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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입은 집

2026년 06월 01일

  • EDITOR 김수아
  • PHOTOGRAPHER 김은주

서울 종로구를 중심으로 도시 건축 탐방에 나섰다. 홍윤주 건축가와 함께 눈길을 끄는 건물 앞에 멈춰 서서 흥미로운 디자인 요소를 채집했다.

담장이 생긴 뒤 증축한 삼각형 건물의 붉은색 외관이 눈길을 끈다.
원서동 빌라촌에서 발견한 나뭇가지 무늬를 새긴 벽돌.

인테리어 잡지를 펼치면 한 번쯤 머물고 싶은 공간이 연이어 등장한다. 유명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긴 감각적인 조명,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의 침구, 정교하게 마감한 책장, 나뭇결을 살린 테이블, 독특한 패턴의 러그 등 고풍스러운 아이템이 한곳에 모여 있다. 홍윤주 건축가는 잡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생각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간 마주한 친구들의 집은 잡지 속 공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사적인 공간에 주목한 그는 2011년 웹 매거진 <진짜공간>을 개설했다. 친구의 거주지를 소개하는 ‘네 방을 보여 줘’, 필요에 따라 만든 독창적 구조물을 관찰하는 ‘비공식 건축’, 우연히 마주친 매혹적인 풍경을 포착하는 ‘도시 판타지’, 동네 구석구석에서 생활 디자인을 수집하는 ‘디자인 채집’, 일상을 편하게 하는 똑똑한 기술과 창의적 방식을 탐구하는 ‘생활 기술 창작’, 총 다섯 가지 주제로 카테고리를
구분해 생활 밀착형 건축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의 호기심과 탐구 정신은 <진짜공간> <탐방다방> 등의 출간물로 이어졌고, 최근엔 문학잡지 <릿터>에 ‘우리가 지은 도시’라는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기존 도시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 건축가와 함께라면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을까. 설렘을 안고 진짜 공간을 만나는 짧은 여행을 떠났다. 첫 목적지는 안국역이다.

홍윤주 건축가가 군산북페어에서 판매한 굿즈. 기와지붕, 방범창, 계단, 맨홀, 이끼 등 전국 각지에서 마주한 장면을 스티커로 제작했다.
비상벨 위 도깨비 부조 조각이 방망이로 불청객을 위협하는 듯하다.
바퀴 달린 이동식 열쇠 매장. 아연도금 철판으로 된 외관에 ‘열쇠’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도시 풍경을 다시 읽다
안국역에서 만난 홍윤주 건축가는 지하철 역사부터 살피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지하철역을 드나들 뿐 미학적으로 바라본 적은 없어 호기심이 생겼다. “지하철역마다 콘셉트가 달라요. 안국역은 안국동의 옛 모습을 디자인 주제로 정해 화강석으로 부조 벽화를 만들었죠.”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험상궂게 생긴 도깨비를 중앙에 두고 기와집, 산, 구름 등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 보존지구로 지정된 안국동 일대의 모습을 반영한 안국역 내부를 훑다 보면 궁궐이 떠오른다. 줄눈 일부를 두껍게 강조한 벽면은 한옥의 목구조를 형상화한 듯하고, 주황색 재료로 마감한 천장은 나무 색을 닮았다. 출구 안내판 근처에서는 단청과 유사한 디자인 요소를 발견한다. 역사 곳곳에서 마주한 도깨비 부조 조각은 이곳에서 5분 거리의 창덕궁에 있는 석수를 연상시킨다. 특히 화재 비상벨 부근에 설치한 조각은 장난 삼아 벨을 누르려는 불청객을 방망이로 위협하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낸다. 지하철에서 내려 목적지로 서둘러 가다 보니 내부를 제대로 둘러본 적 없었는데, 구석구석 재밌는 요소가 가득했다.
안국역 밖으로 나오자 횡단보도 건너편의 열쇠 매장에 시선이 닿았다. 아연도금 철판으로 된 외관에 ‘열쇠’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고, 그 아래에 작은 바퀴가 달렸다. 영업하는 날은 슬라이딩 셔터를 열고 지붕에 올려 차양으로 사용하는데, 이렇게 셔터를 닫은 건 영업하지 않는 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퀴가 달린 이동식 가게는 고정된 부지 없이 도시 공간을 임시 점유해요. 보도 한쪽에 자리하니 이동 중 발생하는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있죠.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할까요. 도시의 편의성과 연속성을 촘촘하게 유지하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거죠.” 정형화된 건물 사이에서 예상 밖의 위트를 주는 이 매장은 <진짜공간>의 비공식 건축 카테고리에 업로드되었다.
다음 목적지인 원서동 빌라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전에 메일로 전달받은 미공개 사진 중 매력적이라고 느낀 건물 대부분이 빌라촌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들을 세심히 관찰하니 차이가 느껴진다. 벽돌을 규칙적으로 쌓아 올린 건물이 있는가 하면, 특정 부분을 돌출시켜 시각적 재미를 준 건물도 많다. “건물 형태가 같아도 대문 지붕이나 장식을 달리하면 새로워 보여요.” 특히 보라색 출입문 장식 앞에 오래 머물렀는데, 색깔이 튀어서만은 아니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두 개의 문이, 다른 쪽에는 두 개의 가로등과 거울이 자리했다. 의도한 설계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알 수 없어 상상력이 자꾸만 커진다. 심지어 두 문 중 하나는 여러 개의 화분으로 막혀 있어 본래 쓰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원서동 골목에서는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새로운 디자인의 벽돌이 나타난다. 구름·연꽃·나뭇가지 무늬가 새겨진 벽돌을 한번에 감상하는 건 아파트 거주민에게는 생소한 경험이다. 십장생을 조각해 넣은 방범창은 이제는 보기 어려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벽돌 색이 서로 다른 세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모습도 흥미롭다. 건축가가 꼭 보여 주고 싶다던 개성 만점 삼총사 앞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2000년대 이후 다세대주택 관련 주차장법이 강화되면서 필로티형 다세대주택이 많이 들어섰어요. 대신 구멍가게와 집 앞에 펼쳐 놓는 평상이 자취를 감췄죠. 사람 간의 접점은 사라지고 삭막함이 남았네요.”

