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생존의 첫 번째 조건이 집일 때 벌어지는 일

2026년 02월 01일

  • WRITER 배선애(연극평론가)

인간은, 특히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집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연극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은 인간의 욕망을 장수말벌에 은유해 현대사회를 그로테스크하게 비틀고 꼬집는다.

겨울 숲은 참으로 고요하다. 동면에 들어간 여왕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진다. 벌 중 가장 덩치가 큰 장수말벌마저도 자취를 감춘다. 재앙 같은 겨울을 견딘 여왕벌이 봄에 깨어나면 숲은 생명의 소란함으로 가득해진다. 한겨울에 장수말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연극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이 장수말벌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장수말벌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다. 1년도 채 못 살지만 집을 지키려는 일벌의 치열한 모습, 그리고 관습처럼 내려오는 집에 대한 규칙을 통해 인간을 풍자한다. 쉽지 않은 창작 방법인 우화(寓話)를 이용해 인간의 어떤 면을 꼬집으려 한 것일까? 장수말벌의 세계가 인간 세계와 많이 닮았다는 발견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 문현준

작가와 함께 성장하고
변모하는 희곡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작과 관련해 특별한 사업 두 가지를 눈여겨볼 만하다. 첫째는 ‘대한민국 신춘문예 페스티벌’이다. 한국연출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사업으로, 희곡의 완성은 무대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 것임을 전제해 신춘문예에 희곡으로 당선된 모든 작품을 무대화한다. 작가라는 명칭이 어색한 신인 작가들이 자신의 희곡이 연극이 되는 과정, 그리고 관객에게 공개되는 순간을 입체적으로 경험한다.
둘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봄 작가, 겨울 무대’다. 단막극으로 데뷔한 작가들이 여름까지 장막극을 창작해서 낭독극으로 발표하면 그중 몇 작품을 선별해 겨울 무대의 본 공연으로 제작해 관객에게 선보인다. 전자의 사업이 희곡의 무대화를 경험하는 사업이라면 후자는 창작자로서의 역량 강화를 실현하는 사업이다.
임선영 작가는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Bae]; Before Anyone Else 어느 누구보다 먼저>로 등단했는데, 두 사업에 충실히 임해 작가로서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 줬다. 희곡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은 그 결과물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신춘문예 페스티벌에서 만난 손현규 연출가와 지속적으로 작업하고 있으며, ‘봄 작가, 겨울 무대’의 장막극으로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을 창작했다.
임 작가는 문제의식을 다양화하고 무대화하는 과정에 적극적이다. 창작진과 활발한 토론을 통해 수정 사항 등을 작품에 즉각 반영하는 유연한 태도도 지녔다. 이번 공연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이 대표적 사례다. 처음 장막극으로 창작한 희곡은 여러 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장수말벌을 다루기 때문에 여왕벌, 일벌은 물론이고 장군과 공주 등 집을 건사하기 위한 많은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과감한 수정을 거쳐 일인극으로 만들었다.
작가 입장에서 일인극을 완성하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명이 등장하는 작품을 일인극으로 수정하는 일은 고행에 가깝다. 모든 것을 새롭게 창작하는 마음으로 전면 수정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연출가와 많은 소통을 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용했기에 가능했다. 주제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관객의 공감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일인극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여러 배우가 등장하는 낭독극에서 배우 한 명이 출연하는 일인극으로 작품 형태가 바뀌었다. 작가의 성장에 발맞춰 작품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 흥미롭다.

벌 중에서 가장 포악한 장수말벌,
그와 똑 닮은 인간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은 장수말벌 이야기다. 집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 위해 꿀벌 같은 약한 곤충을 공격한다. 집이 전부라는 믿음 아래 분업 체계로 운영하는 장수말벌의 세계. 애벌레를 먹이기 위해 곤충 경단을 만들고 집을 지키고자 노력하던 ‘장수말벌 90’은 잘못된 신념 때문에 꿀벌은 물론 함께 자란 자매들이 희생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 지금까지 보호해 온 집을 불태운다.
결국 집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장수말벌이 집을 지키다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내용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장수말벌 세계가 인간 세계와 겹쳐 보인다. 집을 장만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사는 수많은 하우스 푸어(house poor)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이 비참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그 사체로 경단을 만드는 장수말벌의 섬뜩한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잔혹함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인간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위해 장수말벌을 콕 집어 선택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장수말벌은 벌 중에서 가장 포악하기 때문이다. 전투조 10여 마리가 벌집 속 꿀벌들을 전멸시키기도 한다. 꿀벌의 사체는 애벌레에게 먹이기 위한 경단으로 만들고 꿀은 성충과 여왕벌의 영양분으로 활용한다. 천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수말벌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인간을 닮았다. 하지만 아무리 집을 지키고 싶어도 겨울이라는 재앙 앞에서 장수말벌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자신의 전부라고 믿었던 집을 스스로 불태우는 극단적 결말로 집을 향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강조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 장수말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 문현준

배우 한 명이 펼치는
장수말벌의 세계

일인극은 배우와 연출가에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작품 전체를 혼자서 이끌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있고, 연출가에게는 배우를 보조할 장치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기에 부담이 크다. 권슬아 배우는 여왕벌, 공주, 장군, 장수말벌 5·89·90으로 변신하며 장수말벌의 집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오롯이 혼자서 책임지는 무대의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편안하게 역할을 바꾸는 모습이 관객의 몰입감을 높인다.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는 손현규 연출가의 역할도 컸다. 무대 뒤에 세운 견고한 종이 상자 벽, 둥글고 크게 만든 실제 경단, 천장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알 등 무대가 비어 보이지 않도록 다양한 장치와 오브제를 적극 활용했다. 영상을 잘 쓰는 연출가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영상 대신 입체적인 소품과 설치물로 무대를 완성했다. 배우 한 명과 무대 기술로만 구현되는 말벌의 세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택한 덕분에 장수말벌에 빗댄 인간의 속성을 날것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말 집이 전부일까? 정말 집이 생존의 첫 번째 조건일까? 그런 집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집을 구성하는 존재는 집보다 가치가 없을까? 집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연극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은 집에 연연하는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작은 집을 불태우는 일>
임선영 작가와 손현규 연출가가 협업한 작품으로, ‘봄 작가, 겨울 무대’에서 선보인 장막극을 일인극으로 수정해 공연했다. 권슬아 배우가 여왕벌, 공주, 장군, 장수말벌 5·89·90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청년예술가도약지원 사업에 선정된 연극이다.
기간 2025년 12월 31일~2026년 1월 4일
장소 서울 여행자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