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과 현지인의 중간에 위치한, 한국에서 오래 산 외국인들은 어디에서 향수를 달래고 추억을 쌓을까? 서울을 여전히 낯선 눈으로 경험하는 이들에게 ‘단골’이란 단어의 뜻을 소상히 알려 준 후, 그 의미에 가장 가까운 공간을 물었다.
엠마의 작업실, 이리카페
엠마 주노 스파크스, 한국살이 15년 차, 콘텐츠 에디터

상수동 이리카페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온 문장. “매일 낮과 밤, 이리카페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낮에는 조용히 홀로 작업하는 분들이 많고, 밤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이 많죠. 낮에는 멜로디 위주의 노래가 흐르고, 밤에는 그루브 위주의 노래가 흘러요. 그렇게 이리는 21년 동안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2014년부터 한 번도 서울 상수동을 떠난 적 없는 순정 마포 구민, 엠마 주노 스파크스가 이리카페를 단골집으로 꼽은 까닭도 이와 같다. “이리카페를 처음 알게 된 건 일러스트레이터 ‘무나씨’와의 인터뷰 때였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 공간으로 여기를 추천했거든요. 안으로 들어섰을 때 제가 열광하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예술·건축·디자인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과 저마다 자기 작업에 열중하는 사람들 모습에 마음을 뺏겼죠.”
영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2010년 처음 한국에 온 엠마에게 이리카페는 많은 것을 내줬다. “서울에서 살기로 결심한 후 한국어 공부가 급선무였어요. 이 책장 앞에 앉아 한국어를 공부하고, 마음이 적적할 땐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영어 교사에서 기자로 직업을 바꿀 때, 그 밖에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서 무수한 시간을 보냈죠. 말하고 보니 이리카페는 제가 실험적인 도전을 꽤 즐기는 사람이란 걸 알게 해 준 곳이네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3길 27


엠마의 단골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저는 이곳을 ‘한국의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장인들이 만든 수준 높은 공예 예술품에서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거든요. 무료입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주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아주 과소평가된 박물관이에요. 제가 가톨릭 역사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지만 건축미, 미디어 아트 등의 수준이 정말 높습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마이클의 추억 보관소, 부원면옥
마이클 울린, 한국살이 13년 차, 셰프

자극 없이 은은한 육향과 메밀 면의 질감이 입안에 오래 머무는 평양냉면. 깊고 절제된 이 맛은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재료의 균형과 조합을 중시하는 외국인 셰프라면 더욱 매력을 느낀다. 서울 망원동에서 미국 가정식 레스토랑 ‘마이클 식당’을 운영하는 마이클 울린 셰프 역시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로 꼽는다. 그의 단골집은 남대문 ‘부원면옥’이다. “평양냉면 마니아인 제 입맛에 가장 잘 맞는 곳이 부원면옥이에요. 특히 국물이 좋아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이 있거든요.”
그에게 부원면옥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아내 김나무다. 연애 시절 이곳의 평양냉면을 맛본 그녀가 마이클을 데려갔고, 그날 이후 마이클이 더 자주 찾는 식당이 됐다. 이곳에서 마이클이 즐겨 찾는 메뉴는 평양냉면과 빈대떡, 닭무침이다.
“부원면옥은 아내와 함께 서로의 지인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추억이 쌓인 공간이에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아내와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에게 평양냉면과 부원면옥은 입맛보다 마음에 먼저 각인된 음식이며 장소다. 평양냉면 한 그릇에 연애 시절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따뜻한 순간이 저장되어 있다. 다시 찾을 때마다 그 맛은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불러낸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41-6

