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내내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는 이 마음은 어떤 색일까. 30여 년간 숯의 심연을 탐구해 온 작가 이배는 오로지 흑과 백, 어둠과 빛의 변주로 기다림을 그려 낸다.


창밖의 산과 나무, 움직이는 빛, 계절의 변화와 호응하며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 빽빽한 솔숲을 지나 뮤지엄 SAN(산)에 도착한다. ‘소통을 위한 단절’이라는 슬로건 그대로 도심에서 벗어난 깊은 산속에 사계절의 변화를 전시의 일부로 품은 곳이다. 느린 걸음으로 플라워가든을 지나 워터가든에 들어서자 저 멀리 검은 기둥이 보인다. 다가갈수록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높이 8미터, 폭 5미터, 무게 7톤에 달하는 설치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다. 작가는 큰 화재가 났던 강원도 고성의 불타 버린 숲에 충격을 받고 정화와 치유의 바람을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너무 인간 중심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조각 한 조각 쌓아 올리면서 다시는 그런 큰 재앙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을 담았습니다.” 육중한 숯 덩어리를 켜켜이 쌓아 올린 이 기둥은,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뮤지엄 SAN을 가득 채우는 이배(Lee Bae)의 대규모 개인전 의 강렬한 서막이다.


제각기 다른 흑색을 품은 숯 조각들이 보석보다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

이 공간에 작가는 3만 5000개의 스테이플러 심을 박아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순백의 비움, 칠흑의 채움
이배를 설명하려면 먼저 숯을 이야기해야 한다. 1989년 프랑스로 건너간 가난한 유학생의 눈에 띈 것이 슈퍼마켓에서 파는 숯이었다. 서양인에게는 그저 바비큐에 쓰고 버릴 땔감이었지만, 동양의 작가에게는 저렴하고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목탄으로 데생을 하던 기억을 살려 숯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검은 먹으로 푸른 난초를 그리는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작가적 상상력을 입혀 나가며 작업을 확장했다. 그렇게 숯이라는 물질에 내재된 생성과 소멸, 순환의 원리를 일관되게 탐구하는 동안 숯은 이배의 예술 그 자체가 되었다. 작가는 느티나무, 포도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등 다양한 나무를 골라 고향 청도의 오래된 숯가마에서 한 달간 구워 각기 다른 밀도와 색을 끌어 낸다.
전시장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정교하게 압착한 숯가루를 물감 삼아 거대한 붓으로 그려 낸 열여섯 점의 ‘붓질(Brushstroke)’ 연작을 마주한다. 그야말로 뜻밖의 조우!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작가의 호흡과 수행적 움직임이 빚어낸 에너지의 궤적이다. 가늘고 굵은 선이 겹치면서 만들어 내는 깊이, 흑과 백이 다양한 채도로 겹쳐지며 생기는 공간감이 고요하게 호응한다. 통창 너머의 산과 나무,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가 작품 위로 겹쳐질 때, 관람객은 비로소 작가가 왜 이 작품들을 전시장 안이 아닌 로비에 전시했는지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자연과 예술이 경계 없이 섞이는 찰나다.
덕분에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White’라 이름 붙은 공간으로 들어선다. 사방이 흰 종이로 배접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쏟아지는 빛에 아찔한 현기증이 인다. 안내 요원이 나직한 음성으로 “조심하세요”라고 한 이유다. 방은 온통 백색이다. 천장에서 드리워진 빈 종이가 공간을 가로지르고, 묵직한 양감과 거친 질감만 있는 흰색 덩어리들이 곳곳에 놓여 여백을 조각한다. 채움으로 얻는 비움이랄까. 이 방에서 유일하게 물성을 드러내는 것은 스테이플러 심을 박아 넣은 철의 드로잉이다. 비물성의 공간에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해 작가는 혼자서, 스케치 없이 무려 3만 5000개의 스테이플러를 박아 넣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땅을 갈 듯이 작업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의 노동 집약적 예술혼이 그곳에 서늘하게 박혀 있다.
이어지는 ‘Black’의 방에 들어서자 겹겹이 쌓인 숯 더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흡수한 듯 칠흑같이 검은 숯 덩어리는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로 생생한 기운을 내뿜는다. 불구덩이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동안 다시금 생명을 얻고 일어섰다는 듯이! 포도나무 숯과 소나무 숯, 잣나무 숯, 잡목 숯으로 이루어진 묵직한 더미 아래서 붓질이 힘차게 뻗어 나오며 어우러지는 모습은 수묵산수화를 입체로 구현한 듯 생생하다. 한편 건너편 벽 앞에는 많은 관람객이 발길을 멈추고 서 있다. 폭 10미터가 넘는 여섯 개의 면이 이어지는 이 작품은 숯 조각을 얇게 자른 단면을 붙여 구성한 평면 작업으로, 들여다본 적 없던 숯의 표면을 마주하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이게 잘라 붙인 거라고? 그린 게 아니고?” “자개가 아니고 숯?” “보석보다 아름답다!” 연신 터져 나오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고요한 공간에 청량감을 불어넣는다. 흑과 백, 음과 양이 이루는 완벽한 균형에 대한 헌사다.


