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금호동에는 공중목욕탕과 교회로 사용하던 낡은 건물이 있다. 판이한 두 업종이 시간차를 두고 한 건물을 점유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데, 심지어는 브랜드 팝업 스토어와 실험적인 설치미술 전시를 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또 한 번 모습을 바꿨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독보적인 공간감으로 화제를 모아 온 ‘금호 알베르’ 이야기다. 이듬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난방을 공급하던 전력소도 ‘파워플랜트’란 이름의 전시 공간이 되어 주목받았다. 지난여름엔 이곳에서 미디어아트 레이블 ‘버스데이’와 뮤지션 오혁의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폐건물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니지만, 최근 이러한 사례가 지역 곳곳에서 빈번한 것은 분명 짚어볼 만한 현상이다.
지역 재생 공간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폐모텔. 강원도 속초 설악동, 과거 ‘하늘정원’이란 이름으로 영업하던 숙박 시설이 10여 년째 방치되어 있었다. 아티스트이자 미술학 박사 이호영 대표는 이 건물에 자연(nature), 예술(art), 사람(human)의 영문 이니셜을 따 대안공간 NAH 설악이라 이름 붙이고는 동료 작가들을 불러 모아 인상적인 현대미술 프로젝트를 펼치는 중이다. 찢긴 벽지 위에 액자를 걸고, 버려진 매트리스에 새빨간 의자를 비치하고, 솜이 비어져 나온 베개를 얼굴 삼아 표정을 그려 넣고, 낡은 변기에 조명을 비춰 뒤샹의 ‘샘’을 환기하는 초현실적 풍경. 개관전 <재탄생-설악의 봄>부터 2월 20일까지 진행하는 <설악국제미술제>에 이르는 이곳의 전시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건 폐모텔 부산물에서 비롯한 설치 작품을 통해 자연, 예술, 사람의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다음은 대전역 인근, 쌀 시장이 자리하던 동구 인동의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 건물을 살필 차례다. 일제의 수탈 기관이라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서 지난가을부터 1월까지 독일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안젤름 키퍼의 전시가 열렸는데, 작품 상당수가 신작이라는 사실에 이목이 쏠렸다. CNCITY 마음에너지재단은 이 건물이 올라선 지 꼭 100년이 되는 2022년부터 약 2년 동안 보수 작업을 거쳐 동시대 미술과 클래식 음악이 공존하는 복합 문화 공간 헤레디움을 완성했다. 유려한 석조 장식이 돋보이는 파사드와 고풍스러운 목재 창문, 섬세한 외벽 타일과 천장 마감 등을 고증하고 복원해 역사적 의의와 지역 재생이라는 가치를 충실히 살렸다. 2월 16일부터 3월 17일까지 개최하는 새 전시 <헤레디움 시리즈: 현대미술 특별전>과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마련하는 1세대 피아노 거장의 무대 <레전더리 피아니스트 & 마스터클래스>에서 이 공간에 깃든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세종에는 2023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조치원 1927 아트센터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사 공장, 6·25전쟁 당시 조치원여고 임시 학사, 1960년대부터 2003년까지 한림제지 공장으로 쓰던 폐건물이 다채로운 예술 경험을 누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면적 1467제곱미터, 2층 규모의 널찍한 건물은 공연, 워크숍, 포럼, 전시, 벼룩시장 등 온갖 분야의 행사를 근사하게 소화한다. 낡은 저수조와 굴뚝, 빛바랜 나무 계단, 공장 직원들이 기숙사로 쓰던 다다미방 등 건물의 내력을 짐작하게 하는 역사적 자취가 남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경북 청송의 대전초등학교 폐교에 들어선 ‘남관미디어아트홀’, 경기도 평택의 버섯 재배 단지를 개조한 ‘공간미학’, 옛 대전지방보훈청에서 장애인 미술가를 독려하는 전시 공간으로 거듭난 ‘에이블아트갤러리’까지. 어쩌면 등잔 밑이 어두워 미처 알지 못한 우리 주변의 예술 공간이 발견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지 모른다.
주목해야 할 지역 재생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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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 NAH 설악
설악동의 폐모텔이 자연, 예술, 인간의 관계를 고민하는 현대미술 공간으로 거듭났다.
주소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로836번길 15 -
헤레디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이 동시대 예술의 미감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부활했다.
주소 대전시 동구 대전로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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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 1927
아트센터 한림제지 공장으로 쓰던 폐건물이 공연, 전시, 각종 문화 행사를 아우르는 지역 예술 구심점으로 진화했다.
주소 세종시 조치원읍 새내4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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