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만드는 공간과 사람, 일곱 가지 이야기
전주의 산책지


건지산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
전주 승암산이 산행지라면 건지산은 산책지다. 길이 많고 고도는 낮아 생각을 덜어 내며 한가롭게 걷기에 더없이 좋다. 전주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산책이나 소풍, 삼림욕을 즐긴다. 사방으로 입구가 뚫려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건지산 오송제 주변은 최고의 산책로로 꼽힌다. 덕진공원 북서쪽에 있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뒤편과 맞닿은 입구로 진입하면 편백나무 숲이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다. 깊은 산속에서나 마주할 만한 풍경을 초입부터 만나게 된다. 장대비처럼 쭉쭉 뻗은 나무 아래에는 벤치와 평상이 꽤 많이 놓여 있어 가족, 친구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좋다. 편백나무 향에 몸과 마음을 충분히 적셨다면 오송제 주변을 걸어 볼 것. 정자와 능수버들, 꽃창포, 부처꽃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생태 저수지다. 좀 더 걸을 여유가 있다면 ‘건지산숲속작은도서관’도 놓치지 말자. 편백나무 숲에 자리한 소박한 나무 집에 들어선 공립 도서관으로 산장 같은 분위기에 발길이 절로 옮겨진다. 숲, 자연과 관련된 책 2800여 권을 알차게 갖췄다. 통유리창 앞 책상에 앉아 책 한 번, 나무 한 번 번갈아 보다 보면 숲이 내가 되고 내가 숲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주소 전북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로 40(건지산숲속작은도서관)
문의 063-714-2812
전주의 유적지


2 <조선왕조실록>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주사고.

경기전
조선의 긴 역사를 품은
조선을 건립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을 그린 초상화)을 모신 곳. ‘경기’는 조선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이다. 1410년에 지었다가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재건립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보통 유적은 관광이나 견학을 위한 일회성 방문지이지만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한 경기전은 지역민이 즐겨 찾는 산책로이자 나들이 장소다. 경기전에 처음 방문한다면 <조선왕조실록> 784권 614책 47궤와 기타 전적 64종 556책 15궤가 격랑의 5세기 동안 손상 한 점 없이 봉안된 전주사고도 놓치지 말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도서관 같은 곳이 나오고 그 안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순간을 생생하게 기록한 예조판서 정인지의 서문을 비롯해, 놀랍도록 정교한 실록 편찬 과정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 어진 제작 방식과 의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어진박물관, 제례 음식과 기물을 만들고 보관하는 어정, 제기고 같은 부속 공간이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 대부분의 옛집이 기꺼이 툇마루를 내주어 잠시 앉아 쉬어 가기에도 그만이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문의 063-381-2788
전주의 술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 노매딕 비어템플
로컬의 맛과 정취를 담다
수제 맥주를 빚는 양조장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는 전주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다. 양조사 존 개럿(이하 조니)과 그의 아내 한나가 2013년부터 공간을 준비하고 선보였다. 미국 미시건 출신의 브루어 조니는 미국 시카고와 독일 뮌헨의 월드 브루잉 아카데미에서 양조법을 배우고 미국의 크래프트 브루어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전주에 돌아와서 ‘노매딕’의 여정을 시작했다. 맥주는 ‘인식의 문을 열어 주는 신성한 액체’, 펍은 로컬이 함께 어우러지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기는, 고유한 철학과 신념으로 빚는 조니의 맥주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맛부터 미각 모험을 좋아하는 맥주 애호가를 자극하는 독창적인 풍미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추고 있다.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 지역의 딸기, 꿀, 쌀 등을 사용하고 전주 향토 음식의 어울림까지 고려하는 조니의 섬세함 덕분에 연령 불문하고 로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웨리단길에는 양조장인 ‘노매딕 브루잉’과 1947년에 지은 건축물의 결을 고스란히 살려 안을 꾸민 ‘노매딕 비어템플’이, 한옥마을엔 고즈넉한 마당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노매딕 비어가든’이 있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3길 12-10(노매딕 브루잉 컴퍼니), 전라감영4길 13-16(노매딕 비어템플)
문의 0507-1373-3924(노매딕 브루잉 컴퍼니), 0507-1368-3924(노매딕 비어템플)
interview

존 개럿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 양조사
전주에서 살기로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맛을 탐구하는 데 늘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아시아를 경험하고 싶은 꿈도 있었고요.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인 전주는 그 여정을 시작하기에 완벽한 곳이었죠.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를 시작한 계기는요? 저는 늘 양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며 번 돈으로 독일과 미국의 양조 학교에서 유학을 했어요. 이후 북미의 양조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전주로 돌아왔고요. 내가 전주를 정말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어쩌면 이 도시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고요. 당신이 매료된 전주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전주는 제가 살아 본 지역 중 가장 걷기 좋은 도시예요. 독립 브랜드 상점, 카페, 식당이 많아 지역민에게도 지루하지 않죠. 필요한 것이 전부 도보 10분 거리 내에 있고, 언제나 흥미로운 예술 전시가 열리며, 도심 언덕 끝자락에서 대자연으로 곧장 연결된다는 점도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요. 한마디로 늘 새롭고,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살 수 있는 도시입니다.
전주의 커피


