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밖으로 나갔다. 과거 승려들이 모여 물물교환을 하던 시장이었다는 중장터는 넓었고, 천불천탑의 운주사는 신비로웠다. 호흡이 턱에 차도록 중장터를 뛰어다니며 놀고, 곳곳에 돌탑과 돌부처가 놓인 운주사에서는 지치도록 걷고 아무 데나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돌탑과 하늘이 어우러지는 선이 어찌나 고운지, 하늘에서 만났다 헤어졌다 변화무쌍한 구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시간 흐르는 줄 몰랐다. 전라도 화순의 자연은 소년의 가슴을 넉넉한 서정으로 채워 주었다.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로 이사했다. 이제 도시의 동네 골목골목이 놀이터가 되었다.학교나 친구 집 가는 길, 선생님인 엄마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길. 요리조리 뛰고 놀고 걷다 보면 이국적인 수피아여고, 양림교회가 나왔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가 세운 건물은 웅장해서 입이 벌어졌다. 작은 하천에서는 친구들과 다리에 걸터앉아 장난치고, 툭하면 친구 집에 놀러 가 밤새 얘기를 나누고 막연한 미래를 꿈꾸었다. 비슷한 듯해도 사실은 모두가 다른 골목과 건물에 깨끗한 개울, 거기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또한 그림 같았다. 검소하고 성실한 엄마는 소년을 늘 믿어 주었다. 뭐든 네가 즐거운 일을 하라고 말씀했다. 그 응원이 든든한 벽으로 소년을 지켰고, 어느새 그림을 염원했다. 운주사 와불 곁에 누워 손가락으로 구름을 따라 그리던 소년은 화가가 되었다. 자기만의 독창적 판화 기법을 고안해 낸 특별한 화가가.
밑그림을 그린 보드를 색칠해 손으로 누른다. 색을 지우고 다른 색을 입혀
다시 찍기를 반복한다. 열 번, 스무 번…, 캔버스에 질감이 쌓이고 그림이 시간을 머금는다.
‘백색 시대’의 이른 전성기
이민은 판화가다. 판화는 친숙하고도 낯설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고무 판을 칼로 긁어내서 찍어 본 덕분에 판화를 ‘얕게는’ 경험하지만 다양하고 방대한 판화의 세계는 잘 알지 못한다. 어딘가에 새겨 여러 장 찍는 예술, 붓을 쓰지 않기에 좀 더 단순하고 압축된 표현을 하는 예술이라는 정도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배고픈 아이처럼 온갖 지식과 기법을 흡수하던 이민은 팝아트 전시를 다녀와 판화에 눈을 뜬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는 모든 작가의 숙제죠. 미술계의 예술지상주의나 엄숙주의가 무겁고 답답하다 여기던 차에 경쾌하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예술로서 팝아트와 판화가 단서를 주었어요.” 저 위에 고고하게 군림하는 예술이 아니라 땅에 내려와 일상과 함께하는 예술. 의욕과 호기심 넘치는 청년은 학부를 마친 뒤 판화로 유명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른 성공이었다. 한국 중앙미술대전과 일본 판화가협회 공모전 등에서 수상하고, 졸업 전부터 개인전이 잡혔다. 한지에 프린트한 추상 목판화 작품은 조형성과 은은한 농담의 조화가 빼어나다는 평가 속에 승승장구했다. “일본 전역에서 연달아 전시를 열었어요. 전시 사오 일 만에 작품이 ‘완판’되었죠.” 1998년에는 도쿄 시로타 갤러리 대표가 직접 찾아와 전속 작가를 제안했다. 으쓱했다. 시로타는 이우환 작가도 소속된, 일본을 대표하는 갤러리다. 점·선·면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은 현실 너머의 심상, 아득한 추억과 무의식, 감각을 깨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잡한 마음의 지도를 꺼내어 펼쳐 놓은 듯한 작품이었다. 흰색과 무채색 작품이 주조를 이루는 이 시기를 작가는 ‘백색 시대’라 부른다. 시대를 붙일 만큼 흥했으나 무릇 시대란 일어나고 전성기를 누리고 마침내 쇠하는 법. 2005년, 작가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숱한 실패와 실험을 반복하며 고안한 판타블로 기법으로 작가는 거친 질감과 서정적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을 내놓는다. 오로지 손의 압력만 사용한 작품도, 기법도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사라지거나 희미해지는 것이 많아요." 광주의 아픔이 그렇고,
오늘의 소중함도, 제주의 돌담도 그렇다. “저는 기록하려고요.
