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밖은 온통 초록이다. 기차가 승객을 싣고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이름 모를 풀과 꽃이 차창을 두드린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린 지 두 시간이 채 안 되었을 즈음, 광활한 평야가 창밖을 가득 채운다. 물을 댄 논에 줄 맞추어 심은 모가 눈앞을 푸르게 물들인다.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다는 것은 목적지인 전북 전주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천천히 풍요의 땅에 발 디딜 채비를 한다.
숲과 시를 품은 도서관
어딜 가도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 전주를 떠올릴 때면 늘 정겨운 감정이 들었다. 이 도시가 가진 고유한 이미지가 이번 여정을 이끄는 데 한몫했다. 해의 절반을 넘기니 묵은 피로로 휴식이 절실했고, 안온한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이 필요했다. 마침 전주가 도서관으로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는 소식이 들렸다. 전주시는 2021년부터 도시 곳곳에 놓인 도서관 아홉 곳과 문화 시설 네 곳을 방문하는 ‘전주 도서관 여행’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각 도서관은 저마다 여행, 예술, 시, 헌책 등을 주제로 공간을 꾸며 여행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여행과 책, 그리고 도서관.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할 곳으로 전주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기엔 세 단어로도 충분했다.
먼저 발길을 이끈 곳은 학산 중턱에 지은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이다. 숲이라는 단어는 물론, 도서관에 시집만을 비치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걸음을 재촉한다. 전주역에서 차로 30분 정도 이동해 학산 언덕을 오르자 아담한 맏내제와 나무로 지어 올린 하얀 건물이 보인다. 숲속에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한데, 바로 앞에 연못을 둔 광경이라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로 들어온 듯해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숲속에 도서관이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한데, 바로 앞에 연못을 둔 광경이라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로 들어온 듯해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문을 열자마자 목재와 종이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입구에 서서 내부 전체를 눈으로 훑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공간이지만 군데군데 큰 창을 두어 탁 트인 느낌이 강하다. 나무를 주재료로 건축해 포근한 분위기도 흐른다. 책은 고르다·다르다·반하다·만나다·선하다 총 다섯 개 주제로 정리했다. 주제별로 시집을 분류한 ‘고르다’ 코너, 세계 각국의 시집 원서를 아우르는 ‘다르다’ 서가, 시화집을 모아 비치한 ‘선하다’ 등이다. 원목 탁자에는 방문자가 자유롭게 시를 필사하도록 종이와 필기구를 두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를 선택하면 그에 맞는 시나 소설을 프린트해 주는 도서관 인기 스타, 시 자판기도 창 앞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여느 도서관처럼 시인 초청 강연이나 각종 문학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한다. 푸릇한 자연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도서관에 방문하려 먼 곳에서 여행하듯 오는 이들의 심정을 알겠다.
학산숲속시집도서관 박금주 사서를 따라 계단을 오른다. “학산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나무를 베지 않고 건물을 지었어요. 내부가 계단식인 점도 산 지형을 고려해서예요. 방문자가 오래 머무르는 공간은 위층 다락이랍니다.” 몸을 낮춰 방바닥에 앉자 통창으로 맏내제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창문 근처에 자리를 잡은 뒤 몸의 긴장을 풀고 시집을 펼친다. 이따금 들리는 새 지저귀는 소리, 매미 소리를 음악 삼아 시집 속 단어를 하나하나 주워 담는다. 문장을 되새기고 음미하는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아, 이래서 도서관을,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서학예술마을의 사랑방
이번에는 전주의 심장 부근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옥마을 곁을 지나는 전주천을 건너면 아기자기한 서학예술마을에 닿는다. 쇠락해 가던 서학동에 예술가 부부가 작업실을 마련한 것을 계기로 화가, 사진작가, 도예가, 음악가 등 예술가가 모여들었고, 시간이 흘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관이나 의상실, 방앗간 같은 정겨운 가게와 다양한 작업실이 공존하는 데다 벽이나 길모퉁이 등 마을 곳곳에 그들의 작품을 놓아 서학동만의 독특한 정취가 흐른다.
전주 예술가들의 둥지나 다름없는 서학동의 사랑방은 마을 초입에 세운 도서관이다. 오래전 작은 의원으로 쓰던 건물과 의사가 살던 주택을 전주시와 마을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리모델링한 끝에 2022년 서학예술마을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마을 주민과 여행자는 본관 역할을 하는 팽나무동, 전시관을 겸하는 담쟁이동, 2023년 새로 지어 강연·공연을 진행하는 복합 공간 은행나무동을 오가며 예술과 친밀해진다.
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미술, 사진, 음악, 연극을 다룬 책이 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학문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책뿐 아니라 이미지 위주의 아트 북과 포토 북, 그림책, LP, CD 등 감각을 깨우는 자료가 숱하다. 서학동 예술가가 발행했거나 마을 이야기를 엮은 책을 골라 둔 ‘깃들다’ 서가처럼 서학예술마을도서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로컬 큐레이션도 반갑다. 바로 옆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아이가 들어와 그림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안경을 낀 채 서가를 서성이는 광경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곳. 그들처럼 예술 세계에 녹아들고자 책 하나를 골라 푹신한 빈백에 몸을 기댄다.
책에 파묻혀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발걸음 가볍게 기차역으로 향한다. 마음에 들러붙은 시름을 닦아 내고 싶을 때면 전주가 불쑥 떠오를 듯하다. 도시가 지닌 낭만과 풍경, 도서관에서 마주한 문장들을 꺼내 음미하고 되새기게 되리라는 예감. 여운을 안고 열차에 탑승한다. 너른 평야가 등 뒤로 멀어지고 있다.
마음에 들러붙은 시름을 닦아 내고 싶을 때면 전주가 불쑥 떠오를 듯하다. 도시가 지닌 낭만과 풍경, 도서관에서 마주한 문장들을 꺼내 음미하고 되새기게 되리라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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