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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삶의 이야기, 충주

삶은 이야기를 꽃피운다. 지현동 사과나무 이야기길, 소태면 스페이스선을 둘러보며 충북 충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UpdatedOn Januar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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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숨었다. 분명 있을 텐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강은 보이지만 흐릿하고 강가에 늘어선 나무는 빛깔이 엷어 멀게 느껴진다. 오늘 충주는 강과 나무가 아니라면 모두 안개다. 남한강과 탄금호에서 올라온 희뿌연 장막이 구름처럼 흐르는 하얀 도시에 마침 상고대가 피었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아롱져 더 꿈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단단한 삶들이 저 안에서 우리를 기다릴 듯하다.

충주를 여행지로 결정한 이유는 하나, 작년 12월 31일 이천 부발역에서 충주역을 잇는 중부내륙선이 개통했기 때문이다. KTX-이음이 오가는 중부내륙선이 계획대로 서울 수서역까지 연결되고, 남부내륙선이 경남 거제까지 이어지는 2027년 무렵 충주는 한반도를 종단하는 새 고속철도 노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충주역까지 2시간 50여 분이 걸린다. 지난해 12월 31일에 이천 부발역에서 충주역을 잇는 KTX-이음 중부내륙선이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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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벽화 마을, 지현동

머잖아 더욱 분주해질 충주역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도심에 이르려 무던히 애쓰던 안개가 이제 됐다 싶은지 물러나는 중이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길 없는 안개 싸인 길을 달려 전부 선명한 길에 섰다. 깊숙한 내륙을 가로지르는 남한강이 수시로 안개를 드리우는 충주가 하나씩 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희뿌연 장막이 걷히는 도시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현동에 도착했다. 충주천 서쪽에 군데군데 놓인 골목 중 하나로 발걸음을 옮기자 주택이 서너 채 붙은 구역들 사이에서 잘 정비된 길이 나온다. 주민 몇몇만 어디론가 향하는 조용한 거리, 담벼락 그림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두 개가 아니다. 저 멀리 거리 끄트머리 담장에도 벽화가 있다. 서로 돋보이려 하지 않고 정답게 소곤거리는 양 조화하는 그림 덕분에 걷는 재미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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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했던 충주 구도심 지현동이 2018년부터 실시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화사한 벽화 마을이 되었다. 사과를 주제로 한 벽화가 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다. 문의 043-856-9493

쇠락했던 충주 구도심 지현동이 2018년부터 실시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화사한 벽화 마을이 되었다. 사과를 주제로 한 벽화가 마을 곳곳에 그려져 있다. 문의 043-856-9493


“지현동 주민 모두 재생 사업에 적극적이에요. 그 덕분에 이렇게 예쁜 벽화 마을이 탄생했죠.”

그림마다 색채와 기법은 달라도 사과가 하나 이상 꼭 등장한다. 지현동은 저 유명한 충주 사과의 기원지다. 1912년 지현동에 심은 50그루는 사과 농사에 적합한 연평균 일조량과 기온, 토양 성분을 만나 무럭무럭 자랐다. 이를 기점으로 충주 곳곳에서 사과나무를 재배한 것이 오늘날 명성으로 이어졌다. 구석구석 벽화를 입혀 ‘사과나무 이야기길’로 거듭난 지현동은 그때를 기억하는 거대한 기념물이 되었다. 담장에서 사과를 따 한 입 베어 문 듯 맛깔난 산책을 즐기던 중 동행한 권연정 도시 재생 사업 활동가가 말했다. “쇠락한 동네였어요. 병원이나 약국 같은 시설이 멀어 도시 속 시골로 여겨지기도 했고요. 오후 6시가 지나면 온통 깜깜해져 분위기가 꽤 소슬했죠.”

벽화로 둘러싸인 골목 어디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공들여 매만진 흔적이 역력한 말끔한 거리가 얼마 전엔 소슬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지현동은 어떤 여정을 거친 걸까. “2018년부터 정부와 충북도, 충주시가 힘을 모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진행했어요. 사과나무를 콘셉트로 지현동을 단장하자는 계획이었죠.”

단독주택이 밀집한 지현동은 충주 구도심에 속한다. 충주천 변을 따라 작은 상권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그마저 나날이 기울었고 젊은 층은 계속 빠져나갔다. 재생 사업 전에 뜻 있는 작가들이 주민 협조를 얻어 작업한 벽화에서 착안해 대대적인 경관 개선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거리를 열다섯 구역으로 나눠 충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에게 배분했고, 작가들은 주민과 협업해 사과 이야기를 담장에 그렸다.

권연정 활동가는 시와 주민, 주민과 작가, 작가와 시의 소통을 돕고 재생 사업을 이끄는 코디네이터 중 하나다. 그는 우리와 마을을 걸으며 안내하고 설명하느라 숨차 하면서도 내내 환했다. 말끝마다 터지는 웃음소리가 정말 맑았다. “실은 저도 화가예요. 충주에서 나고 자라 현재는 지현동에서 살아요. 벽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사업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하는 코디네이터이기에 참여하지 않는 게 맞죠. 아쉽지 않았냐고요? 여기 벽화 보세요. 뿌듯해요.”

