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밤 9시 전후, 들판에 사람이 속속 모인다. 말뚝이, 양반, 영노(사자를 닮은 괴수) 등 탈 쓴 이가 등장해 여섯 마당을 선보이고 관객은 극에 몰입해 웃고 한숨 쉬고 눈물짓다 다시 폭소를 터뜨린다. 마지막에는 탈꾼과 관객이 한바탕 춤을 추며 어우러진다. 환한 달빛 아래 숨이 턱에 차오른 사람들 표정이 밝다. 비로소 진짜 한 해가 시작되는 느낌. 이토록 활기차게 올 한 해를 보내야겠다는 의지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여문다. 경남 사천 축동면 가산리에서 행한 탈놀이 가산오광대 이야기다. 이 시기에 동래야류, 수영야류, 북청사자놀음처럼 전국에 유사하고도 고유한 놀음이 행해졌다.
예부터 정월에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1년을 정비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행사를 치렀다. 농사지을 땐 각자도생이 아닌 협동이 필수인 데다 대부분 사람이 태어난 동네에서 평생을 살던 시절이라 이렇듯 공동체 행사가 필수였다. 이날을 위해 마을 회의를 열어 집집이 추렴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풍물패가 집을 돌면서 복을 빌고, 제사 지낸 고기는 균등하게 나누어 먹었다. 길게는 한 달을 준비한 행사는 모두가 하나라는 의식과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봄, 여름, 가을보다 상대적으로 한가한 겨울이 정월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쥐불놀이, 부럼 깨물기, 오곡밥과 귀밝이술 먹기 말고도 수많은 세시풍속이 있었다. 마을 사람이 합동해 놀거나, 이웃 마을과 줄다리기 같은 시합으로 승부를 가리기도 했다. 전북 지역에는 기세배라는 놀이가 유행했다. 각 마을은 농신기(農神旗)를 보유했는데, 주로 서열 낮은 마을이 높은 마을을 찾아가 깃발로 세배를 올리고 화합의 굿판을 벌였다. 서열이 비슷한 마을끼리는 누가 세배를 하느냐로 신경전을 펼쳤으나 결말은 서로 예의를 갖춘 인사와 연대의 한마당이었다.
한 해의 출발점이니만큼 풍년, 풍어 기원 의례와 더불어 운수를 가늠하는 일도 중요했다. 나무 그림자, 보리 뿌리, 등잔불, 얼음, 파래, 밥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만한 소재로 점을 쳤다. 나무그림자점은 대보름달이 떴을 때 사람 키의 나무를 마당에 세우고 그림자 길이로 풍흉을 예측했다. 대개 길면 풍년, 짧으면 흉년이라 여겼다. 보리뿌리점은 뿌리가 많으면 풍년, 적으면 흉년이다. 메점으로는 개인의 길흉을 살폈다. 메점은 제삿밥을 의미하는 ‘메’와 ‘점’을 합한 단어로, 쌀을 사발에 담아 솥에 찌고 나서 밥 가운데가 봉오리 형태를 띠면 길하고 움푹하면 흉하다고 판단했다. 식구불켜기는 정월 열나흘에 가족 수대로 등잔불을 켠 다음 불이 깨끗하게 잘 타는지를 보고 신수를 짐작하는 점이다.
나쁜 운이 나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혜로운 만회 장치 덕분이다. 깨끗한 종이에 밥을 싸서 물에 던져 흘려보내는 어부슴을 하거나, 버선을 거꾸로 끼운 막대기를 지붕에 꽂아서 버선이 바람에 날아가는 것으로 액운도 함께 사라진다고 믿었다. 대보름날, 개천에 징검다리 돌을 놓는 등 착한 행위를 해 액운을 면하는 적선이라는 풍속도 있었다. 운이 하늘에서 내리는지는 몰라도, 흉을 달래고 운명을 개척하는 가능성 역시 그 사람의 몫이라는 뜻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미지의 영역이다. 날마다 마음을 새로이 해 오늘을 충실히 보내고 내일을 대비할 뿐이다. 하나 더 기억할 사실. 두레 구성원으로서 농사를 짓진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 내 삶과 타인의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상, 올해도 예의를 지키며 호랑이처럼 힘차고 신명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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