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했기에 조각가라고 부르려다, 움직이는 기계 작품에 천착해 왔으니 키네틱 아티스트라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20년간 쌓은 기계공학 실력을 헤아려 볼 때, 엔지니어라는 수식 역시 어느 정도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묻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알고 싶었다. 당신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작품이 키네틱 아트 범주에 들긴 해요. 조각에서 예술을 시작한 것도 맞고요. 기계 작품을 고장 내지 않고 완성할 만큼의 지식을 갖추기도 했죠. 하긴 뭐라고 해도 괜찮겠어요.” 최우람이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인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기계를 매체 삼아 던져 온 질문이에요.” 벽에 설치한 기계 작품이 살아 있는 듯 꿈틀대는 작업실 한편에서 그는 물었다. 당신이 무엇이냐 묻는 당신은 정작 누구인지. 불쑥 돌아온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는 이를 앞에 두고 그는 계속 진지했다.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함께 그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조각가이자 키네틱 아티스트인 최우람은 몽상가이면서 현실주의자다. 자유로운 예술가, 냉철한 철학자, 꿈꾸는 활동가의 면모를 순간순간 넘나든다. 하긴 뭐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답을 찾자 하는데. 호탕하게 웃다가도 금방 자세를 고쳐 앉고는 눈을 반짝이는 최우람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우리로, 우리는 세상으로 자꾸만 팽창되었다.
욕망의 정글 속으로
서울 연희동 그의 작업실은 언뜻 보아 공장 같다. 사방을 둘러 감은 상자들에 볼트와 너트가 빼곡하고, 여기저기 공구가 널렸으며, 책장에는 기계공학 관련 서적이 수두룩하다. 나머지 공간엔 선반과 컴퓨터, 설계 도면이 놓였다. 그것들 사이에서, 완성했거나 미완인 기계 생명체 작품이 눈에 띈다. 작가의 아틀리에라기엔 조금 기이하고, 공장이라기에는 곳곳이 예술적 분위기로 흥건하다. 둘을 나누는 경계, 혹은 둘을 아우르는 교점인 이 작업실이 움직임으로써 생명을 얻는 기계 작품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묘한 감상을 안긴다.
“욕망은 인류가 창조한 모든 것에 투영되었어요. 예를 들어 현재 농기구는 적은 인력으로 수확량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이 수천 년간 진화한 결정체예요. 물질만이 아니라 텍스트나 정보도 마찬가지고요. 그중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바꾸어 가요. 그게 기계로 발현되는 것이죠.”
2012년 작 ‘Pavilion(파빌리온)’에서 최우람은 종교의 성물함 이미지를 차용했다. 금을 입힌 화려한 궤 안, 성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비닐봉지가 부유한다. 성스러움을 향한 세월이 집적된 성물함과 하찮게 떠다니는 비닐봉지의 차이는 아무리 해도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인류가 고결하다 믿는 사물은, 관념은 부질없다는 건가? 쩨쩨하다 여긴 개체와 현상이 실은 굉장한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인가? 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이가 그렇다 하면 맞고, 아니라면 틀린 해석이 된다. 작가가 제 잣대를 강요한 흔적이 없는 작품은 오로지 보여 줄 뿐이니.
설계하고 붙이고 조인 끝에 기계라는 생명체가 창조된다.
인간이 욕망을 투영한 기계를 통해 최우람은 인간의 정체를 묻는다.
‘URC-1’과 ‘URC-2’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최우람은 폐차장에 나동그라진 헤드라이트를 모아 동그랗게 이어 붙이고 불빛을 켰다. 더는 욕망을 투영할 수 없어 죽어 버린 사물이 별처럼 환하게 부활했다. 생명은 별에서 탄생해 별이 내어 주는 빛살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연유로 이 작품은 무심코 쓰고 버리는 온갖 물건의 본질을 탐구하도록 이끈다. 쓰임을 다한 대상은 반드시 죽는가? 죽었다 간주한 대상도 이렇게 되살아나거늘, 죽음은 과연 망상에 불과한가? 작가가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삶의 단면을 포착해 보이는 이 작품의 해석 또한 관객의 관점에 따라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그리하여 진실은 오직 하나만 남는다. 숭고함과 보잘것없음, 삶과 죽음의 틈을 벌리고 가로지르는 욕망을 나라는 존재가 최우람의 작품을 통해 떠올리고 있다는, 바로 그 진실이다
결국 희망에 대한 이야기
작품 이야기를 듣던 그때였다. 어쩔 수 없이 당신은 무엇이냐 질문해야 했고, 최우람은 그런 당신은 정작 무엇이냐 되물었다. 작가 최우람이 흐릿해지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나와 다르지 않은 우리로, 결국 세상의 일부이자 세상 자체로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함께 그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기계 생명체 작품에 천착해 온 이유는 비로소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오늘날 문명의 총화인 기계야말로 인류가 구축한 욕망의 대변자요 화신일 테니까. 여기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우리 자신에게 묻고 대답해야 할 질문이기도 한. 함께 가야 할 그곳은 어디일까.