그림은 사진과는 다른 감동을 주니까요."
“시로타 갤러리 대표님이 이 작품은 그만하자고 하셨어요. 15년 정도 했으니 평단과 관람객 반응도, 제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성 면에서도 최고조를 보았다고 판단하셨죠. 새로운 것을 모색할 때라고요.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민은 동의하면서도 침체기에 빠졌다. 미술을 시작하고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던 그는 스무 살 미대생 시절로 돌아가 ‘무엇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를 거듭 되물었다. 아무래도 붓은 답이 아니었다. 판화가 그의 승부처였다. 온갖 소재, 기법, 도구로 실험했다. 종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쿠킹 포일까지 소재로 삼았지만 실험에 그칠 뿐 예술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다 할 수는 없었다.
“문득 폼보드가 떠올랐어요. 학생 시절, 환경미화 한다고 보드에 새기고 그리고 한 기억이요. 이건 되겠다 했지요.” 발포스타이렌수지를 가공한 폼보드는 컵라면과 비슷한 재질이라 판화를 찍는 프레스기를 이용하지 못한다. 수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전에도 그는 단 하나의 작품, 모노타이프 작업을 했기 때문에 수작업은 익숙했다. 그 손맛이야말로 이민의 특징이고 개성이었다.
다음으로는 잉크가 문제였다. “유화물감은 뭉개지고 수성물감은 폼보드 판에서 흘러 버렸어요. 판화용 물감은 뭉쳐서 들러붙었고요. 폼보드에 잘 안착하는 잉크를 찾는 데 한참이 걸렸지요.” 보드에 스케치를 하고 파내서 잉크를 바른다. 캔버스에 정확히 맞추어 찍는다. 보드를 씻어 잉크를 지우고 다른 색을 칠한다. 다시 캔버스에 찍는다. 반복하는 수작업이 의외의 선과 면, 질감을 만들었다. 판으로 찍어 그리는 이 장르를 이민은 ‘판타블로’라 이름했다.
작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수많은 작품을 했으나,
광주의 그분들께 바칠 꽃다발 같은 작품을 고민하느라 그 소재의 작품은 지금껏 두 점뿐이다.
지난해 1년간은 제주의 찬란한 풍경을 담았다.
돌고 돌아 판타블로로 찾아온 양림동
“판화의 ‘판’도 있고, 고대 그리스어로 ‘판(Pan)’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라는 뜻이거든요. ‘타블로(Tableau)’는 유럽에서 예술, 특히 회화를 이끈 프랑스 말로 ‘회화’를 의미합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예술이자 판화와 회화를 접목한 장르라는 의도에서 판타블로라고 이름 붙였어요.” 판타블로 기법으로 사람, 정글, 명품 가방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리다 풍경에서 멈추었다. 경기도 수원·안양, 전남 목포의 공업지대와 골목이 캔버스에 들어왔다. 수차례에 걸쳐 캔버스에 쌓아 올린 물감의 질감이 공장과 집의 벽면, 길바닥에 시간을 부여했다. “대부분 회화는 화가가 보면서 그리기에 의도성의 예술이라 할 수 있지만, 판타블로 작품은 제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감으로 손의 압력을 조절해서 ‘찍혀 그려지기에’ 의외성이 큰 예술입니다. 거친 질감, 손이 낳은 자연스러운 그러데이션이 세월의 흔적 같은 느낌이 나더라고요.”
