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를 살피고 달래서 낸 한 줄기 철길이 아스라하다. 과거 비둘기호 기적 소리처럼 나전역에는 오늘도 따스한 소리가 울린다.
2002년 환경부가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이라는 책을 냈다. 한국 고유의 소리 100가지를 선정해 CD와 함께 담은 책이다. 가시연꽃밭의 폭우 소리, 싸리비로 낙엽 쓰는 소리, 가마솥 끓는 소리, 남대천 연어 돌아오는 소리. 목록만 보아도, 일상에 쫓겨 사느라 잊고 지내던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그 가운데 한 항목이 마지막 비둘기호 정선선 기적 소리다. 거대한 산이 어깨 맞대고 이어진 고장, 산세를 살피고 달래서 겨우 낸 단선 철도에 대한민국 마지막 비둘기호가 구불구불 다녔다. 쭉 뻗은 인생은 남의 얘기 같았을 고단한 사람에게 괜찮다, 천천히 가자 말하는 기차였을 것이다. 어제의 아름다운 소리가 역사로 남은 곳에서는 오늘 어떤 소리가 들릴까 궁금해 정선선 나전역을 향했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역이 카페가 되었다 했다.
카페이자 ‘현직’ 간이역, 나전역
민트색 산뜻한 나전역은 1969년 10월 문을 열었다. 이전까지 화전민이 ‘비단 밭(나전, 羅田)’을 일구던 동네가 탄광촌이 되면서다. 정선의 첩첩산중 땅 아래에는 ‘검은 황금’ 석탄이 빼곡하게 묻혀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유사 이래 정선 인구는 최대치를 기록했다. 석탄과 사람을 실어 나를 수단이 급한 데다 여기는 겨울에 눈이 잦고 도로 사정 여의치 않은 강원도 산골이다. 간신히 마련한 철도에 매달려 사람들은 출퇴근하고 통학하고 장 보러 다녔다. 단선이라 상행과 하행 열차가 번갈아 운행하는 소박한 시간표에, 여름엔 천장에서 털털 소리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유일한 냉방 기기였으나 기차도 역도 북적북적한 시절이었다.
석탄으로 번영한 역은 석탄 산업의 쇠락으로 시들어 갔다. ‘산업 역군’ 이라 칭송받던 전체 6만 2000여 명 광부는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10년 사이에 8000여 명만 남았다. 오가는 이 줄어든 역은 2011년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이 되었다. 나중에 기차가 무정차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철거 논의가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역은 살아남았다. 당장의 필요와 불필요만 따지다 많은 것을 잃은 세상에서 나전역은 작은 기적이다. 역무원이 없어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뜻을 모았다. 마침내 2020년 11월, 주민 협동조합이 역 전체를 카페로 단장해 새롭게 선보였다. 기차역 한쪽에 카페를 열거나 폐역을 카페로 활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현직 역’ 건물 전체가 카페로 변모한 사례는 처음이다. 정선아리랑열차가 나전역에 정차하기에 기차 타고 나전역을 방문하는 일도, 카페가 된 기차역에서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는 일도 가능하다. 벽면에 열차 시각표가 자랑스레 게시돼 있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카페 탁자에 웬 서랍이 있다. 역 직원이 실제 사용한 사무용 책상이어서 그렇다고 정현인 대표가 설명해 준다. 요즘은 맞이방이라 부르는 대합실 특유의 긴 나무 의자, 역장님 책상, 제복, 전화기 하나까지 원래 나전역 물품이다. 매표소는 부엌이 되었고, 과거에 표 사고 건네받는 창구로는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메뉴 또한 특별하다. 역 이름을 딴 나전역크림커피가 대표 메뉴다. 정선 특산물 곤드레로 크림을 만들어 우유, 에스프레소와 섞어 마신다. 우유·커피·곤드레크림이 세 층을 이루는 커피는 보기에 예쁘고 맛의 조화도 훌륭하다. 협동조합은 어디서나 내놓는 흔한 메뉴 대신 나전역만의 메뉴를 개발하고 싶었다. 곤드레를 넣어 튀긴 아란치니, 곤드레크림커피가 그 결과물이다. 최근에는 주변 농민이 재배한 사과를 이용해 사과라테, 사과밀크티를 출시했다. 음료와 아란치니, 샌드위치를 바구니에 담아서 주는 피크닉 세트도 인기다. 손님들은 승강장 바닥에, 나무 벤치에 식탁보 깔아 음식을 두고 경치를 감상하면서 소풍 나온 기분을 만끽한다. 카페 창문으로는 햇살이 한 움큼 쏟아지고 정선의 산과 하늘, 물과 바람이 기른 곤드레가 들어간 커피와 빵을 맛본다. 행복이라는 말이 손에 쥐여지는 느낌이다.
