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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평안을, 함안

넓은 분지에 자리한 마음 넉넉한 고장 경남 함안으로 떠났다. 자연이 무르익은 공원을 걷고, 저수지 위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UpdatedOn June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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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엔 먼지 한 톨 없었다. 그토록 청명한 날 오전, 함안역에 닿았다. 물 대기가 한창인 여름의 논은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한 듯 투명하게 반짝인다. 시선이 우뚝 솟은 산등성이에 머문다. 이 고장에서 가장 높은 여항산이다. 그러고 보니 여항산이 마치 병풍처럼 평평한 대지를 감싸고 있다. 남고북저의 비옥한 땅에 온 것이 실감 났다. 분지의 너그러운 분위기가 지명에서도 드러난다. 모두 다 편안하다 해서 함안(咸安)이다. 이름처럼 더도 덜도 없이 충만한 여정을 기대하며 입곡군립공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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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ITX-새마을을 타고 함안역까지 5시간 정도 걸린다.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서울역에서 ITX-새마을을 타고 함안역까지 5시간 정도 걸린다.

해방감과 휴식을 함께, 입곡군립공원

공원 초입의 알록달록한 무지개 다리에 이르니 한눈에 담지 못할 만큼 광활한 저수지가 펼쳐진다. 입곡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협곡을 가로막아 조성했으나, 세월이 지나며 일대는 생태의 보고로 거듭났다. 담뿍한 물을 원천으로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생하기 시작했다. 수달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으며, 기러기도 날아왔다. 둔치에는 철마다 꽃이 만개한다.

입곡군립공원은 입곡저수지를 중심에 두고 자연이 빚어낸 풍광을 최대한 보존한 공원이다. 인위적인 개발과 훼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만 물기슭을 둘러싼 울울창창한 나무숲에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길을 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경치와 산책로 덕분에 누구나 찾는 휴식처가 됐다. 비록 역사적으로 순탄치 않은 시절에 탄생했으나, 지금은 밭 기갈 해소 용도를 뛰어넘어 쉼을 찾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갈한다.

호젓한 산책 명소로 이름났던 이곳이 몇 해 전부터 달라지고 있다. 물 위를 내달릴 수 있는 각종 레저 기구가 생겨나 짜릿한 해방감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 속속 방문하면서다. 색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에 동참해 보기로 했다.

평상시에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분명 여행의 묘미다, 라고 몇 번을 되뇌며 계단을 올랐다. 발아래 수면이 아찔해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저수지 상공 13미터가량 줄에 매달린 바이크로 향한다. 하나, 둘, 셋. 구호에 맞춰 외줄 타기를 시작한다. 스르륵 출발한 바이크가 덜컹 흔들린다. 이내 활강하자 절로 비명이 새어 나온다. 질끈 감은 눈을 뜨니 완두콩 빛깔을 닮은 어여쁜 물비늘이 사방에 어른거린다. 서늘한 산들바람이 땀을 식히고 긴장감도 사라진다. 닿을 듯 가까운 부표에 앉은 학을 굽어보고, 아래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손도 흔든다. 물 위를 달음박질하는 신선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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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새미로공원은 입곡군립공원 옆에 자리한다. 놀이터, 잔디밭뿐 아니라 지난 5월 공원 내에 개장한 오토캠핑장이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이 찾기 좋다. 문의 055-580-3423

한껏 쾌활해진 기분으로 트레킹에 나선다. 저수지 위를 시원스레 가로지르는 112미터 길이의 출렁다리를 씩씩하게 건넌다. 멀리 동동 떠 있는 무빙 보트가 앙증맞다. 정자에 올라 윤슬 가득한 풍경을 두 눈 가득 담고 다시 걷는다. 바쁜 일상이라면 행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테지만, 휴식하러 왔기에 산책로 덱 위로 불쑥 비어져 나온 향나무 가지도 어루만질 여유가 있다.

