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그림도, 좌대 위의 조각도 없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미술사에서 지워졌던 여성 작가 11명의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 신발을 벗고, 눕고, 마음껏 거닐면 된다.

© Lea Lublin 사진: 홍철기. 리움미술관 제공

미술관이 가벼운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기분 좋게 출렁인다. 빨간 상자 안으로 들뜬 그림자들이 무성영화처럼 지나가고, 신발을 벗은 아이들이 매트리스에 누웠다가 무지갯빛 비닐 터널 속에서 술래잡기를 한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의 풍경이다. 리움미술관이라는 어쩌면 엄숙했던 공간에 깃든 반가운 무드와는 별개로, 이번 전시의 미술사적 의미는 좀 특별하다.
1949년 루치오 폰타나가 처음 선보인 설치 작업 ‘환경(Ambiente)’은 그림이나 조각을 바라보기만 했던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 빛, 소리, 색, 움직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이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설치미술은 바로 ‘환경’에서 비롯됐으며, 이 파격적인 장르를 주도적으로 개척한 건 여성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환경’이라는 용어가 ‘설치미술’로 대체되는 동안 그 이름들은 미술사에서 지워졌다. 이번 전시는 그 빈 공간을 복원한다.


© Tsuruko Yamazaki 사진: 홍철기. 리움미술관 제공
누락된 미술사, 되살아난 공간
이 전시는 2023년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시작된 순회전으로, 로마 국립 21세기 미술관(MAXXI)과 홍콩 M+를 거쳐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전시를 처음 기획한 안드레아 리소니 예술감독과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문화 박물관 관장의 말대로,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와 환경 예술의 역사 양쪽에서 잊히거나 지워지는 이중의 소외’를 겪었다. 환경 작업은 여성 작가들에게 해방의 공간이었지만 회화와 조각 중심으로 쓰인 남성 중심 미술사에서 가장 먼저 제외됐고, 전시 종료와 함께 해체되는 특성상 기록도 남지 않아 또 한 번 지워졌다. <다른 공간 안으로>전은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불행히도 사라졌던 존재들을 다시 미술관으로 불러들인다. 4년여에 걸쳐 진행한 복원 프로젝트는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미술사가, 보존 연구가, 유족이 협업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서신과 건축 도면, 당시의 기사 등을 모았고, 그렇게 11명의 공간이 오늘의 미술관 안에서 되살아났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건 야마자키 쓰루코의 작품 ‘빨강’이다. 지면에서 살짝 떠 있는 거대한 빨간 박스 안으로 몸을 낮춰 들어가면 붉은 우주에 침잠하는 듯 생경한 감각이 밀려온다. 밖으로 나가고 싶기도 하고 안에 머무르고 싶기도 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공간 속을 거니는 동안, 밖에서는 안에 들어간 관람자의 움직임을 그림자로 볼 수 있다. 1956년 일본 아시야 공원에서 열린 <구타이 미술전>에서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여성 작가가 만든 최초의 환경 작업으로 기록되며, 이번 전시의 시대적 기준점이 된다.
역사적인 빨간 박스를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서자 숨이 턱 막혀 온다. 한가운데 자리한 육중한 스테인리스 스틸 탑 주변으로 14개의 조명이 쏟아 내는 열기가 섭씨 45도까지 치솟고, 불쾌한 소리가 끊임없이 고막을 자극한다. 강한 열과 빛, 소리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겨우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왜 이런 것들을 여기에 뒀지? 미술관에 이런 걸 전시하는 게 맞아?’ 타니아 무로의 작품 ‘한때 우리는 알았다’가 의도한 낯설고 강렬한 불편함이다.


© Jung Kangja 사진: 홍철기. 리움미술관 제공
지워진 이름, 정강자
검은색 장막으로 가려진 공간 앞에 다다르자 이번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가 눈을 반짝인다. “재미난 점은 도시마다 콘셉트를 일부 변형하거나 확장할 수 있다는 거예요. 시기를 확장하거나 다양한 장르를 다룰 수도 있죠. 저희가 주목한 것은 한국 작가의 발굴이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한국 미술사에도 지워진 여성 작가들이 존재한다. 리움미술관이 찾아낸 이름은 정강자다. 1960~1970년대에 실험적 예술을 선보이며 기존 관념에 도전했던 그가 1970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전위적인 작품 ‘무체전(無体展/Incorporeal Exhibition)’이 56년 만에 마침내 재현됐다.
장막을 걷고 깜깜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드라이아이스가 천천히 발밑을 덮고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며 관람객의 얼굴에 광선이 비춰진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사방을 주시하고 있노라면 AI로 복원한 작가의 음성이 묵직하게 들려온다.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빛과 소리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암시했던 이 전위예술은 당시 정부에 의해 정치 선동으로 오인되어 강제 철거됐고, ‘무체전’은 그렇게 지워졌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무려 56년 전, 한국 여성 작가가 시도한 최초의 공감각적 환경을 미술관으로 옮겨 오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한 재구성이 필요했다. 당시 보도 기사는 물론, 유족이 제공한 사진과 기록, 작가의 생전 인터뷰 등을 모았다. 작가의 원래 의도를 살리되 관람객의 안전을 고려한 재료를 선택했고, 그렇게 ‘무체전’이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큐레이터는 리서치 과정에서 작가의 일기를 읽었다고 했다. “경찰에 여러 차례 잡혀 가고, 분신 같은 작품을 강제 철거당한 작가는 3년 후 한국을 아예 떠났습니다. 1980년대에 돌아오셨지만 그때부터는 자아를 탐구하는 회화에만 집중하셨어요. 이러한 내막을 알고 나니 사명감 같은 게 생겼어요. 못다 이룬 꿈을 이뤄 드리고 싶었달까요.” ‘무체전’ 안으로 들어간 관람객은 긴장감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1970년의 공간이자, 어쩌면 2026년의 공간이기도 한 그곳에서.

