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선 Seohae Line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 또는 이동을 의미하는 단어 ‘트래블(travel)’은 고생, 고역을 뜻하는 ‘트래베일(travail)’에서 유래했다. 그렇다면 이동과 고생을 전제하는 출퇴근길은, 여행일까? 여기엔 여행의 본질인 ‘탈일상적 감각‘이 부재한다. 물론 반복되는 ‘집-회사-집’ 패턴에서 몇 가지 변수만 조작해 일상을 여행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여느 때처럼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아침, 별안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출근길에 맞닥뜨린 서해선 환승 통로 때문이다. 서해선. 서쪽 바다의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이름에서 묘한 해방감이, 쾌감이 느껴진다. 퇴근하는 길엔 연두색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열차에 올라 멀리, 더 멀리까지 가 볼 작정이었다.
소박한 상상을 현실로 앞당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휴가계를 낸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무실 근방인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 경의중앙선을 타고 서해선 환승역인 고양 능곡역에 내린다. 환승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다. 역무실에서 서해선 2단계 개통 기념 카드를 구매하는 것이다. 2018년 6월 소사-원시 구간이 개통한 데 이어 2023년 7월 대곡-소사 구간 개통을 축하하는 교통카드이자 ‘철도 굿즈’ 말이다. 이제 카드를 손에 쥐고 개표구를 통과해 승강장에 설 차례다. 노선을 죽 훑어보다가 유독 낯선 이름을 가진 두 역을 발견한다. 경기 부천 원종역과 시흥 신현역이다.
서해선 타고 떠나요
서해선은 경기 고양 일산역부터 충남 홍성 홍성역까지 잇는 간선철도, 광역철도 노선이다. 2018년 6월과 2023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고양 대곡역부터 안산 원시역에 이르는 수도권 전철 구간이 개통했으며 8월 말에는 대곡역에서 서해선 시발∙종착역인 일산역까지, 2024년 6월에는 원시역에서 홍성역까지 이어진다. 서해선을 따라 더 풍성한 여행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
수주문학관
문학 도시 부천의 재발견
나무 수(樹), 고을 주(州). 경기도 부천의 옛 이름은 수주다. 계양산 북쪽 수소리라는 마을이 밀림처럼 울창해서 그리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읊었을 시 ‘논개’를 쓴 문인 변영로의 호 또한 수주다. 1898년 당시 한성(서울)에서 탄생한 그의 원적지가 바로 부천 고강동이라서다. 그는 선친의 땅을 아호로 삼았을 만큼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애착이 큰 인물이었다.
서해선 원종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주문학관이 있다. 부천시는 수주 변영로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7월 고강선사유적공원 안에 수주문학관과 수주도서관을 세워 올렸다. 여기엔 고강선사유적체험관과 고강시민학습원도 함께 자리해 어엿한 복합 문화 공간을 이룬다. 건물은 크게 도서관동과 문학관동으로 나뉜다.
수주문학관은 수주의 문학적 생애는 물론이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간 변영로의 삶을 두루 반추한다. ‘천재의 고향, 펜을 들다’ ‘민족의 울분, 기록하다’ ‘지조의 문인, 마음을 울리다’ ‘수주의 흔적, 정신을 이어받다’로 이어지는 전시실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한 예술가의 ‘인생 극장’을 관람한 기분이 든다.
내밀한 즐거움도 있었다. 수주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놀이다. 공통점 하나, 편집자로 일했다는 것. 동아일보에서 발행하던 잡지 <신가정>의 편집자로 근무하던 시절, 그는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기념사진을 다리만 확대해 ‘조선의 건각, 세계를 제압한 다리’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일장기를 단 상반신을 의도적으로 자른 게 아니냐는 일제의 협박을 받았으나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넘겼다고 한다. 공통점 둘, 애주가라는 것. 수주는 자신의 음주 역정을 기록한 수필집 <명정 40년>을 펴냈다. 책에는 그가 종로 일대의 다방 다섯 곳을 전전하면서 위스키를 한 잔씩 들이켜고 글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렴, 텍스트와 알코올만큼 정다운 벗도 없을 것이다.
