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꾼 총천연색 꿈이 채 날아가기 전에 캔버스에 옮기는 사람, 빠키는 수행자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호흡을 가다듬고 붓을 든다. 전화벨, 이메일·문자메시지 수신 알림이 울리지 않는 적막하고 정결한 시간, 그는 잠이라는 깊은 명상을 통해 끌어 올린 에너지를 고요히 발산한다. “꿈을 자주 꿔요. 무언가 이상한 걸 만드는 꿈을 꾸는데, 그게 작업의 단초가 되곤 해요. 어릴 때부터 줄곧 형이상학적인 생각에 빠져들곤 했어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거든요. 죽은 후 내 존재의 행방에 대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해요.” 존재의 심연에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 빠키는 실존주의자다.
수행하는 화승처럼
3월 첫 주말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을 찾는다면 부처의 눈에 비쳤을 열락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불상과 보살상 일곱 점을 한데 모은 빠키의 디스플레이 작업 ‘승려 장인 새로운 길을 걷다’가 <조선의 승려 장인>전의 대미를 장식하기 때문이다. 은은한 오라에 휩싸인 유물은 기하학무늬가 이루는 무아지경 속에서 더욱 형형한 존재감을 떨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는 동안, 4차원의 만다라를 부유하는 듯한 기분에 빠진다.
<조선의 승려 장인>전에서 주목하는 것은 불교미술의 주체인 화승과 조각승이다. 그리스신화에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있다면, 불교에는 최초의 불상을 만들고 신통력으로 건물을 지어 올린 천신 비수갈마천이 있다. 비수갈마천은 승려 장인이 도달하고자 한 이상향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 부르며 예술가로서 자존을 드높였다.
승려 예술가와 에너지가 통하는 ‘현대미술계의 비수갈마천’을 물색하던 전시 주최 측은 2017년 국립한글박물관이 미국 LA 문화원에서 개최한 세종 탄생 620주년 특별 전시 <소리×글자: 한글 디자인>에 참여한 빠키의 작품을 눈여겨봤다. 우주의 섭리, 순환의 리듬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빠키와 불교미술은 확실히 통하는 데가 있었다. “관객들은 이 일곱 점의 불보살을 마주한 다음 단원 김홍도의 ‘서방정토로 오르는 승려 뒷모습’을 맞닥뜨려요. 이 절정의 국면에서 강한 기운을 방출할 수 있는 현대 작가를 찾았다고 들었어요. 그게 바로 저였죠.” ‘순환, 궤도, 생성’은 2020년에 열린 빠키의 개인전 제목이자, 그의 범우주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무의식의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긴 채 색, 선, 면의 조화를 꾀했다. 이 조형 요소들은 우연한 배치와 구성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 빠키의 관심은 이 조형적 관계가 발산하는 힘에 있다.
불교미술과 빠키가 조우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평상시 키네틱 아트(움직임을 활용한 조형 표현)나 인터랙티브 아트(관객의 움직임에 감응하는 미술 작품)를 아울러 과감한 시도를 서슴지 않은 그는 이번엔 색, 선, 면 등 기하학 요소로 평면을 구성하는 데 집중했다. 유물과의 조화로운 구성은 물론, 유물의 안전 보장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움직임을 부여하고 싶었어요. 불화, 불상에서 느낀 힘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안정과 조화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했고, 지금의 결과물에 다다랐어요. 좌대도 최대한 튼튼하게 만들었죠. 유물의 무게와 형태를 고려해 모든 요소를 정교하게 측정하고 다듬었거든요.”
반응은 뜨거웠다. 관객은 일곱 점 조각을 아우르는 형형색색의 풍경에 열광했다. 보수적인 종교계도 낯설지만 새로운 시도라며 호평했다. “기존의 반응과는 확실히 달랐어요. 불교미술과 제 작업의 접점에서 예기치 못한 불꽃이 튄 모양이에요. 제가 그간 해 온 작업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제가 지금 작가로서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죠. 승려 예술가와의 느슨한 연결 고리를 발견한 것 또한 즐거웠어요.”
착시, 반복, 무의식
옵아트(optical art)는 점, 선, 면 등 조형 요소를 반복․확장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추상미술 장르다. 빠키가 옵아트 형식을 취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화려한 색이나 기이한 무늬에 그치지 않는다.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컬러풀한 조형 작업이 주를 이루지만, 그 이면엔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저는 색으로써 인간의 원초, 근본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어요.” 빠키는 모든 인간을 우주 속 티끌 같은 존재로 본다. 우리는 그 티끌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살아간다. 멀리서 보면 이 티끌의 형태는 무한한 반복과 확장을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패턴을 만든다. 빠키는 그 생성과 순환, 중첩의 과정을 ‘리추얼(ritual)’로서 고양하는 일을 벌인다.
