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은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고, 잠들어 있던 동심을 깨운다.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신인선 퍼핏티어와 함께 인형극의 세계를 탐구했다.


화제의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는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겨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227일간의 여정을 그린다. 배우 박정민과 박강현이 맡은 소년과 함께 벵골 호랑이가 주인공인 셈이다. 이때 벵골 호랑이는 실제 동물 대신 인형으로 등장하는데, 살아 움직이는 맹수를 표현하기 위해 세 사람이 하나의 인형을 조종한다. 동물의 거친 숨소리까지 재현하는 퍼핏티어(인형 조종사)의 모습에 관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선란 작가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서울예술단 창작 가무극 <천 개의 파랑>도 초연 당시 퍼핏티어의 출연으로 주목받았다. 3D 모델링을 활용해 160센티미터로 제작한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는 배우와 퍼핏티어가 2인 1조가 되어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또 다른 캐릭터인 경주마 투데이도 퍼핏티어의 정교한 움직임 덕에 감정을 가진 존재로 구현됐다. 그리고 무대 위에 오른 말을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워 호스>. 핸드스프링 퍼핏 컴퍼니가 설계한 실제 말 크기의 목각 인형이 무대 곳곳을 누비며 관중을 압도했다. 퍼핏티어는 기수 의상을 입고 나와 인형 조종사와 배우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과거에는 관객이 인형에만 집중하도록 퍼핏티어가 몸을 숨기거나 어두운 옷을 입었다면 최근에는 모습을 감추지 않은 채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퍼핏티어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둘 풀려 가던 차에 또 다른 정보를 얻었다. 인형극을 심리 치료의 한 방법으로 여기는 퍼핏테라피의 철학을 연구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퍼펫테라피연구소 녹.두의 신인선 대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인형극을 지휘하는 퍼핏티어
작품마다 퍼핏티어의 역할 범위가 다르다. 배우, 연출가,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신인선 대표는 인형이 탄생하고 관객 앞에 서기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1998년 극단 수레무대에 조연출로 입단해 3인조 분절 인형 어린왕자를 만난 이후 인형극의 매력에 빠졌다. 세 명이 호흡을 맞춰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움직이는 경험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을 줬다. 극 중 돌발 상황이 생길 때 대처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었다. “실수로 소품을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조종자가 직접 손을 대는 게 아니라 인형이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처럼 대응했죠.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상황이 흥미로웠어요.”
2011년 인형극연구소 인스를 창단한 신 대표는 처음에는 인형극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어린이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깨기 위해 유럽 중세의 익살극인 <빠떼와 파이>를 한국 정서에 맞게 재창작한 <빈대떡 신사>를 선보였다. 애초에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기획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점차 달라졌다. 순수성을 끄집어 내는 예술 장르인 인형극은 어쩌면 어린이와 가장 맞닿은 것일지 모르니 어린이가 즐길 만한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다. 나아가 이제 그는 연령대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형과 함께 치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중이다.
신 대표의 생각을 변화시킨 건 2022년 춘천인형극제 기간에 수강한 칠레 출신 퍼핏테라피스트의 워크숍이었다. 당시 함께 스터디한 구성원들과 계속 활동을 이어 온 형태가 지금의 퍼펫테라피연구소 녹.두다. 인형극을 치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이후 그가 이끄는 극단의 작품에도 변화가 생겼다. 제9회 예술인형축제 초청작인 <어느 북소년의 여행>은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마음이 반쪽뿐인 소년이 남들처럼 온전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인형극은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에 짐수레가 달린 삼륜 자전거를 끄는 소년이 등장하며 시작한다. 짐수레 안에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소녀가 타고 있다. 숨을 고르기 위해 애쓰던 소년은 소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잠시만 바람을 쐬면서 땀이 식기를 기다리면 안 될까? 잠시라도 들판에 앉아서 북을 치며 노래하고 싶어.” 유일한 동행자인 소녀는 그를 쉼 없이 재촉한다. “안 돼! 멈추면 안 돼. 불안해질 거니까. 멈추게 되면 우리는 계속 이 쓰레기 같은 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관객은 소녀와 소년에게 공감하며 내면의 불안감을 계속 들여다본다.