© Marta Minujín 사진: 홍철기. 리움미술관 제공

경계를 넘어 미술관에서 놀기
아르헨티나의 거장 마르타 미누힌이 손수 꿰매고 채색한 매트리스 조각으로 만든 ‘뒹굴고 살아라!’는 이미 어린이들에게 점령당했다. 어른들이 주저하는 사이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눕고 만지며 온몸으로 작품을 감각한다. 인간이 인생의 절반을 보내는 매트리스를 ‘사랑하고, 잠자고, 꿈꿀 수 있는 해방의 공간’으로 제시한 작가의 의도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추는 곳은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이다. 인스타그램에 수많은 인증 사진이 업로드되며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깃털이 따라와 있다” 같은 재밌는 리뷰들이 달리는 바로 그 작품이다. 무려 136킬로그램의 거위털로 채운 백색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 경계와 중력 감각이 흐릿해진다. 어릴 적 한 번쯤 상상해 본 공간 속에 있다는 벅찬 느낌은 관람객을 무장해제시킨다. 1966년에 선보인 이 작품이야말로 차갑고 딱딱한 강철 소재가 지배하던 미니멀리즘 시대에 던진, 가볍고 부드러운 역발상이자 완전한 전복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거대한 규모의 무지갯빛 놀이터,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가 펼쳐진다. 나일론 천과 네온 조명으로 만든 여섯 개의 통로를 지날 때마다 구스타브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이 한 악장씩 울려 퍼진다. 탄생과 죽음, 재탄생이라는 거창한 의도를 몰라도 좋다. 몸을 구부리고 코너를 돌며 색과 빛, 음악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동안 관객 스스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 옆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투명 터널, 레아 루블린의 ‘침투/배출(플루비오 섭튜날에서)’이 있다. 1970년 아르헨티나의 도시와 도시를 잇는 지하 터널 준공 기념식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는 환경 파괴에 저항해 인간의 생식 과정을 암시하는 거대한 공기 주입식 튜브 터널을 만들었다. 당시 작품을 의뢰한 공무원들이 그 풍자적 메시지를 알지 못했듯이(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늘의 어린이 관객들 역시 무거운 정치적 맥락을 뒤로하고 비좁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유쾌하게 술래잡기를 한다. 어떤 고정관념도 없이 기꺼이 예술에 침투했다가 배출당하는 그 폭발적 몸짓이야말로 어쩌면 작가가 원했던 가장 순수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은 마리안 자질라와 라 몬테 영, 그리고 한국 작가 최정희가 함께 만든 ‘리움 26I IV 29 서울 드림 하우스: 사운드와 빛의 환경’이 장식한다. 네온 간판이 설치된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을지로의 힙한 바에 온 듯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서면 컬러 필름으로 물든 창문과 움직임에 따라 겹쳐지는 모빌의 그림자, 공명하며 증폭되는 사운드가 관람객의 시청각을 완벽히 사로잡는다. 위치를 바꿀 때마다 달라지는 사운드와 그림자의 조응에 몰입하다 보면 창문 너머 한남동의 풍경조차 유럽의 낯선 마을처럼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예술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관람객들은 이 공간에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재밌는 건 유럽과 남미, 아시아를 막론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람객을 작품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안과 밖의 경계를 흐리게 하기. 지금처럼 정보와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이들의 관심사는 놀랍도록 같았다.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다 같이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무게감을 갖는 이유다.
“엄마, 미술관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여기 놀이터잖아!” 처음으로 전시장에 온 큐레이터 아들의 이 순수한 질문이야말로 이번 전시를 가장 완벽하게 요약한다. 미술관은 없어도 되지만 놀이터 없는 하루는 상상할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도, 미술관을 잊고 살았던 어른들에게도 이곳은 완벽한 해방의 공간이다. 시대를 앞서갔지만 지워졌던 여성 작가 11명의 기묘한 공간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활기찬 놀이터다.

가브리엘의 정원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 애니시 커푸어의 ‘큰 나무와 눈’ 등 거대한 조각들이 자리 잡았던 리움미술관 야외 정원이 새 옷을 입었다. 리움이 2004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선보이는 커미션 정원 프로젝트다. 멕시코 출신의 거장 가브리엘 오로스코는 대형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관람객이 거닐고 머무르며 온몸으로 경험하는 수평적 정원을 설계했다. 조경과 건축, 풍경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이 정원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원의 배열’ 모티브 위에 세워졌다. 여기에 혹독한 겨울을 견디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뜻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 개념을 더해 화려함 대신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았다. 백당나무, 설유화, 찔레나무, 물매화 등 흰 꽃 중심의 식물이 차분한 색채를 이루고,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나무 숲은 명상과 휴식의 시간을 선사한다. 정원은 미술관 운영 시간 동안 누구에게나 무료로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