그저 솔숲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걸어 보니 식생이 다양하다. 식물도감의 한 페이지에 들어온 것 같다. 편백나무는 향기롭고, 층층나무의 이파리는 윤기가 돈다. 뽕나무와 수피나무 사이 길로 나타난 다람쥐가 여정을 함께 한다. 암석 사이사이 비집고 자라난 꽃을 대견해하는 찰나 다람쥐가 열매를 물고 사라졌다. 입곡단풍길에 접어들었다. 한여름엔 초록빛 단풍나무가 만든 터널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지만, 가을에는 울긋불긋 물들어 황홀경을 이룰 것이다.

풍경을 곱씹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장은 입곡군립공원과 가까운 온새미로공원에서 풀기로 한다.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텐트 안에서 께느른한 몸을 누이고 피로를 날린다. 건너편 놀이터와 잔디밭에서는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고 어른들은 자연 속에서 쉰다. 모두에게 단란한 휴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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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동 유적지는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자리한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이 만개한 마을을 산책할 수 있다. 문의 055-580-2551

고려동 유적지는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자리한다.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이 만개한 마을을 산책할 수 있다. 문의 055-580-2551

배롱나무가 감싼 고려동 유적지

온새미로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적지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고려동 유적지로 명명하지만, 마을 어른들은 여전히 담안마을이라 부르는 곳이다. 말 그대로 담장 안에 있어 예부터 그리 말했고, 한자로 장내(牆內)라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이 동네가 특별한 사연을 품어서, 또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 와서 그렇다. 이야기는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지러운 시기였다. 고려가 막을 내리고,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사대부들은 뜻을 정해야 했다. 조선 사람이 되거나, 사라진 왕조를 따르거나. 성균관 진사였던 모은 이오 선생은 고려 사람으로 남기를 택했다. 권옥경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당시를 그려 본다. “이오 선생의 집안엔 6형제가 있었어요. 형님이 정도전 탄핵 상소를 올려 유배를 갔고,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로 신진 세력에 밉보여 집안이 풍비박산했고, 이오 선생은 함안에 은둔하게 됐지요. 띠, 풀숲에 숨은 사람을 뜻하는 호 ‘모은’에는 개울이 흐르는 이 마을에 숨어들었던 상황이 담겼습니다.”

자미화의 수려함은 그 옛날에도 같았나 보다.
매년 여름 꼬박 100일을 피고 지길 반복했다 하니,
올해의 절경도 아름다우리라.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비석 ‘고려동학’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모은은 담장을 쌓고 안분지족의 삶을 행했다. 담 밖은 조선이기에 두문불출하고 평생 벼슬도 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백성이니 묘비에 글자도 새기지 말라 유언했다. 후손들은 실제 비에 이름을 쓰지 않았고, 뜻을 이어 고려동을 가꾸었다.

걸음을 옮겨 자미고원으로 향한다. “자미는 배롱나무입니다. 고려 말이나 지금이나, 이 자리에는 배롱나무가 있었다 해요. 비록 엄마 나무는 죽고 없어졌지만, 그 곁가지의 새끼들이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답니다. 꽃이 피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대를 이어 가는 모습이 고려동을 계승해 온 이곳 사람들과 똑 닮아서다. 권옥경 해설사의 말처럼 자미화의 수려함은 그 시절에도 같았나 보다. 밀양에 살던 모은이 함안을 은거지로 삼은 배경도 이곳 자미화에 반해서였다 한다. 매년 여름 꼬박 100일을 피고 지길 반복했다 하니, 올해의 절경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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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싼 담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지만,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숨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문의 055-580-2584

마을을 둘러싼 담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지만,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숨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문의 055-580-2584

종택에 들어섰다. 모은이 함안에 정착할 때 지은 건물터다. 6・25전쟁으로 소실돼 복원했으나, 기둥 밑 주춧돌은 600년 넘게 그대로다. 망국의 유민으로 살겠노라 다짐하고 스스로를 가둔 옛 선비에 대한 생각을 되작거리면서 마루에 걸터앉는다. 뒷문을 열면 산이 보이는데, 모은보다 일찍 죽은 손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선생은 이 자리에 앉아 손자를 생각했을 것이다. 산에 깃든 사연이 애달프다.