“이 시대에 어떻게 전쟁이 일어나겠어, 했는데 잘못된 욕망 때문에 애꿎은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끌려가잖아요. 작금의 정치, 종교, 사회 시스템은 물론 장점이 있겠지만 단점을 키워 갔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죠. 그건 누군가가 우리를 인도하리라는 방관 섞인 기대, 시스템이 굴러가지 않는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거라는 불분명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요.”
그는 올 9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전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작업실에서 스태프들과 회의하고 작품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상을 반복한다. 밥을 먹거나 자는 시간 외에는 작품 활동만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말을 아꼈으나 절망에 관한 작품이 되리라 했다. 다소 무거운 최우람의 말은 뜻밖에도 여운을 남겼다. 희망에 무감각한 절망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희망하는 자에게만 희망이 사라진 절망이 들이닥치고, 희망을 믿는 자만이 절망을 딛고 일어나려 한다. 그가 의도했거니와, 움직이기에 욕망을 더 생생하게 투영하는 기계 작품을 수많은 내가 들여다보는, 바로 그 진실한 순간은 가리켜 보인다. 나 자신을 바르게 알며, 욕망에서 빚어진 오류를 함께 고쳐 나간 끝에 도달하는 그곳을. “개인이 지닌 마음과 추구하는 행동에서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어요. 정말 그렇게 될지 확실치 않다는 것과 별개로 저는 믿습니다. 희망은 늘 살아 있어요.”
최우람은 기계 생명체를 창조해 왔다. 2006년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개인전에서 인간과 도시 문명의 관계를 빗댄 대형 작품 ‘Urbanus(어바누스)’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받은 이래 쉼 없이 기계 생명체를 만들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이미 대가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그는 공손하고 따듯했다. 상대방의 어떤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매번 쾌활하게 웃으며 공감했다. 속내를 진중히 털어놓는 찰나에도 얼굴빛은 밝았다. 대가는 근엄하거나 딱딱할 거라는 생각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견해임을 상기해 보더라도, 들뜬 표정으로 겸허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신예의 그것을 꼭 닮았다. 인간을 믿고 사랑하는 이가 지켜 나가는 인간적인 첫 마음이 최우람에게 또렷한 것이었다.
그는 한때 작품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강박에 가까운 관심을 두었다. 금속 소재와 플라스틱을 주로 써 작품이 항구히 남길 바랐다. 그러다 2012년 무렵에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분홍 비닐로 개인들의 맹목적인 집단화를 은유한 ‘Pink Hysteria(핑크 히스테리아)’, 시간의 흐름이 담긴 꽃잎을 천으로 나타낸 ‘하나(이 박사님께 드리는 답장)’는 단단한 물성에 집중해 온 작품들과 비교하면 무척 연약해 보인다. 금세 허물어질 듯 무른 소재로 만들었으나, 헛되이 소비되는 유행의 쓸쓸한 풍경과 빛바랜 시간의 흔적은 그런 이유로 더욱 단단한 인상을 건넨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망가져 버릴지언정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에 보다 주목하고 싶었어요. 용기를 낸 거죠. 그러니까 조금씩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인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기계를 매체 삼아 던져 온 질문이에요.
같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함께 그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함께 나아가는 길에서
최우람이 욕망을 덜어 내며 함께 다가가려는 거기는 놀라운 세상일지 모른다. “인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기계를 매체 삼아 던지는 이 질문이 그곳에선 더는 질문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꿈틀대는 은색 금속과 영롱한 불빛을 감상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는 우리로, 우리는 세상으로 자꾸만 팽창된다. 우리가 알지 못했대도 최우람의 곁에는 언제나 우리가 있었다.
최우람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로봇 과학자를 꿈꾸던 어린 시절을 거쳐 고등학생 때 찰흙을 만져 보고는 주무르는 대로 변하는 형체에 매료돼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중앙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6년,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기계 생명체 작품 ‘Urbanus(어바누스)’를 전시하면서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이후 미국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미술관, 호주 퍼스 존 커틴 갤러리, 타이완 타이중 국립대만미술관 등에서 잇달아 개인전을 열어 기계 생명체 작품을 소개했다. 서울 청계천 공구거리의 수많은 스승에게 전수받고 발전시킨 공학 기술로 창조한 기계 생명체 작품은 말 그대로 생명체처럼 정교하게 꿈틀거린다. 최우람은 인간의 욕망이 집적된 기계를 통해 결국 인간의 정체를 묻는다. 현재 그는 올 9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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