원서동 빌라촌에서 인상 깊었던 보라색 출입문 장식. 두 문 중 하나는 여러 개의 화분에 가로막혀 본래 쓰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엉뚱한 발상이 돋보이는 전통 문살 장식 유리문.
우연히 흐른 페인트가 멋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

탐험가의 자세를 배우다
돌담 옆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을 지나 골목 깊숙이 들어섰다. 홍윤주 건축가는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을 마주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골목을 돌아다니는 동안 쉴 새 없이 고개를 움직이며 구석구석 스캔한다. 새로운 길을 찾듯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막다른 길에 이르면 다시 돌아 나온다. ‘진입 금지’ ‘길 없음’ ‘차량 통과 못함’ ‘연결 도로 없음’. 지도에 의지하지 않으니 거리의 메시지가 반갑기만 하다. 자신의 촉을 믿고 무작정 건물로 들어가는 탐험가의 뒤를 따라가다 종로3가역 인근에서 구불구불한 계단을 찾았다. 두 건물에 같은 지붕을 덮어 한 건물처럼 사용하려다 보니 계단이 필요했고, 좁은 공간에 만든 계단이 꺾인 형태로 완성됐다. 이렇게 외부 공간을 안으로 들인 건물 내부는 또 하나의 골목 같다.
전통 문살 장식을 덧댄 유리문을 발견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어디서 난 것이며 이것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엉뚱한 발상이 돋보이는 비슷한 사례를 들려준다. 보광동에서 발견한 붉은 벽돌집 기와 이야기다. “1980년대 주택 대문에 한옥에 어울릴 법한 기와를 얹은 거예요. 콘크리트 차양을 설치한 집이라 기능적으로는 필요 없으니 장식용인 거죠. 기와집에 대한 로망이나 관습이 현대건축에 적용된 것이랄까요. 대문만큼은 전통적인 멋을 포기할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의 고집이 느껴지죠.”
반면 기능적인 이유로 만들었지만 운 좋게 미학적 요소를 얻은 경우도 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여 주겠다는 말에 따라간 골목 경사로에서 콘크리트 덩어리를 만났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회색 우수관에서 콘크리트 덩어리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 우수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빗물이 건물에 부딪쳐 발생할지도 모를 누수를 막기 위한 것이다. 우연히 페인트가 흘러 멋스럽기까지 하다. 평상시라면 별 의미 없이 지나쳤을 콘크리트 덩어리를 하나의 설치미술처럼 감상했다.
가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래 한 구절을 여러 번 듣는 것처럼 홍윤주 건축가는 정지, 뒤로 가기, 재생을 반복하며 눈앞의 풍경을 살핀다. 골목에 숨은 미학과 은근한 유머를 놓치기 아쉽기 때문이다. 건축 여행은 세심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느긋하게 골목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다르게 쌓은 벽돌, 개성을 뽐내는 대문 지붕, 막다른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등이 말을 걸어온다. 그 부름에 답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