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촉감 장난감 전성시대

2026년 09월 01일

  • writer 이혜원(서울대학교 소비자학 박사,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

깨고 부수고 만지는 재미, 귀를 자극하고 손끝을 간질이는 감각이 시장을 바꾸고 있다.

© TOUSlesJOURS

퇴근 시간대에 문방구 앞을 서성이는 어른이 늘었다. 단정한 블라우스와 포멀한 재킷을 걸친 직장인이 ‘말랑이’와 ‘왁뿌볼’을 만지작거리다가 계산대로 가져간다. 서울 창신동 장난감 거리에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완구 도매상이 늘어선 골목에 20~30대 어른들이 몰려들면서 오래된 동네에 모처럼 활기가 넘친다.
주무르면 쫀득하게 늘어나고, 힘주어 누르면 와그작 부서지는 촉감 장난감이 인기다. 말랑이, 왁뿌볼, 슬랑이, 키캡, 클리커, 퍼티, 탄산 말랑이 등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촉감을 자극하는 물건이라는 점이다.
손끝은 원래 판단의 도구였다. 과일을 고를 때는 살짝 눌러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옷을 고를 때도 손끝으로 쓸어 재질을 확인한다. 악수하고 나서 손에 남은 감각은 상대에 대한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의 활동을 스마트폰으로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주식을 매수하고, 감명 깊게 읽은 글에 ‘좋아요’를 누를 때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이 모두 똑같다. 스마트폰이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나와 한 몸이 된 나머지 촉감을 느낄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촉감은 부교감신경계를 활성화하고 옥시토신 분비를 유도해 ‘내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온라인에서 메신저와 화상회의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들에게 촉감 장난감을 만지는 것은 그 자체로 휴식이 되는 셈이다.

감각이 평평해진 시대에 위안을 주는 물성
1958년 심리학자 해리 할로는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떼어 놓고 두 개의 인공 ‘엄마’를 만들어 주는 실험을 했다. 하나는 우유가 나오지만 차가운 쇠로 만든 ‘철사 엄마’, 다른 하나는 우유는 안 나오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헝겊 엄마’였다. 새끼 원숭이들은 배가 고플 때만 철사 엄마에게 갔고, 대부분의 시간은 헝겊 엄마에게 매달려 보냈다. 스킨십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심리적 결핍을 ‘스킨 헝거(skin hunger)’라 하는데, 새끼 원숭이들의 행동이 정확히 이 개념과 맞닿아 있다. 기능보다 촉감을, 정보보다 위안을 선택한 것이다.
촉감 장난감의 인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 역시 무언가 만지는 순간 감정이 달라진다. ‘단순 접촉 효과(mere touch effect)’는 물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이건 이미 내 것 같다’는 감정이 생긴다는 개념이다. 소유감은 구매 의사와 지불 용의 금액까지 끌어올린다. 만지는 순간, 이미 절반은 구매가 완료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통업계는 소비자의 이런 욕구를 만질 수 있는 공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문객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거친 벽면을 만지고 원재료를 직접 매만져야 미션이 완료되도록 팝업 스토어 동선을 설계하는 것이다. 보고 지나치는 전시가 아니라, 손으로 만져야 완결되는 경험을 판매한다.

© WITHSOME

촉감 장난감 연대기
촉감 장난감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슬라임, 스트레스볼, 피젯스피너 등이 10년 가까이 꾸준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행은 과거와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 촉감 장난감을 즐기는 연령대가 폭넓어졌다. 초등학생 전유물이던 장난감을 30대 직장인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수집한다. 촉각적 자극에 청각적 재미도 더해졌다. 눌렀을 때 ‘와그작’ 부서지는 소리가 결합되며 몰입도가 높아졌다. 촉감 장난감의 진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품목은 키캡이다. 스마트폰 터치스크린에 익숙해지면서 실물 키보드를 누를 일이 줄었는데, 바로 그 결핍이 역설적으로 키캡을 찾게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와 데스크테리어 문화가 자리 잡으며 키보드가 취향을 드러내는 소품이 된 것도 이 흐름에 힘을 보탰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매장 표지석 문구를 그대로 본뜬 ‘표지석 키캡’을 내놓아 화제가 됐고, 카페 브랜드 더벤티는 ‘슈퍼마리오 갤럭시’와 협업한 키캡을 선보였으며, 맘스터치는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과 협업한 LED 키캡 키링을 내놨다.
촉감 열풍은 다른 산업으로도 번지고 있다. 디저트업계에서는 왁뿌볼의 부서지는 식감을 본뜬 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던킨도너츠는 겉을 깨물면 와그작 부서지는 ‘아그작 도넛’을 선보였고, 연세우유는 하트 모양 초콜릿 코팅을 깨 먹는 ‘깨먹는 하트 생크림빵’을 내놨다. 동네 카페에서도 코팅을 깨 먹는 ‘왁뿌 소금빵’이 인기를 얻고 있다. 뷰티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말랑하게 눌리는 젤리팟, 푸딩처럼 뭉개지는 크림 등 촉감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품이 잇따라 출시됐다.

© the Venti

디지털로 확장된 촉각 욕구
촉감을 향한 갈증은 디지털 세계로도 확산됐다. 왁뿌볼 앱은 화면을 누르면 햅틱 진동이 실행되고 이미지가 늘어나는데, 저지연 사운드까지 재현하며 실물에 가까운 손맛을 내려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문구점으로 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촉각 욕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대상의 정보를 확인하려고 만져 보는 ‘도구적 촉각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만지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유희적 촉각 욕구’다. 이중 유희적 촉각 욕구가 높은 소비자일수록 온라인 쇼핑에서 제품을 만져 볼 수 없다는 것에 결핍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AR(증강 현실)이 이러한 점을 보완할 수 있을지 실험도 진행됐다. 결과는 의외였다. AR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진짜 촉각 정보를 갈망했다. 디지털 모사가 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부추긴 셈이다. 아무리 정교한 시뮬레이션도 실물의 무게와 온도, 손에 남는 느낌까지는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그럴듯해도 디지털은 철사 엄마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갈구하는 건 기능이 아니라, 손에 확실히 남는 물성 그 자체다.
이런 경향이 대기업 신제품 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촉감은 더 이상 부차적 요소가 아니다. 브랜드들은 이제 ‘어떻게 보일지’뿐 아니라 ‘어떻게 만져질지’까지 설계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다 문득 손이 심심해진다면, 다음 정차역 앞 오래된 문구점에 잠시 들러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