지에 선다. 물 잔뜩 머금어 촉촉한 흙은 햇볕과 시간을 양분 삼아 생명을 피워 올리는 중이다. 언젠가 땅속의 작은 씨앗이었을 풀이 지금은 왕버들의 허벅지나 심지어 허리께까지 자라서 나무 기둥을 간지럽히고, 어느 땅은 울퉁불퉁한 모습이 두더지가 지나갔음을 말해 준다. 곡조와 높낮이가 천차만별인 새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온갖 풀과 나무의 향기가 사람의 작은 코에 밀려들어 온다. 자연이라는, 생명이라는 교향악. 경계의 땅 습지에 서서 그 음악을 듣는다. 찬란한 순간이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서대구역과 동대구역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생명의 파노라마, 달성습지
내륙 도시 대구는 물이 풍부하다. 도시를 둘러싼 산이 물을 내보내고, 다른 지역에서 발원한 물이 대구를 지나가기도 한다. 자연의 협조가 절실했을 구석기시대부터 대구에 사람이 자리 잡은 바탕에는 물의 역할이 컸을 테다. 그중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달성습지가 있다. 대명천과 진천천도 여기서 합류해 무려 ‘네물머리’다. 흐르는 물은 홀로 오지 않았으니, 곳곳의 기후와 사연을 담은 흙이 강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하중도를 이루고 큰비가 닥칠 땐 주변에 범람해 토양을 비옥하게 했다. 세계 최대 환경 단체이자 유명한 람사르협약을 기획한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1989년 발표한 ‘아시아 습지’ 문건에서는 그토록 많은 한국 습지 가운데 스물한 곳을 목록에 올리면서 달성습지를 포함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습지라는 뜻이다.
달성습지 면적은 200만 제곱미터(약 60만 5000평)에 달한다. 자연이 주인으로서 스스로 생을 꾸리는 습지라 걸음이 조심스럽다. 사람의 미학 기준에 맞추어 심고 깎고 조성한 공원과는 확연히 다르다. 광활한 땅에 온갖 풀이 휘날리고, 드문드문 나무가 선 광경은 아프리카 초원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이 장면을 두고 감히 ‘가꾸지 않았다’라고 말할까. 자연이, 지금 여기서는 그러해야 해서 치열하게 생존하며 만들어 낸 숭고한 풍경이다.
긴 숲길도 이 습지의 독특한 매력이다. 버드나무, 느릅나무 등 습지에 흔한 나무 말고 벚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이 일정 구간에 군락을 이루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과거에 개인이 판매할 목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묘목장이라 촘촘하게 식재한 탓인지 나무는 가늘고 길게 자랐다. 키를 가늠한다고 목을 한껏 치켜들어도 모자라다. 날씬하고 키만 껑충 큰 벚나무가 신기해 한참을 올려다봤다. 어디서도 못 본 풍경이다. 계속되는 숲길이 시각에 여유를 선사하면서 키 작은 식물도, 아예 땅바닥을 기는 식물도 들어온다. 한 번 뿌리박으면 평생을 각오해야 하는 이들은 이곳이 운명이다. 그 사이사이에 곤충, 새가 먹이를 얻고 몸을 숨기고 짝을 찾고 생을 영위한다. 눈 밝은 사람에게는 습지 모든 것이 생의 자취이겠다.
숲 한 지점에서 왼쪽으로 나무 덱이 놓였다. 습지탐방길이다. 자연이 씨앗을 뿌린 그대로 왕버들이 제각각 뿌듯하게 자랐고, 그 아래는 온통 풀이 아우성친다. 야생이라는 단어가 사전에서 걸어 나온 듯하다. 습지임을 증명하는 물웅덩이는 각도에 따라 하늘과 구름을, 나무와 풀을 담는다. 현실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꾸는 꿈을 닮았다. 놀랍다, 경이롭다, 신비롭다, 단어는 단어일 뿐 실제는 어떤 단어로도 부족하다. 사람이 어떤 감동을 느끼든 자연은 제 일에 열심이라, 버드나무가 솜털 모양의 씨를 무수히 날린다. 어느 나무는 생을 다하고 땅에 누웠다. 그가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한 장면에 생의 파노라마가 다 들었다. 덱은 몇백 미터씩 이어지진 않는다. 그래, 여기까지. 자연이 주인이고 사람은 손님이니까. 이만큼이라도 그 경이의 장면을 누리다니 충분하다. 더는 욕심부리지 말아 달라고 덱 너머 광활한 자연에 부탁받은 기분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돌려주기까지
숲길을 나와 제방 건너편, 대명유수지는 지난해의 갈색과 올해의 초록이 어우러져 장관이다. 범람이 잦아 물 높이를 조절하는 용도로 조성한 유수지는 물억새와 갈 대, 달뿌리풀이 빽빽하다. 여기에 하나 더, 귀한 존재 맹꽁이. 옛이야기와 속담에 등장해 친숙하지만, 인간의 과오로 멸종 위기종이 된 맹꽁이의 집단 서식지가 이곳이다. 추위와 더위를 막으려 옷을 지어 입고, 공기청정기와 정수기를 개발해 안전한 환경을 만들 수 없는 몸길이 약 4.5센티미터의 맹꽁이. 환경 변화 앞에 속수무책인 생명이 살 만하다고 골라 거주하는 곳이 대명유수지와 달성습지다.
맹꽁이를 본격적으로 주목한 것은 2009년이다. 1989년 IUCN 보고서가 5000만 제곱미터(약 1215만 평) 넓이라 기록한 달성습지는 현재 면적이 200만 제곱미터로 30여 년 사이에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 세월 동안 인간의 ‘삽질’이 어땠을지 짐작 가능하다. 1990년대 중반, 철새 흑두루미가 발길을 끊고 습지가 나날이 훼손되어 가자 복원 논의를 시작했으나 실수와 무지, 오류 때문에 복원 사업을 중단하고 모니터링만 실시하기도 했다.
