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해서 건물을 짓는다. 용도에 맞춰 구획하고 꾸민 뒤 사람이 이용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연이 쌓인다. 충분한 시간 동안 이용자가 드나든 건물은 다른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 유일한 곳이 된다. 서울 용산역사박물관이 꼭 그렇다. 철도를 중심에 두고 발달한 용산에서 철도 노동자를 대상으로 세운 병원은 아픈 이와 치료하는 이를 한 세기 동안 품었고, 이제 그 이야기와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담아내어 박물관으로 손님을 맞는다.
옛 출입구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한강철교 위로 열차가 달리고 강에는 배가 떠다니는 풍경을 담았다.
철도병원으로서 가장 기념할 만한 한순간이다.
100년의 시간을 간직한 공간
이 자리에 병원이 들어선 시기는 1907년이다. 한강철교가 한강 남북을 잇고 경부선과 경의선이 속속 개통한 시절은 하루하루가 천지개벽의 연속이라 해도 틀리지 않았다. 일제는 한강과 도심에서 모두 가까운 용산을 군사기지와 철도 용지로 점찍었다. 변화를 계획하는 건 사람 머리지만 변화를 현실화하는 건 사람 손발이다. 일제는 조선의 물자를 수탈할 뿐 아니라 사람마저 헐값에 데려다 마구 부렸다.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 수많은 노동자가 철도 현장에 불려 왔고 사고가 빈발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 1906년 경의선 개통과 용산역 재건축. 통감부 철도국이 주도해 1907년 용산역 근처에 병원을 열었다는 사실에서 긴박함이 느껴진다. 1918년 화재로 이 병원이 전소하자 1928년 지상 2층, 연면적 2275제곱미터(약 688평) 규모로 다시 지었고, 그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용산역사박물관은 병원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하도록 애썼다. 입구 로비를 지나 길게 이어지는 복도, 계단은 물론 기둥과 진료실 문도 살뜰히 보존했다. 무엇보다 옛 출입구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일품이다. 한강철교 위로 열차가 달리고 한강에는 배가 떠다니며 강변은 꽃과 나무가 흐드러졌다. 철도병원으로서 가장 기념할 만한 풍경을 담은 작품이고, 20세기 초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순간이다. 솟을대문이 연상되는 당당한 너비는 환자를 들것에 옮겨 왔기 때문이겠다.
탄생 배경은 필요와 아픔이었을지언정 건물 자체는 견고하고 아름답다. 붉은 벽돌 외벽이나 복도 기둥의 우아한 아치, 계단 난간과 창문 등 눈여겨볼 거리가 많다. 수술실인 외과처치실은 타일 붙인 벽을 그대로 두어 과거 분위기를 전한다. 일반 진료도 했지만 병원 특성상 외상 환자가 다수였기에 출입문 근처에 수술실을 배치하고, 바닥은 물이 잘 빠지게 배수로를 냈다. 수술실 한쪽은 영상실로 만들었다. 환자가 두려움 속에 희망 한 줌 쥔 채 바라보았을 벽이 스크린이 되어 옛 병원 모습과 박물관 개조 과정을 비춘다. 박물관이 아득한 역사와 인간의 삶을 배우고 반추하게 하는 곳이라면 병원 출신의 이 박물관은 정말 적절한 공간에 자리 잡았다.
강변 마을에서 철도 중심지, 군사기지로
복도를 따라 늘어선 진료실은 칸칸이 전시실로 바뀌어 조선 시대 강변 마을에서 20세기 군사기지와 철도 중심지로 변모해 온 용산의 역사를 말한다. 그 옛날 용산 일대 한강은 선비들이 별서나 정자를 짓고 서화를 남기는 명승으로 유명했다. 안평대군이 서적 1만 권을 들이고 객을 즐겨 초대했다는 담담정을 그린 ‘담담장락도’, 마을과 주민의 생활상을 표현한 ‘동호서호도’ 등 여러 작품에서 용산의 풍정을 만난다.
