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세상에서 고전적 가치와 ‘원조’를 찾는 이가 늘고 있다.


본질의 회복을 향한 움직임
2025년 11월 국립경주박물관에 198만 명이 몰리며 30년 만에 최다 관람객을 기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신라 금관 전시였다. 1500년 전의 찬란한 황금빛 유물 앞에서 사람들은 긴 대기 줄을 마다하지 않았다. 경주뿐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 ‘근본’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늘고 있다. 원조 맛집을 찾아 먼 길을 떠나고, 복각 제품에 지갑을 연다. SNS에는 ‘근본’ ‘오리지널’ 해시태그가 넘쳐 난다. AI가 모든 것을 생성할 수 있는 시대, 역설적으로 ‘진짜’에 대한 갈증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최초의 원형과 진본을 존중하고, 그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적 태도를 ‘근본이즘’이라 부른다. 이는 단순한 복고 취향과 다르다. 레트로가 과거의 감성을 빌려 오는 것이라면, 근본이즘은 ‘이것이 시작이었다’는 기원에 대한 경의이자, ‘여기서부터 모든 게 나왔다’는 뿌리에 대한 인정이다. 이 트렌드는 SNS의 확산, 인공지능의 대중화와 맞물리면서 본격화됐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되면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해진 것. 무수한 복제와 변형 속에서 오리지널의 가치가 재발견된 것이다. 특히 MZ세대가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원조 논쟁’에 열을 올리고,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꼼꼼히 따지며, 창업 연도와 본점 위치를 확인한다. 근본 없는 것에는 가차 없고, 근본 있는 것에는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지난해 상반기, LG전자는 1959년에 출시한 국내 최초의 라디오 ‘A-501’을 66년 만에 복각했다. 당시 ‘금성사’라는 이름으로 만든 A-501은 6·25전쟁 이후 다시 일어서려는 국민에게 희망의 소리를 전했다. LG전자는 한국 가전 산업의 시작을 알린 상징적 제품의 외형만을 재현하지 않았다. 원목 캐비닛의 질감과 둥근 다이얼, 황금빛 금속 그릴의 디테일을 살리면서도, 내부는 현대식 블루투스 스피커로 재탄생시켰다. FM 라디오는 물론 스마트폰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60대 이상에게는 청춘의 추억을, 젊은 세대에게는 아날로그 감성을 선물한 것이다. A-501은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완판됐다.
1938년 전주 가구 거리에 문을 연 시계방, 금성당도 마찬가지다. 건물의 구조적 특징과 원형은 보존하면서 카페와 독립 서점, 전시 공간을 더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이곳은 전주에서 꼭 들러야 할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옛 건물이라서가 아니다. 한 세기 가까이 시간을 새겨 온 역사와 진정성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근본이즘은 과거를 그대로 복제하는 게 아니라, 본질은 지키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다. 추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진짜에 대한 신뢰’가 작동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검증된 오리지널에 기꺼이 손을 뻗는다.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
흥미로운 것은 근본이즘 열풍을 주도하는 이들이 정작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1990년대생이 1970년대 LP판에 열광하고, 2000년대생이 필름 카메라를 메고 다닌다. 왜일까? 여기서 ‘아네모이아(anemoia)’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뜻하는 이 말은 개인의 기억이 아닌, 문화적으로 전승된 집단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금의 20대에서 30대 초반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자랐지만, 겪어 보지 못한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동경이 크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 터치스크린 너머의 물성, 즉각적 삭제가 불가능한 기록에 매력을 느낀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클레이 루틀리지는 “AI가 부상하면서 모든 시선이 미래로 향하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미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볼 가치가 있다”라고 말한다. 현재를 풍요롭게 할 자원을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고, 과거로부터 현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 아네모이아의 목적이다. 젊은 세대의 근본 찾기는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능동적 선택이다. 이들은 생성형 AI가 3초 만에 생성한 이미지보다 일주일을 기다린 필름 현상 사진에 더 큰 애착을 느낀다. 클릭 한 번으로 수정·삭제되는 디지털 기록보다 잉크가 번진 손 편지에 더 진심을 담는다. 배달 앱으로 주문하는 대신 직접 발품 팔아 찾아간 맛집의 음식 사진을 SNS에 자랑스레 올린다. 이는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깊이’를 되찾으려는 시도다. 모든 것이 쉽고 빠르게 손에 들어오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과거로의 도피가 아닌, 현재를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저항인 셈이다.
따라서 근본이즘의 핵심은 ‘선택적 계승’이다. 과거를 박제하는 게 아니라 본질적 가치를 현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는 능력 말이다. LG전자 라디오가 66년 전 디자인에 블루투스 기술을 접목했듯 근본과 혁신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견고한 뿌리 위에서 더 과감한 혁신이 가능하다. 앞으로는 단순히 옛것을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가치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 브랜드가 주목받을 것이다.
2026년의 키워드는 ‘AI와 인간의 공존’이다. 생성형 AI가 일상화되면서 반대로 인간의 손길, 시간의 흔적,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기업들은 자동화와 효율만을 추구하기보다, ‘이것만은 기계에 맡길 수 없다’는 영역을 분명히 하게 될 테다. 가장 인간적인 특성에 오히려 관심을 쏟을 것으로 예상된다. AI가 추천하는 최적화된 선택보다, 때론 비효율적이더라도 자신만의 기준으로 직접 고른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효율과 본질, 속도와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2026년의 과제다.
근본이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당신의 근본은 무엇인가?’ 개인에게든 조직에게든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지켜야 할 핵심 가치가 존재한다. 동시에 시대에 맞춰 과감히 바꿔야 할 것도 있다. 그 둘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는 도망칠 피난처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할 주춧돌이다. 그 주춧돌 위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혜원 트렌드 코리아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대한민국 외식업 트렌드> Vol.1~2, 및 <미래 트렌드 연구실> 시리즈 공저자. 서울대학교 소비자학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고려대학교 국토계획공기업 고급정책과정에서 ‘소비사회와 트렌드’를 강의했다. 현재 국토교통부 정책홍보자문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