+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청량리역에서 정선아리랑열차를 타고 나전역까지 3시간 40여 분이 걸린다. 코로나19와 정선선 공사 상황에 따라 운행 여부가 달라지므로 사전에 확인해야 한다.
+ 나전역 카페 즐기기
1969년 문을 연 나전역은 석탄 산업이 쇠락하면서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이 되었다. 찾는 이 드물던 역을 주민이 주도해 카페로 예쁘게 꾸몄다. 정선아리랑열차가 이곳에 정차하는 덕분에 기차 타고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고,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볼 수도 있다. 이곳에서는 정선 특산물인 곤드레를 활용한 메뉴를 내놓는다. 곤드레크림을 올린 커피, 곤드레를 듬뿍 넣은 빵 등이다. 문의 033-563-3646
승강장에는 흰색 나무 이정표를 복원해 놓았다. 한쪽은 아우라지, 한쪽은 정선, 가운데에 가장 큰 글씨로 나전.
주인공이 된 간이역의 존재가 사랑스럽다.
오늘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어
이 역은 드라마와 영화, CF의 배경으로도 활약했다. 1992년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해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 2008년 서태지와 심은경이 등장한 통신사 광고 등이다. 2015년에는 드라마 <킬 미 힐 미>에서 두 주인공이 이별 여행을 떠나 어린 시절을 곱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에 나왔다. 그토록 중요한 장면을 왜 여기서 촬영했는지 알 것 같다. 어여쁜 건물과 고즈넉한 풍경. 세월을 머금은 역에는 만남과 헤어짐, 성공과 실패, 떠남과 귀환의 정서가 고여 있다. 이런 곳에서는 생각을 하게 되고, 상대방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며,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진다.
승강장의 나무 이정표도 역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한쪽은 아우라지, 한쪽은 정선, 가운데에 가장 큰 글씨로 나전. 내다볼 것도, 돌이켜볼 것도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역이면 충분하다. 도시 사람이 ‘나전’이라는 역명을 모를지라도 여기서만은 나전역이 주인공이다.역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에 스크린이 펼쳐진다. 승강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광부가 되러 찾아온 수많은 청춘의 눈이 별처럼 가로등처럼 빛났을 테고, 대합실은 등교 시각에 맞춰 기차를 기다리면서 수다 떨고 장난치는 학생의 싱그러움이 넘쳤을 것이다. 때마다 기적 소리가 고요한 마을을 깨우고, 사람들은 그 소리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놀라기도 했으리라. 어제의 애틋한 공간이 오늘 설레는 여행지로, 주민의 모임 장소로 여전히 살아 있어 고맙다.
백두대간 함백산이 꼿꼿하고,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는 곳 고한. 주민이 힘을 합쳐 마을을 호텔로 꾸미자 여행객이 찾아왔다.
