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는 말은 나에게 뜨거운 존재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경주역이 그립다. 덜커덩덜커덩 역으로 들어온 기차가 수학여행 온 학생을 쏟아 내면 경주역 광장은 잠시 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오와 열을 맞추려 꼼지락대는 학생과 인원을 점검하느라 바쁜 선생님이 수선스럽던 광장. ‘국민 수학여행지’ 경주의 대문 격인 경주역은 교복 입은 학생들로 종종 복작였다. 그뿐이랴. 포항·대구·울산을 기차로 연결하는 사통팔달 요지이자 경주 시내버스 대부분이 거치는 지역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다. 보따리 이고 기차를 기다리는 상인부터 알콩달콩하며 역을 빠져나가는 신혼부부까지, 경주역은 이 도시에서 가장 활기찬 공간이었다.
이제 그 시절 풍경은 역사가 되었다.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화 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 시작한 울산~포항 복선 전철화 사업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선을 가동하면서 기존에 경주를 통과한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이 지난해 12월 28일 운행을 종료했다. 폐선 길이는 전국 지자체에서 가장 긴 80.3킬로미터에 이른다. 경주에 살지 않더라도 많은 이에게 낯익은 경주역, 불국사역을 비롯해 지역 사람의 애환이 어린 모화역, 사방역, 청령역, 건천역 등 17개 역 또한 폐선과 마찬가지로 같은 날 무대에서 퇴장했다.
신경주역에서 새 출발 하는 경주 기차의 시간
동해남부선과 중앙선을 대체하는 노선은 도심 외곽을 지난다. 시내를 관통하는 기존 노선이 신라 천년 고도의 문화유산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고민한 결과다. 경주역 기능은 KTX가 운행 중인 신경주역에 통합됐다. 그리고 조만간 신경주역은 경주역을 오가던 무궁화호는 물론이고 KTX와 KTX-산천, KTX-이음, SRT 등 모든 고속열차가 정차하는 첫 번째 역이 된다. 그때 우리는 그리운 경주역 풍경을 신경주역에서 만날 수 있다. 위치도, 시대도 다르지만 사람이 기차에 타고, 기차가 사람을 내려놓는 사연은 변치 않을 것이기에. 새 노선의 아화역, 서경주역, 안강역 또한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역들이 그랬듯 지역 사람의 애환을 품고 기억해 주겠다.
1918년 문을 연 경주역과 불국사역은 103년이란 시간을 역사에 새겼다. 104년, 그리고 그 이상의 시간은 없다. 경주역 광장에 가득한 학생과 불국사역 앞에서 불국사행 버스를 기다리는 여행객도 더는 보기 힘들다. 하지만 기차는 계속 달린다. 104년째 시간을 신경주역에 넘긴 경주의 역들은 영원히 달릴 기차처럼 마음과 마음에 남을 것이다. 그 시절 뜨겁게 살았던 경주역과 사람들이 그립다.
경주에서 사라지는 주요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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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역
경주 최남단 역으로 1937년에 역무원을 배치하고 영업을 개시했다. 모화라는 이름은 신라 때 불교에 귀의한 이들이 삭발한 머리카락을 여기서 불태우고 불국사로 들어간 데서 유래한다. 모화역은 인근 유동 인구가 줄어 2007년 일반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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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역
1935년에 개업한 나원역은 교통의 중심이던 경주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이용객이 많지 않아 오랜 기간 간이역 역할을 했다. 2008년과 2015년에 각각 여객과 화물 취급을 중단했으나 동해남부선 폐선 이후 서쪽에 이설한 선로의 서경주역이 기능을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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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역
선비를 많이 배출해 이름 붙은 사방리에서 경주역과 같은 해인 1918년부터 기차를 운행했다. 1945년 선로를 광궤로 개량하고 1958년 신축해 현재 모습을 갖췄으나 이용객 감소로 2007년 문을 닫았다. 폐역이었지만 상대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교행역으로 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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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동역
양동마을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양자동역은 한때 매년 2만~3만 명이 이용했지만 배차 간격이 길어지면서 승객이 줄었고 사방역과 함께 폐역이 됐다. 양동마을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뒤 외국인 관광객이 자주 들르는 사진 스폿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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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실역
불국사로 들어간다는 뜻의 입실역은 가을이면 연안리 황금 들판을 배경으로 기차가 달리는 풍경을 선사했다. 1921년 설립돼 시대 변화에도 불국사역을 관리하는 보통역 지위를 2015년까지 유지했다. 입실역의 교행 기능은 근처에 신설한 외동신호장이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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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역
곳곳에 무성한 푸른 대나무가 그대로 이름이 된 청령리 주민들이 역을 신설해 줄 것을 요구해 1967년 역무원을 배치하지 않는 간이역으로 만들었다. 단출한 지붕 아래 벤치 두 개와 팻말 하나만 놓였고, 형산강과 들녘을 뒤에 두어 청령역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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