기다림에 관하여
다음 공간에서 마주하는 영상 작업은 어쩌면 이번 전시의 백미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9미터 높이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작가의 고향 청도의 논이 끝없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농부셨어요. 제가 화가가 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시고, 굉장히 화를 내셨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내가 농부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전시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농부가 땅을 갈 듯 준비했어요.” 흑백 영상 속에는 아버지의 뜻을 뒤로하고 떠났던 아들이 백발이 되어 돌아와 맨발로 논 위에 붓질을 한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가운데 천천히 움직이는 작가의 몸짓을 좇으며 관람객 역시 숨 죽인 채 몰입하게 되는데, 작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짊어진 고통과 인내, 순수와 열정을 들여다보는 듯해 이내 숙연해진다. 앞서 본 아름다운 작업들이 단순한 붓질이 아니라 명상과 호흡, 성찰과 사유를 통해 나온 것임을 마침내 확인하게 되는 의미심장한 순간이기도 하다. 바닥에는 영상 속 그곳, 청도의 흙으로 구현한 논이 펼쳐져 있다. 얼마간의 기다림이 더해지면 이 흙에서 실제로 싹이 트고 미생물이 생장하며 땅과 시간의 순환적 관계를 드러낼 것이다. 작가가 이 공간을 ‘Becoming’이라고 명명한 이유다.
벤치에 기대앉아 몇 번이고 영상을 들여다보다 전시 제목 ‘기다리며’를 다시금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기다림의 대상이 있다. 작가는 내내 무엇을 기다렸을까. 전시를 처음 공개하던 날, 많은 미디어 앞에서 들려준 작가의 가감 없는 고백이 그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로 살고 있지만 내가 예술을 얼마만큼 잘 이해하고,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사실 잘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고요. 누구에게도 말 못 하지만 절망적일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중략) 가장 진지하게, 가장 순수해지려고 하는 노력. 작가의 일 안에 그게 들어 있지 않을까요. ‘기다리며’라는 제목은 그런 시간과 과정으로부터 나온 제 염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30여 년간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수행하듯 작업에 몰두했음에도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순수와 영감을 갈구하는 예술가의 운명!
전시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면 마지막 공간에 다다른다. ‘무(無)의 공간’이라고 이름 붙은 야외 정원에는 멀리 숲을 향해 자라난 나무 같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 같기도 한 10미터 높이의 브론즈 조각(우뚝 세우기 위해 땅을 무려 3미터나 팠다) 여섯 점이 흩어져 있다. 뮤지엄 SAN의 건축물, 치악산의 유려한 산세와 어우러지며 마침내 완성되는 풍경화라고 해야 할까. 무심히 서 있는 조각 사이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호흡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껴 보는 것이 이 전시의 마지막 모멘트다.
작가가 평생을 바쳐 일관되게 탐구해 온 주제를 이토록 아름답게 펼쳐 보인 전시가 근래에 또 있었던가. 직관적으로나 미학적으로 개념과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되는 전시를 만났을 때의 충만함이 느껴졌다. 도심에서 꽤 떨어진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은 과연 어떤 감각을 경험했을까. 감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낮은 음성으로 설명을 이어 가는 안내자가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답한다. “흰 방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머물렀던 분이 계셨어요. 천천히 걷기도 하고 우두커니 서 계시기도 했어요. 다른 관람객들을 위해 이동해 달라고 말씀드려야 했지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어요. 그 모습이… 잊히지 않네요.” 그가 왜 순백의 공간을 떠나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볼 뿐. 흑과 백, 그 사이에 켜켜이 쌓인 억겁의 시간 어딘가에 있는 그 무엇을.

이배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파리로 이주해 작업했다. 운명적인 재료인 숯을 만나 30여 년간 단일 매체를 파고들며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소멸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를 응축하는 숯의 생명력에 동양적 정신과 수묵의 사유를 입혀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조형 언어로 확장해 왔다.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기사장(2018),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23) 등을 수상하고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하는 등 국내외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한국의 정신을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 작가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