결국, 사람 이야기

벽화는 재생 사업의 하나였다. 노후 주택을 정비하고 공원을 건립했다. 갤러리 등을 운영할 지현문화플랫폼과 애플뮤지엄은 올여름 완공 예정이다. 마을은 결국 사람이 사는 곳, 무엇보다 주민이 중요했다. 권 활동가를 비롯한 사업 참여 인원은 주민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구성했다. 주민 대상 예술 강의와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을 열었으며, 홍보 콘텐츠를 함께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재생의 진짜 의미를 알아 갔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세요. 마을 예술 행사 때는 직접 큐레이터가 되시고요. 뿌듯하지 않을 수 있나요. 하하.” 말끝에서 터지는 웃음소리가 어김없이 맑게 지현동 골목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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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충주 소태면 언덕에 위치한스 페이스선은 생태 공동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며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보급한다. 문의 070-8835-4253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충주 소태면 언덕에 위치한스 페이스선은 생태 공동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며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보급한다. 문의 070-8835-4253

지속 가능한 삶, 스페이스선

도심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간다. 유유한 남한강과 새하얀 상고대에서 겨울 정취가 날아온다. 안개는 다 사라지지 않았다. 포근하게 젖어 드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살아 보고 싶다 생각했다. 여기서 산다면 우리도 풍경처럼 따듯해지리라는 예감. 충주와 강원도 원주의 경계에 위치한 스페이스선 엄수정 대표도 그랬다. 강을 좋아한 부모님이 물 따라 내려오다 발견한 소태면 언덕에선 남한강 전경이 펼쳐졌다. 부모님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미국에서 살던 엄 대표도 2012년 소태면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도시에서만 생활한 데다 충주엔 아무 연고도 없었다. “엄마가 텃밭 가꾸고 쑥 캐는 걸 좋아하셨어요. 엄마의 삶을 이해해 보기로 하고 자급자족했죠. 이곳 언덕은 원래 밤나무 군락이어서 계속 밤을 수확했고요. 오이, 가지, 고추, 감자도 씨를 심어 키웠어요. 그러다 깨달았죠.”

심으면 자라는 자연의 이치가 신비로웠고 자연에 기댄 온갖 생명의 소중함은 가슴 절절히 다가왔다. 밭일하다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보고는 나 혼자 편하자고 이런 생명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하여 먹먹해졌다. 그즈음 여름에는 미루는 습관 때문에 수확 시기를 놓친 감자가 몇 주간 장대비를 맞고 무더기로 썩는 일이 벌어졌다. 자연에 너무 미안했다. 더불어 사는 삶, 지속 가능한 삶이 무얼까 고민했다. 엄 대표는 결심하고 2014년 스페이스선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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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함부로 대하는 자연에 너무 미안했어요.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다 생태 공동체 스페이스선을 설립했죠.”

스페이스선이 위치한소태면 언덕엔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엄수정 대표는 밤을 비롯해 오이, 고추 등을키우며 자급자족한다.

스페이스선이 위치한소태면 언덕엔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엄수정 대표는 밤을 비롯해 오이, 고추 등을키우며 자급자족한다.

스페이스선이 위치한소태면 언덕엔 밤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엄수정 대표는 밤을 비롯해 오이, 고추 등을키우며 자급자족한다.

더불어 살아 자유로운 오늘

스페이스선은 생태 공동체다. 밤나무 군락이 둘러 감은 마당에서 소 두 마리, 양 세 마리, 말 두 마리가 한가로이 먹이를 먹고 있다. 닭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통에 몇 마리인지 세지 못했다. 낯선 우리를 힐끔하던 소가 느릿느릿 이쪽으로 온다. 부르지 않았는데 와서는 호기심 어린 게 분명한 눈망울을 내비친다. 손을 뻗자 머리를 내민다. 어떤 경계심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리가 궁금하기만 한 것 같다. “반려동물이에요. 구제역 파동 때 죽은 생명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거든요. 그래서 농장 이름을 ‘해원 동물 농장’으로 지었어요. 해원(解冤),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죠.”

네 명에서 출발한 공동체는 지금 엄 대표를 포함한 다섯 명과 동물, 소태면 언덕에 가득한 밤나무와 밭에서 나는 과일, 채소가 함께하는 진정한 생태 공동체가 되었다. 물론, 모여 살기만 하는 건 아니다. 플라스틱 섬유 대신에 경기도 여주에서 건강하게 기른 식물 수세미를 써 주방 수세미를 만들고, 분해되지 않는 합성세제는 하나도 넣지 않은 코코넛 오일 주방 비누를 제조해 판매한다. 제품 포장지 또한 재생 가능한 사탕수수 잔여물로 제작한 것이다. 비누망, 수건 등 모든 제품이 마찬가지. 오염된 물을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길 바라며 물을 사용하지 않는 수세식 화장실과 빗물 탱크를 개발하고 보급했다. 코로나19로 잠시 중단했으나 스페이스선은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삶을 세상에 소개해 왔다. “예전엔 늘 남과 나를 비교했어요. 위축되고 우울한 날이 많았죠. 지금은 주어진 일을 할 뿐이에요. 자유롭고 행복해요.”

스페이스선의 모토는 ‘We, Listen to the Earth(지구에게 듣다)’다. 잘 들어야 알게 되고, 알아야 이해하고, 이해하면 공존한다. 조금 전, 부르지 않았어도 소는 다가와 반짝반짝한 눈망울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우리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소태면 작은 언덕에는 더불어 사는 곳, 스페이스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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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덮인 흐릿한 풍경 속에서,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삶을 기억해 본다.

여전히 안개 덮인 남한강 줄기 흐릿한 풍경 속에서, 분명 존재하지만 모습은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삶을 기억해 본다.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없을까.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단단한 삶들이 오늘도 이 땅을 산다. 저 안개 안에, 서로 손 내밀어 말하고 들으며 함께 걷는 이들이 존재한다. 나의 작은 노력이 쇠락한 마을을 재생하고 동물을 살리고, 마침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충주에 밤이 내린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놓인 남한강 변 중앙탑공원에서 여행을 마무리한다. 어두운 밤. 충주는 다시 흐릿해지나 저 어둠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흐르는지, 이젠 알 것 같다. 눈을 감아도 선명한 삶들과 손잡고 한 걸음씩, 세상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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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규보
Photographer 이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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