2015년 대림미술관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열린 <빠키: 불완전한 장치>전은 빠키가 자신의 조형 언어를 얼마나 다양한 매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 준 기회였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려 해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저 불안과 ‘불완’의 상태로 존재하죠.” 빠키에게 ‘리추얼’은 불완전한 장치인 우리 인간의 무의식적 행위가 빚어 낸 우연의 산물이다. 이 전시에서 그는 행동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의 유명한 미신 실험을 경유한다. 스키너는 비둘기를 실험 상자에 넣고 15초마다 먹이를 반복적으로 주었는데, 비둘기는 다음 먹이를 주기 전 저도 모르게 특정 행동을 반복한다. 사람들이 미신을 갖고 제의를 벌이는 것도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제가 창조한 새로운 규칙과 질서를 전시장 전체에 부여했어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각기 다른 패턴의 영상을 제시하기도 하고, 회전하는 조형물을 놓아 시각적 유희를 제공하기도 했죠.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저는 ‘의식’이자 ‘놀이’로 여겼어요.” 무의식과 꿈, 상상으로 이루어진 빠키의 세계는 원초적 즐거움을 일깨우고, 자유 의지를 각성하게 한다.
빠키는 모든 인간을 우주 속 티끌 같은 존재로 본다. 우리는 그 티끌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살아간다. 멀리서 보면 이 티끌의 형태는 무한한 반복과 확장을 이루며, 하나의 거대한 패턴을 만든다. 빠키는 그 생성과 순환, 중첩의 과정을 ‘리추얼’로서 고양하는 일을 벌인다.
리듬 타는 구도자
“회화도 음악 같은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 음악을 추상화로 표현한 칸딘스키의 말이다. 옵아트의 선구자 빅토르 바사렐리는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점, 선, 면이 자아내는 리듬에서 영감을 받았다. 앞선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빠키 또한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를 직조하고자 음악과 리듬을 동원한다. 음악을 연구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수학했을 만큼 사운드에 대한 그의 애착은 상당하다.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지만, 사운드와 리듬은 언제나 제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어요. 사운드를 수집하는 채음(採音) 작업을 지속하는 이유예요.”
빠키에게 음악을 함께 듣는 일은 취향의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의 파동을 느끼는 행위다. 그의 음악적 시도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입주작가전의 연계 퍼포먼스 <마인드–바디 프라블럼: 무의식의 재배열>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이 전시에서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연주하는 사운드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조형 요소를 나열한 평면 작업을 선보였다. 이후 2021년 인사동 KOTE에서 열린 전시 <규칙과 불규칙의 리듬>에서는 직접 DJ로 나서 음악을 틀기도 했다. 올해는 더 많은 기회를 통해, 더 많은 이와 그만의 파동을 나눌 예정이다. “3월에는 아마 독일 베를린에 있을 거예요. 초대전에 참여할 예정인데, 그곳에서 디제잉 공연을 펼쳐 보려고요.”
빠키는 최근 제주와 강원도 양양 등지를 오가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막연히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제주에 머물 기회가 생겼다. “팬데믹 이후 움직임이 정체됐지만, 예전엔 새롭고 낯선 지역에서 발견하는 사물을 수집해 작업으로 연결시키기도 했어요. ‘빠빠빠 비디오 프로젝트’와 ‘서울 어반 아트 프로젝트’가 그 결과물이죠. 지역에서 느끼는 감흥을 표현했던, 이제는 아득한 과거가 된 작업이에요. 앞으로는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요. 서울을 벗어나 조금 더 많은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주의 리듬, 무의식의 흐름, 우연의 바닷속에서 그가 부디 더 넓은 세상과 부딪히길, 더 큰 에너지를 쏟아 내길 바란다.
빠키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시청각 자극으로 의식을 고양했다. 지금까지도 미술과 음악은 그의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이다. 홍익대학교 영상대학원에서 인터랙션 디자인을 전공한 후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아트 사이언스를 공부했으며, 현재는 ‘빠빠빠 탐구소’라는 1인 스튜디오의 탐구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탐구 대상은 에너지, 경계 그리고 빠키 자신이다. 영상, 키네틱 아트,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 다양한 시각예술 분야를 넘나들면서 작업해 왔다. 최근에는 메타버스에서 자아를 표현하기 위한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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