시선을 위로 옮기니 바구니를 얹은 시렁이 정답다. 맞은편 사랑채를 둘러싼 분홍색 꽃은 아기자기하게 돋았다.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해 전복이 나왔다 전하는 종택 옆 우물은 지금도 마르지 않고 물이 솟는다. 고려 사람으로 살았기에 담장 안에서 작물을 심고 거두어 먹어야 했던 이들은 자급자족의 흔적을 집 안에 남겨 두었다. 일명 고려전이다. 제법 너른 밭은 아직도 먹거리를 길러낼 만큼 충분히 기름지다. 여름작물이 촘촘한 가운데 대 높은 옥수수가 눈에 띈다.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라고 해요. 이 오래된 밭이 어찌나 잘되는지 여기서 나는 고구마 맛이 기가 막힙니다.” 비윤한 고려전에서 여름을 지나 결실을 거둘 달콤한 가을작물의 맛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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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정취, 여름날의 함안

담장 안을 찬찬히 살핀다. 아담한 연못이 작지만 어여쁘다. 푸릇푸릇 낀 이끼도 그림 같다. 소금쟁이가 떠다니고 개구리도 시원스러운 목청을 뽐낸다. 연못 가운데는 사람 얼굴 모양을 본뜬 석상이 자리하는데, 향로봉이라 쓰여 있다. 여름이면 석상 위 평평한 곳에 향을 피워 벌레를 쫓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못을 따라 걷고, 시를 읊는 이도 있었다. 옛 시골 정취가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이제 담을 빠져나와 자박자박 둘레를 걷는다. 걸음걸음이 상쾌하다. 하얗게 꽃을 피운 밤나무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미풍에 일렁이는 대나무 숲으로 시선을 옮기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입곡군립공원과 온새미로공원에서 자연으로 기력을 채우고, 고려동 유적지에서는 역사 속을 거닐었다. 시름을 잊고 몸과 마음이 편안한 하루였다. 함안에 가니, 평안이 왔다.

함안에서 여기도 가 보세요

ⓒ 함안군청

ⓒ 함안군청

ⓒ 함안군청

연꽃테마파크

늪지대를 둘러싼 자연 친화적인 테마 공원으로, 고려 시대의 연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009년 5월 함안 성산산성에서 씨앗이 출토된다. 연대를 추정해 보니 700년 전 고려 시대의 연꽃 씨앗으로 밝혀진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7월 연꽃이 700년 만에 발화하는데, 옛 함안에 있던 왕국 아라가야의 이름을 따 ‘아라연꽃’이라 명명했다. 당대 탱화의 연꽃 형태와 색깔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라홍련을 실제로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법수홍련·백련·수련·가시연뿐 아니라, 몇 해 전 50여 종의 연을 식재해 종류가 한결 풍성해졌다. 연꽃 개화 시기는 7~8월이며, 오전 6시부터 11시 사이에 가장 아름답다.
문의 055-580-3434

말이산 고분군

함안 일대를 지배했던 아라가야의 문화를 간직한 유적지다. 말이산은 ‘머리 산’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즉 우두머리의 산 내지는 왕의 산을 의미한다. 아라가야 왕들의 마지막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79만여 제곱미터의 구릉에 펼쳐진 말이산 고분군은 대형 봉토분이 압도적이다. 고분군에서는 불꽃무늬 토기를 비롯해 말이산 45호분 출토 상형 도기와 봉황 장식 금동관, 75호분 출토 연꽃 문양 청자 그릇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돼 아라가야 역사 복원의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말이산 고분군은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역사성과 빼어난 경관을 인정받아 오는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문의 055-580-2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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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옥송이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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