2018년 작가는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광주 남구의 초청 전시를 앞두고 양림동을 담기 시작한다. 골목, 낮은 집과 오랜 가게, 양림교회. 추억 어린 동네를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돌고 돌아 처음 풍경으로 가는 마음은 벅차고 겸손했다. 그해 12월 양림미술관에서 9일간 26점을 선보이자 재전시 요청이 밀려들었다. 곧바로 다음 해 1월, 더 긴 기간으로 특별전이 열렸다. 2021년 2월까지 목표한 99점을 완성하고는 제주도로 떠났다. 이중섭미술관 입주 작가로 돌담과 감귤밭, 낮은 지붕의 집과 골목, 바다와 일출과 일몰, 밤하늘 별과 가로등을 그렸다. 광주의 동네 한 곳에서 99개 장면을 포착한 작가는 제주도에서 1년에 무려 120점을 작업했다.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 많아요. 돌담도, 집도, 감귤밭도요.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죠. 누군가 계산하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고, 각자 시대와 입장에 알맞은 역할이 있을 테고요. 그저 저는 기록하려고요. 그림은 사진이나 영상과는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그곳의 인상, 감동을 남기려 해요. 그 골목이 없어지더라도 과거 언젠가 우리가 숱하게 걸었고, 예쁘다면서 그림 그리고 사랑하고 위안을 얻은 골목이 여기 존재했다고요.” 이민이 주먹의 압력으로 판을 누른다. 보드에 색을 입혀 다시 누른다. 다섯 번쯤에 이르자 골목에 시간의 흔적이 나타난다. 여섯 번, 일곱 번, 열 번…, 점점 흔적이 역력해진다. 세월을 머금은 작품은 명징하고도 아련하다. 바로 내가 저 길을 걷는 듯하다.
누구나 일상에서 예술을 누리길 바라며 작가는 블로그에 작품 가격을 공개하고,
크기별로 가격을 동일하게 책정했다. 얼마 전에는 양림동 연작 99점을
판매한 금액 1억 원을 고스란히 미혼모를 위해 기부했다.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을 기록하는 자
작가는 양림동 전시를 하면서 큰 결심을 했다. “어려서부터 미혼모에 관심이 갔어요.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 아이를 낳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저는 다 짐작도 못 해요. 그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죠.” 전시와 함께 통장을 개설해 그림 판매 금액을 무조건 모았다. 개인은 물론 한국의 주요 미술관도 구입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금액이 1억 원. 작가는 지역 내 미혼모를 위해 써 달라며 올해 4월 전액을 광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지정 기탁했다. “9월 스타북스 출판사에서 낼 양림동 화집 에세이에 작품 구매자 성함을 수록하려고요. 그 모든 분을 대표해 제가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작가로서 작은 역할을 해내서 기쁘고 고맙습니다.” 독창적 기법인 판타블로를 고안하고, 아직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을 작품으로 옮겨 오는 기록자 이민은 다시 밖으로 나간다. 그의 캔버스에 아름다운 오늘이, 휙 지나가 잊어버린 어제가 쌓인다. 어느 날 문득 사무치게 그리워질 시간이.
이민
196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초등학생 때 광주로 이사했다. 조선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한 뒤 판화에 빠져 판화가 유명한 일본 다마미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중앙미술대전, 일본 판화가협회 공모전 등에서 수상하고 도쿄의 시로타 갤러리 전속 작가가 되는 등 국내외에서 수많은 전시를 개최하며 사랑받았다. 처음에는 추상성이 강한 수성 목판화 작업을 하다 40대에 들어서 그만의 판화 기법인 판타블로를 창안했다. 폼보드에 잉크를 칠해 수차례 반복해서 손으로 눌러 찍은 작품은 두꺼운 질감과 서정적 색감이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예술의전당, 미국 포틀랜드 아트 뮤지엄, 일본 마치다 시립 국제판화박물관, 뉴질랜드·캐나다 등의 대사관·영사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5월 18일부터 6월 12일까지 서울 갤러리단정에서 전시 <제주, 찰나보다 뜨겁게>를 연다. 문의 02-6104-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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