한강은 풍류의 대상이면서 교통수단이라 일찌감치 상인이 활동했고, 한양과 전국을 잇는 큰길 10개 가운데 3개가 용산을 통과했다. 일제가 이 교통 요지에 눈독을 들였다. 1899년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개통한 경인선을 한강 건너 수도와 연결하려고 1900년 한강철교를 준공한다. 용산 일대 390만 제곱미터(약 118만 평) 부지를 수용해서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기차역·철길·관사·공장·병원 등 철도 관련 시설을 짓는다. 주민이 논밭을 일구고, 강에 나가 상인의 일손을 거들고, 선비들이 유람 와서 시를 읊고 붓을 놀리던 어제의 용산은 빠르게 사라졌다.
20세기 용산을 상징하는 군사기지와 철도가 1층 전시실 상당 구간을 차지한다. 1906년 완공한 용산역을 벽면에 그린 전시실에서는 기차표, 철도 노선 안내 책자, 사진 등으로 100년의 역사를 되짚는다. 현재와 사뭇 다른 옛 기차 의자에 앉으면 차창 역할을 하는 모니터 영상이 시작된다. 몽골과 러시아, 프랑스를 거쳐 영국까지 풍경이 흐른다. 언젠가는 분명히 가능할 여정을 이곳에서 미리 체험한다. 아픔을 뒤로하고 평화와 낭만, 미래를 연결하는 맨 앞에 기차가 달린다.
사람이 살아온 땅, 넉넉히 품어 안은 땅
이 모든 순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용산이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점이다. 일제가 점유한 토지 118만 평을 터전 삼았던 주민이 쫓겨나 이룬 마을이 보광동이다. 해방촌은 광복과 6·25전쟁 이후 거주지가 막막한 사람이 모여 형성됐다. 박물관은 이들을 용산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모시고 다양한 이를 인터뷰해 들려준다. 전국 각지에서 꿈을 갖고 와, 때로는 상황에 떠밀려 용산에 뿌리 내린 이들의 이야기가 뭉클하다. 외국인과 공존해 온 포용의 면모 또한 용산의 주요한 정체성이다. 무려 51개 주한 외국 대사관이 용산에 자리 잡았으며, 토속신앙 의례부터 외지 종교 성전도 두루 만날 수 있다.
현재 열리는 기획전 <숨은 용산 찾기>는 한 세기 동안 극적인 변화를 맞은 용산의 모습을 담은 소설·영화·드라마·음악을 꼼꼼히 선별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수록된 소설 ‘피로-어느 반일의 기록’에서는 멀쩡한 한강 인도교를 두고도 고무신과 짚신을 신은 발로 꽁꽁 언 한강을 걸어서 건너야 하는 조선인의 처지를 그린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땡땡 소리가 정겨운 백빈건널목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길을 지나온 두 사람이 교차해 만나고 이해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 밖에도 소설 <해방촌 가는 길> <오발탄>, 드라마 <쌈, 마이웨이> <이태원 클라쓰>, 영화 <기생충> <올드 보이>, 대중가요 ‘돌아가는 삼각지’ ‘원효로1가 13-25 가는 길’ 등 용산만의 정서가 낳은 작품을 하나하나 감상한다. 용산이라는 복잡다단한 도시의 상이 맺히는 듯하다.
이야기가 모인 박물관이라는 바다
2층 전시실에서 한 층을 올라 옥상정원으로 간다. 설계할 때부터 지붕을 평평하게 해 환자가 쉬도록 한 공간이다. 곳곳에 의자를 놓고 식물을 심어 산책하거나 앉아서 쉬기 좋다. 건물 모서리를 공들여 둥글게 마감한 건축양식도 여기에선 잘 보인다. 100년 전 사람은 웅장하고 이국적인 용산역이나 주변의 신식 건물을 조망하며 감탄했을 터다. 지금은 마천루가 겹겹이 들어섰고, 한쪽은 철도고등학교, 뒤쪽은 공터. 그럼에도 3층 야외를 활보하면서 이런 높이의 시야로 도시를 감상하는 경험은 특별하다. 용산의 시간을 간직한 병원이 여러 풍파에도 살아남아 박물관으로 재탄생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이 흘러가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면 용산은 또 어떻게 바뀌어 갈까. 그런 날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박물관이라는 바다로 모여들어 용산을 기억할 것이다. 박물관을 나와 한강대교를 건너는 길, 저 너머 한강철교로 기차가 지나간다. 늘 좋아했지만, 더 좋아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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