문학관을 나서는 길엔 수주의 시를 필사하도록 엽서와 펜, 색연필을 올려 둔 책상이 놓였다. 그곳에 잠시 걸터앉아 수주의 시 ‘서 대신에’를 손으로 눌러 써 보았다.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 찾을까/ ··· (중략) ··· /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느낌표에 아로새긴 시인의 슬픔을 오늘의 우리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 한복판, 문득 가슴이 시렸다.
수주문학관, 수주도서관
가는 법 서해선 원종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수주문학관에 닿는다. 2번 출구에서 8번, 23번, 50-1번, 70-2번, 75번 버스를 타고 세 정류장을 이동해 수주도서관에 하차하면 약 10분이 소요된다.
주소 경기도 부천시 고리울로8번길 77 문의 032-625-4330
관곡지
연꽃 향기 그윽한 시흥의 역사
수국, 능소화, 백일홍도 좋지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여름 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연꽃이다. 수면에 홀연히 피어난 연꽃을 마주하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마음이 고요해지고 어수선하던 머릿속도 단숨에 맑아진다.
생김새도 아름다움도 얼핏 비슷비슷해 보이는 연꽃이건만 종류는 수없이 많다.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은 중추원부사를 지내던 시절 진헌부사로 명나라 난징에 갔다가 전당홍이라는 품종의 연꽃씨를 들여와 연못에 심어 길렀다. 연못 이름은 관곡지. 오늘날 경기 시흥시와 강희맹의 사위 가문인 안동 권씨 문중에서 보존해 온 향토 유적이다.
시흥시는 관곡지의 역사와 가치를 더 많은 이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주변 18만 제곱미터(약 5만 5000평) 부지에 드넓은 연꽃테마파크를 조성하고, 늦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는 여러 종류의 연꽃을 식재했다. 서해선 신현역과 시흥시청역 사이에 펼쳐진 연성동은 바로 이곳 관곡지 연꽃에서 이름을 땄다. 신현역에서 보통천을 따라 동쪽으로 죽 내려가니 연성동의 근원인 관곡지와 연꽃테마파크에 다다른다. 가로 23미터, 세로 18.5미터의 작은 못 관곡지가 넓디넓은 공원의 관문이다. 잘 닦인 돌담길을 따라 거닐다가 어느새 사람 키만 한 연꽃 군락에 둘러싸인다. 이곳의 연꽃은 자태가 늘씬한 데다 꽃잎 끝부분이 옅은 분홍색을 띠어 시선을 홀린다.
꽃과 키 재기를 하느라 한창 정신이 팔렸다가 꽥꽥, 하고 노래하는 오리 앞에서 기분이 유쾌해진다. 공원에는 연꽃만 살지 않는다. 연꽃은 물양귀비와 파피루스 같은 수생식물에도 곁을 내어 준다. 물속에선 개구리∙우렁이∙미꾸라지∙붕어가 헤엄치고, 물 밖에선 저어새∙백로∙왜가리가 날갯짓을 한다.
포르르 날아오른 물닭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느라 오랜만에 고개를 든다. 잔뜩 꾸물거리던 하늘이 점차 맑아지더니 이내 노랗게,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시침이 6을 가리키는 때. 사무실에 있었다면 못다 한 일을 덮어 두고 부랴부랴 퇴근길에 올랐을 즈음이다. 탈일상의 시간은 왜 그리 바삐 흐르는 걸까. 한참을 돌고 돈 퇴근길이 짧게만 느껴진다.
관곡지, 연꽃테마파크
가는 법 서해선 신현역 1번 출구 쪽 버스 정류장에서 31-3번, 61번, 63번, 530번 버스를 타고 동아아파트에서 하차하면 약 5분이 걸린다. 여기서 관곡공원 방향으로 걷다가 관곡지로에 접어들어 5분 정도 올라간다.
주소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208 문의 031-310-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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