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신인 감독 류현경

2026년 02월 01일

배우 류현경이 영화감독이 되어 나타났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촬영했다는 <고백하지마>의 배경은 촬영을 마친 영화 뒤풀이 현장, 등장인물은 배우와 스태프다. 따라서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데, 류현경은 영화 안팎에서 감독과 배우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보통의 배우, 배우 이야기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입김이 10미터 너머까지 닿을 것처럼 찡한 날, 류현경 감독이 매니저나 스태프 없이 홀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발목까지 오는 긴 패딩 코트 차림에 손에는 그가 좋아하는 DVD를 들고 있었다. “혼자 왔나요?”라는 물음에 “네” 하고 답하고는 “저 말고 다른 배우들도 촬영 없을 때는 대부분 혼자 다녀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말과 말 사이에 ‘매우 주목받는 몇몇을 제외하고’라는 뜻의 괄호가 생략돼 있는 듯했다. 보통의 배우 류현경이 영화감독이 되어 처음 꺼낸 이야기도 ‘배우’에 관한 것이다.
류현경 감독의 장편 데뷔작 <고백하지마>는 놀이하듯 시작된 영화다. 김오키 감독의 영화 <하나, 둘, 셋 러브> 촬영 마지막 날, 대여한 장비를 그대로 반납하기 아쉬웠던 배우들은 ‘뭐라도 찍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음향 감독은 촬영장을 떠났고, 시나리오는 없었다. 카메라와 함께 휴대폰 녹음 기능을 켰고, 갑자기 김충길 배우가 류현경 배우에게 고백을 했다. 이미 여러 영화에서 김충길 배우가 고백하는 신을 연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류현경 배우가 즉흥으로 연기를 받으며 첫 신을 완성했다. 첫 신을 찍고 나니 다음 신이 찍고 싶어졌다. 류현경 배우가 감독이 되어 이끌었고, 상황이 재미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 의견을 냈다.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보자’ ‘화내는 장면을 찍자’ 등등 상황이 조금씩 확장됐다. 그때까지 누구도 그날 촬영한 장면이 영화로 만들어질 줄 몰랐다. 류현경 배우는 촬영한 장면을 보면서 추가 촬영해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김오키 감독과 촬영 감독을 만나 상의했고, 부산 촬영을 감행했다. 화면 구성과 이야기 흐름을 설계했지만, 여전히 정해진 시나리오는 없었다.

시나리오 없는 영화, 편집의 예술
<고백하지마> GV에 참석한 윤가은 감독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영화’라며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는 사람이 미래로 간다’고 극찬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상황만 설정해 즉흥적으로 촬영한 새로운 제작 방식을 두고 한 얘기다. 영화는 2024년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부문,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와 남도영화제 시즌2 광양에 초청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익숙하지 않은 영화 문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에디터는 인터뷰를 영화로 만든다는 가정하에 녹음기에 담긴 인터뷰 하나를 꺼내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시간은 편집했지만 독백으로 처리해야 할 대사가 많았다. 영화 <고백하지마>에는 독백이 거의 없다. 여백은 독백으로 채워야 인터뷰가 완성되는데, <고백하지마>의 여백은 여운이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영화는 현실을 잘라서 새로운 시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과거·현재·미래를 압축하거나 확장하고, 각각 떨어져 있는 시간을 결합해 한 장면만으로는 생기지 않는 의미와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를 ‘편집의 예술’이라 부른다. 류현경 감독의 장편 데뷔작 <고백하지마>는 이러한 편집의 정점에 있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연기, 연출, 편집은 물론 영화사를 차려 직접 배급까지 하는 류현경 감독에게 영화 이면의 이야기를 물었다.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한 영화예요. 관객에게 닿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요. 전반부는 즉흥적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재미있어 조금씩 확장하며 만든 장면이고, 후반부는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어 화면 구성과 흐름을 설계해 만든 장면이에요. 전반부는 ‘갈등 상황을 만들자’ ‘화를 내며 싸워 보자’ 같은 상황 설정을 했다면, 후반부는 정해진 대사가 없지만 어떤 분위기의 대사를 해야 할지 배우들에게 설명했어요. 그런데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하면서도 장편영화가 될 줄은 몰랐어요.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받고 나서 ‘극장에서 상영해도 되는 영화구나’라고 생각했죠. 영화제 이후 온라인 스트리밍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주의라 거절했어요. 그런데 독립 영화를 극장에서 개봉하려면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더라고요. 결국 배급사 찾기에 실패했고, 직접 ‘류네’라는 1인 영화사를 차려 배급까지 하게 됐어요.