1년, 2년,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애정과 기원을 담아 습지를 지켜보고 연구하고 쓰레기를 줍고 낚시를 막았다. 이때 자연이 바빠졌다. 모니터링만 4년을 채우고 2009년 맹꽁이를 발견했다. 2년 뒤에는 개체 수가 확 늘어나 맹꽁이가 사람을 감격시켰다. 2012년에는 17년 만에 재두루미가, 이듬해에는 흑두루미가 돌아왔다. 전 세계 1만 마리 남짓 남은, 한 마리 한 마리가 귀한 새다. 지금 습지에는 어림해 생물 700종이 살아간다. 식물류, 곤충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어류, 조류가 자기 자리에서 먹이사슬을 이루어 완벽한 생태계를 구성했다.
물길을 따라 산책하며 하중도를 바라본다. 물이 흙을 가져다 쌓은 세월이 얼마기에 저렇게 섬이 되었을까. 부들과 물풀, 나무가 자라 바람에 한들거리는 섬은 물과 시간이 함께 쓴 시 같다.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시가 초여름 하늘 아래 초록으로 빛났다. 아름다워 눈을 떼질 못하겠다. 하루가 저무는 무렵의 노을이 시의 절정이다. 또 하나, 물안개를 기억해야 한다. 하중도도 그렇지만 습지 안쪽 왕버들 군락지에 물안개가 피면, 세상이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잠시 목격한 듯한 감동에 젖는다. 새가 지저귀는 야생의 습지, 고라니가 저쯤에서 뛰어간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걷는다. 이산화탄소만 내뿜는 존재로서 당연한 예의다.
강을 따라서, 달성습지생태학습관과 사문진
낙동강 변 길은 달성습지생태학습관으로 이어진다. 흑두루미 모습을 한 3층 규모 건물은 낙동강 역사와 습지의 중요성, 달성습지에 서식하는 생물을 소개한다. 맹꽁이, 개구리, 두꺼비 울음소리를 구분해서 듣는 등 재미있는 체험 시설을 마련해 직접 만지고 누르는 가운데 습지를 알아간다. 지식은 곧 사랑이 되고 다짐이 되니 자연을 지키겠단 마음이 물처럼 차오른다. 3층 로비의 통창은 습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감탄스러운 풍경에, 찍는 사진마다 인생 사진이다. 한 층 위 옥상 전망대는 습지의 공기를 마시면서 일대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다. 인근 밭에서는 학습관 직원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유기농 보리 등을 재배한다. 겨울 철새 먹이로 주기 위해서다. 경치만 좋다고 끝이랴. 두루미, 맹꽁이가 살아서 달성습지다. 누군가의 노력이 이만큼의 오늘을 이루었고, 내일을 더 기대하게 한다.
낙동강 위에 놓은 탐방로를 걸어 사문진 주막촌으로 향한다. 오른쪽의 강과 하중도, 왼쪽의 하식애가 눈을 동시에 유혹한다. 하식애는 급히 굽이쳐 흐르는 강이 화원동산 아래에 무늬를 새긴 절벽이다. 모감주나무, 회양목 같은 다양한 나무가 절벽에 매달려 자란다. 6월엔 ‘골든레인 트리(Goldenrain Tree)’라는 영문 이름을 가진 모감주나무가 황금빛 꽃을 피워 꽃비로 여행객을 환영한다. 과거 낙동강 물류의 중심 나루였던 사문진에는 주막촌과 꽃밭, 각종 조형물이 아기자기하다. 이 나루로 1900년 한반도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오기도 했다. 사람들 표정이 새소리, 피아노 소리인 양 경쾌하다.
자연의 거대한 포용으로 함께 살고 있다
경계의 땅 습지는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룬 곳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물부터 큰 짐승 모두가 각자 역할에 충실하다. 산소를 내뿜고 탄소를 흡수하며 기후를 조절해 환경 재난을 막아 주니, 사람 입장에서는 받기만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 신비로운 풍경이 전하는 감동까지. 긴 시간 자연이 묵묵히 물과 흙을 날라 형성한 섬과 습지. 이토록 오랫동안 애써서 무언가를 만든 적 없이, 그저 이산화탄소만 내뱉은 삶을 돌아본다. 인간이 과오를 뉘우치고 바로잡으려 할 때 자연이 베푼 거대한 포용을 생각한다. 물이, 풀이, 나뭇가지가 움직인다. 살아 있다. 함께 살고 있다. 외롭지 않다. 마음에 물기가 어린다.
내추럴 대구 여행 코스
대구의 생태 여행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으로, 요금 1만 5000원에 교통비와 입장료, 식사까지 포함해 구성했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동행해 더욱 유익하다.
1 동구 생태 관광(그린로드)
동대구역 → 봉무공원 → 나비생태원 → 중식 → 불로동 고분군 → 도동측백나무숲 → 옻골마을 → 동대구역
2 팔공산 생태 관광(에코로드)
동대구역 → 팔공산 자생식물원 → 중식 → 동화사 → 자연염색박물관 → 북지장사 → 동대구역
3 낙동강 생태 관광(리버로드)
동대구역 → 비슬산 → 중식 → 대견사 → 사문진 주막촌 → 달성습지 → 동대구역
4 달성군 생태 관광(웰로드)
동대구역 → 대구수목원 → 중식 → 송해공원 → 비슬산 → 대견사 → 동대구역
문의 내추럴대구.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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