18번가의 기적 ‘마을호텔18번가’
탄광의 기쁨과 슬픔이 차례로 지나간 동네가 정선에는 여러 곳이다. 정선에서 마지막 문 닫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가 있는 고한읍은 그 변화의 파도를 가장 격렬하게 겪었다. 1985년 읍 승격 당시 3만 2000명에 달한 고한읍 인구는 현재 10분의 1가량으로 줄었다. 사람이 빠져나가자 동네에 생기도 사라졌다. 늘어 가는 건 빈집뿐이었다.이대로 두기 안타까워한 몇몇이 기운을 내서 뭉쳤다. 이 고장 고한은 백두대간 함백산이 꼿꼿하고, 사방의 산이 뿜어내는 공기가 맑으며, 밤에는 은하수가 강처럼 흐르는 곳이었다. 요즘 사람은 공기 좋고 몸과 마음 푹 쉴 수 있고 조용한 데로 여행을 간다 했다. 바로 고한이 그런 장소임을 깨달은 주민들이 힘을 합쳐 골목을 쓸고 쓰레기를 치우고 꽃을 심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어제 같던 고한18리는 하루하루가 달라졌다. 협동조합을 창립했고 마침내 ‘마을호텔’을 함께 기획했다. 여행을 떠나 호텔에서 휴식하며 부대시설을 즐기듯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을 이루자는 생각이었다.
폐업한 고깃집을 객실 세 개 규모의 호텔로 리모델링했다. 작가와 디자이너를 모셔 담을 화사하게 꾸미고, 함백산이 야생화로 유명하다는 사실에서 착안해 LED 플라워 공예를 익혀 골목과 건물을 구석구석 장식했다. 숙박만 한다고 호텔이 아니다. ‘마을호텔18번가’는 호텔 인근 마을회관, 카페, 세탁소, 음식점, 이발소, 사진관, 극장이 모두 부대시설이다. 고한 토박이 사장이 20년 가까이 조리해 온 중국집, 광부가 즐겨 먹던 연탄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고깃집 등 다양한 부대시설은 숙박 손님에게 10퍼센트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주민은 ‘호텔리어’ 로서 친절한 웃음과 재미난 이야깃거리로 손님을 맞는다. 차츰 마을이 SNS 화제로 떠오르더니 전국에서 마을호텔18번가의 시도를 배우러 오고, 정부 기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가만두었으면 그저 낡아 갔을 마을이 오늘을 사는 마을, 내일을 이끄는 마을이 되었다.
+ 마을호텔18번가 즐기기
주민이 만든 협동조합이 ‘마을호텔18번가’를 운영한다. 객실 세 개 규모의 호텔은 나 홀로 여행객부터 가족 단위까지 이용하도록 쾌적하고 깔끔하게 꾸몄다. 바로 옆 카페 ‘수작’에서 조식도 제공한다. 숙박객에게는 음식점, 세탁소, 사진관 등은 물론 정선을 대표하는 폐탄광 문화시설 삼탄아트마인과 하이원리조트 시설 이용 시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이곳의 성공에 힘입어 마을호텔 2호점 개장을 준비 중이다.
문의 www.hotel18.co.kr
여전히 아름다운 정선의 소리
바리스타가 치익 소리를 내며 커피를 추출한다. “여기 정말 예쁘다” 감탄하는 손님의 웃음소리와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섞인다. 한국의 마지막 비둘기호 기적 소리가 울린 정선 나전역은 지금도 기분 좋은 소리가 가득하다. 누구에게나 자리 내어 주며 같이 가자 하던 어제의 열차처럼 지금도 나전역과 정선에서는 마음 다독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민이 마음을 모아 역과 마을을 단장하고 손님을 맞으면서 만들어 내는 이 소리를 ‘다시 오늘,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명단에 올리고 싶다. 역 나무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내리고 타기 바쁜, 스쳐 지나가는 장소를 넘어 여행의 목적지가 되는 기차역을 가진 건 행운이라고. 사방의 산이 작은 역과 여행자를 안아 주는 듯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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