영화 제작 방식만큼 상영 방식도 다양해졌는데 극장 상영을 고집한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으로 극장을 좋아해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스크린이 걸린 한 방향으로 모여 앉아서 같은 시간에 같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그렇게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저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꼭 극장에 가요. 독립 영화도 자주 보는데, 이번 영화 개봉을 위해 좋아하는 극장에 찾아가 인사하면서 포스터를 드리니 상영해 준다는 곳이 여럿 있었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오랫동안 영화 일을 했지만 <고백하지마>는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영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관객과 만나는지 대략의 프로세스는 알고 있었지만, 제가 직접 그 과정을 겪은 건 처음이에요. 극장 관계자들과 소통하며 한 단계씩 나아갈 때마다 몸은 정말 힘들었는데 마음이 설레기도 했어요. 시나리오 없이 설정이 계속 바뀌는 영화라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고요. 제가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이어지면 살짝 끼어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그런 과정이 화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업 방식이고, 함께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정말 감사해요. 촬영은 즐겁게, 하지만 후반 작업은 고통스러웠죠.

어떤 고통이 뒤따랐나요?
영화로 만들 생각 없이 전반부를 찍었고, 현장에 음향 감독님이 없었어요. 아이폰으로 녹음했는데, 작업하다 보니 사운드 맞추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편집을 도와준 친구가 있지만 전체 편집은 제가 맡아서 했거든요. 예산도 넉넉지 않아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작업을 공부해 가면서 하느라 후반 작업이 8개월 정도 걸렸어요. 편집하면서 추가하고 싶은 장면이나 기술적으로 아쉬운 장면도 있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장편으로 기획한 영화가 아니었으니 대본 없는 영화의 한계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감독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잖아요.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처음에는 그냥 귀여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보니 ‘우연의 연속이 운명이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운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충길이 현경에게 고백하고, 두 사람 모두 안 좋은 일들을 겪은 후 3개월 뒤에 우연히 다시 만나요. 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같은 티셔츠를 커플 룩처럼 입고 있거든요.

감독과 배우의 경계가 없는, 모두가 감독이자 배우인 영화처럼 느껴졌어요. 시나리오 없이 상황만 주어진 영화에 배우로 출연해 본 적이 있나요?
감독님이 시나리오에 없는 신을 추가했는데, 의외로 신나게 촬영한 적이 있어요. 영화는 감독의 의도나 현장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작업하되 즉흥적으로 추가하는 장면이 있고, 정해진 시나리오에서 토씨 하나 벗어나지 않는 영화도 있죠. 최근에 윤가은 감독님이 고아성 배우와 함께 <극장의 시간들>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는데, 배우에게 대사 두 줄을 주셨대요. 10대 초반에 배우를 시작한 저는 늘 ‘영화는 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영화의 부품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감독님들을 만난 덕분에 그런 인식이 몸에 배어든 것 같아요.

대학교에서 연기가 아닌 연출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감독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중학생 때 처음으로 단편영화 <불협화음>의 시나리오를 썼고 연기도 했어요. EBS에서 방송되기도 했고요. 시나리오, 연기, 연출, 촬영, 편집 등 경계 없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졸업 후에는 뮤직비디오 몇 편 연출한 것을 제외하곤 연기만 했어요. 배우가 연기 외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에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고, 무엇보다 저 스스로 연기에 대한 열망이 컸기에 먼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자고 생각했죠.

올해로 데뷔 30주년이에요. 영화를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제대로 답을 못 해요. 멋진 답변을 준비해야 하는데 사실 ‘신나서’라고밖에 답하지 못해요. 촬영장에 가는 것도 신나고, 집에서 DVD를 보거나 극장에 가는 것도 신나요. 어떤 영화는 감정이입을 해 푹 빠져서 보고, 어떤 영화는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걸 감상하기도 해요. 영화를 통해 공감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것도 너무 신나는 일이에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잖아요. 실제 나의 모습과 캐릭터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는 없나요?
제가 연기한 캐릭터는 모두 제 안에 있는 모습이 투영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물론 배우마다 연기 스타일이 달라서 캐릭터와 자신을 분리해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저는 제 안에서 캐릭터에 맞는 얼굴을 꺼내 극대화하는 연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와 저와의 괴리감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모두 저의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막 영화감독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됐어요. 다음 영화도 궁금해요.
우선 제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할 예정이에요. 제작사에서 투자를 받고 있는 중이고요. 이번에는 기존의 영화 문법에 보다 가까운 영화가 될 거예요. 그리고 시나리오 없는 영화 두 편을 기획하고 있어요. 그중 한 작품은 곽튜브와 함께 찍기로 했어요. 유튜브를 하고 싶은 배우와 연기를 하고 싶은 유튜버가 함께하는 여정이 영화에 담길 거예요. 또 트리트먼트식으로 써 놓은 이야기가 있는데, 동료 배우들과 함께 배우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물론 영화와 드라마도 촬영 중이어서 배우 류현경의 모습도 보여 드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