2 빨간색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긍정적인 감정을 가진 자아를 표현한 인형. 손에는 노란 풍선을 들고 있다.
기억의 정거장을 지나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인형을 만들고 공연하는 과정이 어떻게 치료에 도움이 될까? 더 깊은 이해를 위해 퍼펫테라피연구소 녹.두의 워크숍에 참가했다. 이날의 워크숍 제목은 ‘기억의 정거장’. 각자의 삶에서 잊지 못할 순간에 잠시 정차하기로 했다. 먼저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고 라포를 형성하는 과정을 몇 차례 거친다. 민트, 딸기, 생강, 마덜리, 팔랑, 써니. 하루 동안 불리고 싶은 별명을 정하고, 간단한 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별명을 익힌다. 술래가 되지 않으려고 집중하다 보면 목소리가 커지고 속도가 빨라지며 어느새 긴장이 풀린다. 다음은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시간. 양 손가락으로 막대를 지지하고 여섯 명이 하나가 된다. 막대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게 핵심이다. 몸에 열이 날 만큼 움직여 몸이 풀렸다면 이젠 인형을 매개로 교감의 기회가 주어진다.
2인 1조로 강아지 인형을 조종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막대를 이용해 인형 앞에 길을 놓아 준다. 여러 개의 막대가 교차하며 동작이 꼬이자 신 대표가 조언한다. “조종자가 의도를 가지기보다는 인형이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인형에 집중해야 해요.” 모든 참가자가 인형이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 예의 주시하기 시작한다. 길이 없으면 재빨리 막대를 잇고,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은 걷는 속도를 늦추어 호흡을 맞춘다. 점점 인형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여긴다.
워크숍이 시작되기 며칠 전 모든 참가자는 과제 하나를 받았다. “본인에게 소중한 물건을 가져오세요.” 딸이 어릴 적 좋아했던 그림책, 아들이 교내 장터에서 사 온 천, 어버이날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장, 절친이 만들어 준 목걸이,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필름 카메라, 엄마가 물려준 목도리, 창단 21주년을 맞은 극단의 팸플릿 등. 누군가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챙겼고, 어떤 이는 미래에 더 가치가 커질 소장품을 가져왔다. 물건과 연관된 감정의 단어를 적거나 그림을 그려 지도를 꾸미는 시간은 공연의 밑바탕이 되는 생각을 정리하기에 유용하다. 나의 소중한 물건에 깃든 키워드는 ‘기록’과 ‘후회’.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 글과 사진으로 남겨 두는 고집과 강박이 드러난다. 애착의 이유를 다시 한번 짚은 순간이었다.
이제는 나를 대변할 인형을 구상할 차례다. 크라프트지를 구겨 팔과 다리를 만들어도 되고, 부직포만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들어 유연한 움직임을 구현할 수도 있다. 마스킹 테이프를 꼼꼼히 붙여 옷을 더하거나 펜으로 색칠해 신체와 의상을 구분하는 등 표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여기서 인형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 최적화된 형태여야 하며, 각자에게 소중한 물건을 활용하기 쉬운 인형이면 더 좋다. 참가자 중 딸기는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 의상을 입은 두 개의 인형을 제작해 기쁨과 슬픔이 주된 감정이었던 시기의 모습을 나타냈다. 마덜리는 표정이 없는 인형으로 극을 이끌다가 벨크로를 덧댄 부직포 가면을 붙여 종교를 가진 이후 평온함을 얻은 변화를 전했다. 넘어지고, 몸을 흔들며 울고, 또 다시 일어나는 등 인형의 몸짓은 참가자가 지나온 삶의 굴곡을 드러냈다. 딸기는 퍼핏테라피 워크숍을 몇 차례 경험한 이후 힘든 시절을 떠올려도 이제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형은 동심을 찾게 해 줘요. 사람들이 인형극을 보며 자유롭고 순수한 자신과 대면하면 좋겠어요.” 신 대표의 맺음말과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박수로 워크숍은 마무리됐다. 인형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하늘을 날거나 온갖 묘기를 부릴 수도 있어 눌러 왔던 욕망을 실현하기에 좋은 매개체다. 인형극 안에서는 보고 싶은 이를 만나고, 화해하고 싶은 이에게 사과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내 안의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할까? 꼭꼭 숨겨 놨던 어린아이는 지금 어디에 갔을까? 또 다른 나와의 숨바꼭질이 오래 이어졌다면 구석에 웅크린 나를 찾아 어깨를 톡톡 두드려 보자. 퍼핏테라피는 상처 입은 자아를 햇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는 과정이다.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은 사람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형을 하나 건네고 싶다.

인형극연구소 인스
인형, 가면, 오브제를 창작에 적극 활용해 연극적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는 실험 창작 극단이다. 2011년 창단한 이후 춘천인형극제, 예술인형축제, 김천국제가족연극제, 서울 아시테지 겨울축제, 수원연극축제 등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본격 슬랩스틱 코믹 인형극 <빈대떡 신사>, 안톤 체호프의 단막 희극을 재해석한 <웃기는 청혼>, 카자흐스탄 유목민의 설화를 기반으로 세 동물의 모험을 그린 <세 친구>, 삶의 통찰과 유머를 노래하는 테이블 인형극 <고도를 기다리며> 등을 무대에 올렸다. 대표작으로 <어느 북소년의 여행> <내 친구 송아지> <으랏차차 순무가족의 커다란 순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