마이클의 단골 공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여전히 사진작가의 꿈을 품고 있는 저에게 이곳은 창작의 감각을 다시 깨우는 장소예요. 쉬는 날이면 아내와 들르기도 하고, 가끔은 혼자 오래 머물기도 해요.”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맛있는 칼국수
“따뜻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에요. 투박하지만 진한 육수, 탱글탱글한 면발, 넉넉한 양까지 제 취향에 딱 맞아요.”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불광천길 150
해미의 안식처, 라몽림
해미 클레멘세비츠, 한국살이 12년 차, 사운드 아티스트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의 사운드 아티스트 해미 클레멘세비츠는 ‘오늘은 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가장 먼저 라몽림을 떠올린다. “5년 전쯤 친구가 라몽림에 처음 데려갔는데 그 뒤로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마다 가요. 밖에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것 같은 아늑한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음식도 가정집에서 먹는 것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맛있습니다.”
라몽림의 메뉴는 바질페스토쇠고기, 새우크림커리, 볼로네제치즈밥, 버섯크림리소토, 쇠고기고추잡채, 굴라시 등 다양하고 특색 있다.
10여 년간 홍대 인근에서 카페 겸 술집을 운영한 주인장의 솜씨로 속이 든든하고 개성 넘치는 음식을 선보인다. 홍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음악가들의 참새 방앗간 같은 곳이었던 라몽림은 자리를 옮긴 지금도 음악가들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된다. 인디 밴드 브로콜리너마저, 가수 하림 등이 공연 뒤풀이나 식사를 위해 이곳을 찾곤 한다.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 몰랐어요. 그저 라몽림의 분위기와 음식을 즐기고 나서면 마음이 가라앉고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거든요. 알고 보니 음악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네요. 어쩌면 그게 저를 끌어당긴 이유였나 봐요.” 라몽림은 2015년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인스타그램에 오픈 시간을 공지한다. 어떤 날은 오후 5시, 어떤 날은 오후 7시에 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주인 마음이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13


해미의 단골 공간
을밀대 평양냉면
“면을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로 꼽는 저에게 평양냉면은 소울 푸드입니다.
을밀대 평양냉면은 상수동이나 합정동 등 마포구에서만 살았던 제가
평양냉면을 먹고 싶을 때마다 가장 자주 찾는 곳이에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숭문길 24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실험적이고 영감 가득한 공연과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만큼이나 광주에 자주 머뭅니다.”
주소 광주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나리카와의 고향의 맛, 쯔루하시 후게츠
나리카와 아야, 한국살이 8년 차, 영화 칼럼니스트 & 작가

웃기고 호쾌한 오사카 사람들이 까다롭게 구는 분야가 있다. 바로 미식. 일본의 부엌으로 불리는 맛의 고장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합격점을 받으려면 훌륭한 식재료는 기본이고 저렴한 가격과 유머 감각, 활기찬 분위기까지 갖춰야 한다. 나리카와 아야의 고향도 오사카. 그의 한국 단골집이 궁금해진 순간, 쯔루하시 후게츠가 바로 튀어나왔다. 명동에 있는 쯔루하시 후게츠에서 나리카와가 주문한 메뉴는 정통 오코노미야키와 야키소바, 그리고 숙주나물말이. 그는 양배추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선 양배추를 아낌없이 써요. 다른 집들은 밀가루를 많이 쓰는데 그러면 식감이 거칠거든요. 얇게 저미듯 채 썬 양배추를 얼기설기 쌓아 뚜껑을 덮는 대신 철판의 열기만으로 속까지 부드럽게 익히는 조리법이 오사카 본토 맛의 비결이죠. 합리적인 가격도 빼놓을 수 없고요.”
9년간 <아사히 신문>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17년, 한국 영화를 공부하려고 한국에 정착한 그는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마친 영화인이다.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 <재미있는 색이름 탄생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며 일본에 한국 영화와 문화를 전파하고 있는 그는 가까운 미래에 그 반대의 일을 펼칠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 일본 영화를 소개하고 독립 영화도 상영하는 북 카페를 열고 싶어요.” 나리카와는 그곳이 자신의 진짜 단골집이자 한국인들의 단골집이 될 날을 꿈꾸고 있다.
주소 서울시 중구 명동8길 21-5


나리카와의 단골 공간
동아리 정동본점
“스키야키, 호르몬나베, 우나기동 등을 파는 이자카야예요. 가격이 조금 비싸 자주 가진 못하고 특파원이나 선배님이 한턱낸다고 할 때 모시고 가는 곳입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길 12-6
텟판타마고
“홍대에 사는 일본인 기자 친구가 자기 단골집이라고 데려가서 알게 된 곳이에요. 야키소바에 대창을 넣어 조리한 대창 야키소바가 인상 깊었죠. 일본에선 못 먹어 본 일본 음식이거든요. 명란젓구이도 좋아하고요.”
주소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6길 3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