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은 단단히 매듭지어 정리하고, 다가올 새로운 날을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할 시간. 미련 묻은 과거를 하나둘씩 보내니 마음이 헛헛해진다. 어쩐지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 같은데 바람이 등을 밀자 몸까지 움츠러든다. 차가운 공기가 모든 것을 꽁꽁 얼릴 때 불쑥 떠올랐다. 남쪽으로 떠나자. 조금이라도 더 온기를 느끼고 싶어 KTX를 타고 곧장 부산으로 달렸다. 아, 역에 내리자마자 서울보다 포근한 기운이 느껴진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녹일 곳, 부산에 닿았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부산 중심에 서다, 황령산 봉수대
걸음걸음마다 여행지로 가득한 도시가 부산이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바다, 생기 넘치는 전통시장, 아기자기한 벽화마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 두근거림을 뒤로하고 잠시 고민한다. 나무보다 숲을 먼저 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도시를 요모조모 뜯어볼 요량으로 야심 차게 황령산을 오른다. 황령산은 도심 속 숲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부산진구, 남구, 수영구 등에 걸친 산 정상에 서면 부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세가 순한 덕에 등산 초보자도 도전할 만하고, 등산에 자신이 없어도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부산을 제대로 여행하겠다는 의지를 연료 삼아 힘차게 발을 뗀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숨 고르기는 뒷전, 눈이 바빠진다. 저 멀리에는 낙동강, 그 뒤에 쪼르르 자리한 크고 작은 집들, 질서정연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보인다. 대강 훑었을 땐 꼭 멈춘 풍경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꿈틀대는 중이다. 도시를 이루는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인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생기에 못 박힌 듯 한참을 서서 부산을 바라본다. 황령산의 자랑은 경치만이 아니다. 인터넷과 전화가 없던 조선 시대,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황령산 정상에 남아 있다. 부산에는 황령산 봉수대를 포함해 총 다섯 개의 봉수대가 존재한다. 부산 시내를 등지고 서니 고요히 잠자는 남해가 눈에 들어온다. 적이 저 바다를 침범해 공격 태세를 취하면 이곳에서 연기나 불을 피워 상황을 알렸고, 그 소식은 서울 남산의 봉수대까지 차례차례 이어져 임금에게 닿았다.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나팔을 불거나 징, 꽹과리 등을 쳐서 기별하기도 했다. 봉수대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있다. 다른 봉수대와 높이가 많이 차이 나면 신호를 원활하게 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외치는 말이 어떤 이의 귀에 들어갈까.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고, 황령산이 말해 주는 것 같다.
되찾은 빛, 부산시민공원
산을 내려와 전망대에서 점찍어 둔 곳으로 향한다. 다음 목적지는 부산진구에 넓게 자리한 부산시민공원이다. 남문에 다다르니 우뚝 선 녹나무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이 공원에 시민들이 애정을 을매나 쏟았는지 아십니꺼. 저 녹나무도 시민이 기증한 거라예. 공원 이름이 괜히 부산시민공원이 아니라니까예.” 김덕숙 문화관광해설사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 온다.
황령산 봉수대가 제 기능을 하던 시절, 여기는 평범한 농토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일제강점기 전까진 그랬다.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구실로 조선 땅을 빼앗은 일제는 1920년대에 부산 서면경마장을 만든다. 조선에 들어온 중산층 일본인의 소비·여가 욕구에 부응해 오락 시설을 만든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서면경마장에 10288기마부대를 설치해 땅을 군사 목적으로 활용한다. 해방 후에도 땅은 원래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일본이 철수한 자리에 주한 미군 하야리아 부대가 주둔했기 때문이다. 약 100년간 이방인의 소유였던 땅을 되찾게 된 것은 시민 덕분이었다. 1995년을 기점으로 시민 단체가 모여 지속적으로 하야리아 부대 주둔지 반환을 요구했다. 수차례 협상 끝에 드디어 2014년, 상처 입은 땅은 부산시민공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공원은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기존 하야리아 부대 건물 중 24개를 리모델링해 사용하고, 공원역사관을 세워 부산시민공원이 탄생한 과정을 여러 자료로 전시했다. 미군 부대 주둔 시기에 사용하던 목재 전신주를 공원 한편에 모아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모두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제는 부산을 대표하는 공원을 삼삼오오 모여 걷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공원이 선사하는 평화로움이 감사하다.
상처 입은 땅은 시민의 노력이 모여 부산시민공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픈 역사를 이겨낸 공원이 선사하는 평화로움이 더욱 소중하다.
이어지는 시간, 나아가는 빛
하늘이 서서히 까맣게 물든다. 구석구석 검은색으로 채워지자 부산시민공원이 조용히 빛을 뿜더니 이내 환하게 빛난다. 밤하늘에서 놀던 별이 땅에 옹기종기 내려앉았다. 빛 축제가 한창인 공원의 밤은 낮만큼 평화롭고 아름답다. 남문 입구 부근을 장식한 축복 빛 구간을 지나면 계묘년 토끼해를 맞이해 조성한 토끼 정원과 배롱나무꿈꽃길 터널이 인사를 건넨다. 이번엔 방문자가 적은 소원지로 꾸민 소원은하수길을 걷는다. 빛처럼 반짝이는 소원이 눈길을 끈다. ‘우리 가족 모두 사랑합니다. 아프지 말고 올해도 건강하길’ ‘꿈을 가지고 즐겁게 생활하자’. 짧은 문장에 담긴 진심이 전해져 소원지 하나하나 눈으로 어루만진다. 또다시 출발선에 선 지금, 부담과 걱정도 따르겠지만 마음은 언제나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용기를 그러모아 펜을 들고 별 모양 소원지에 한 글자씩 적는다. 행복, 평화, 사랑으로 따뜻한 한 해이기를.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온기 있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부산진구 여기도 가 보세요
호천마을
골목을 밝히는 주황빛 가로등이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곳은 부산의 야경 명소 중 하나다. 아기자기한 주택과 골목길이 자아내는 감성 덕에 카메라를 드는 곳마다 포토 존이다. 주변 산세가 험하고 숲이 울창해 호랑이가 자주 드나들었다 하여 호천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호랑이와 관련된 그림이 많아 벽, 건물 등 마을 곳곳에서 호랑이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2017년 방영해 큰 인기를 끌었던 청춘 로맨스 드라마 <쌈, 마이웨이> 촬영지로, 여전히 드라마의 흔적을 찾아 방문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문의 051-605-4522
전포카페거리
지금, 자타 공인 부산진구의 ‘핫플’은 서면 일대의 전포카페거리다. 철물·공구 상가가 밀집한 곳에 개성 넘치는 카페가 하나둘 들어서며 이색 여행지로 떠올랐다. 전포카페거리가 확장되어 생긴 전포사잇길도 독특한 가게들로 활기차다. 전포카페거리를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은 게임형 AR 콘텐츠 ‘스파이를 찾아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메타버스 플랫폼 ‘리얼월드’와 함께하는 콘텐츠로, 서면근대산업유산탐방길, 전포카페거리, 전포공구길 등 전포 권역 내 여행지를 AR 미션, 퍼즐 등으로 둘러볼 수 있다.
문의 051-605-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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