하우스먼트
깊고 진한 쉼이 필요할 때
구시가지가 거주자와 관광객이 두서없이 섞이는 동네라면 완산구 서부 권역에 속하는 신시가지, 효자동과 서신동 일대는 로컬들의 직장과 집이 자리한 동네다. 2022년 9월 효자동3가에 들어선 카페 하우스먼트는 신시가지 일대에서 일하는 회사원들이 프랜차이즈 커피 말고 직접 로스팅해 정성스럽게 내린 스페셜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즐겨 찾는 곳이다.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우스먼트’라 이름 짓고, 나무를 마주할 수 있는 2층은 전면에 시원하게 창을 냈다. 그 덕에 로컬 사이에선 ‘눈에 아름다운 것을 담고 싶을 때 갈 만한 곳’으로 입소문이 났다. 바리스타들의 몸짓과 표정이 무대 위 공연처럼 펼쳐지는 개방형 커피 바, 옆 사람의 움직임이나 소리가 별로 거슬리지 않는 여유로운 테이블 간격, 귀가 편안한 음악은 로스터이자 이곳을 운영하는 박종대 대표의 섬세한 배려와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풍미와 개성을 갖춘 다양한 산지의 원두를 직접 로스팅해 소개하며 케이크와 구움과자도 이곳에서 구워 낸다. 지난 9월에는 혁신도시 일대로 불리는 중동에 ‘하우스먼트 인어로우’ 지점을 새롭게 열었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마전들로 67
문의 0507-1392-5951
전주의 맛


2 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이곳에서 제안하는 ‘먹는 법’을 따른다.


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 하숙영가마솥비빔밥
진짜 맛집은 쌀밥부터 맛있다
전주식 콩나물국밥은 뚝배기째 팔팔 끓인 직화식과 육수의 깔끔하고 개운한 맛, 콩나물의 아삭한 식감을 살린 토렴식이 있는데 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은 후자다. 반찬과 국밥이 나오면 가장 먼저 쇠 그릇에 중탕한 수란에 김과 국물을 서너 수저 넣고 잘 섞어서 따로 먹으라고 안내한다. 수란을 국밥에 넣지 말고 콩나물을 건져 수란에 적셔 먹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정직하게 끓여 낸 담백 칼칼한 육수에 자신 있기 때문이다. 한약재와 조청, 계피, 생강 등을 넣고 달짝지근하게 발효시킨 탕주인 ‘모주’를 곁들이면 맛의 균형이 완벽해진다. 하숙영가마솥비빔밥은 갓 지은 솥밥과 놋그릇에 콩나물, 황포묵, 소고기 육회, 접장, 버섯 등 정통 전주식 비빔밥 고명을 담아 열네 가지 반찬과 함께 낸다. ‘특허받은 반찬’ ‘직접 담근 장’ 같은 소개 문구와 사진을 식당 곳곳에 배치한 이곳에선 식사 메뉴로 가마솥비빔밥과 가마솥육회비빔밥만 판다. 직원이 직접 비벼 주는 퍼포먼스는 가게가 붐비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타이밍에 진행되는데, 그냥 비벼 주는 것이 아니라 청양장(청양고추를 으깨 만든 양념장)을 취향대로 밥 위에 얹고 매콤 칼칼한 맛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문길 88(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전라감영5길 19-3(하숙영가마솥비빔밥)
문의 063-287-6980(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063-285-4288(하숙영가마솥비빔밥)
전주의 예술 공간


팔복예술공장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문화 예술 공간
폐공장을 개조해 문화 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그 공간을 찾아가고 싶게 만드는 건 ‘어떻게 근사하게 바뀌었나’가 아니라 ‘그 공간이 다시 볼 수 없었던 옛 서사를 제대로 재현했나, 새로운 사건(전시와 행사)이 계속해서 일어나는가’다. 전주 시가지에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에 자리한 팔복예술공장은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건축가 황순우는 1979년부터 카세트테이프를 만드는 쏘렉스의 공장으로 운영하다가 이후 25년 동안 폐공장으로 방치되었던 이곳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약 1년 동안 설계도를 그리는 대신 팔복동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기억을 수집하고, 예술가들과 함께 공간의 새로운 밑그림을 그렸다. 2017년 10월에 개관한 이곳은 전시뿐 아니라 창작, 공연, 교육을 아우르는 플랫폼이다. 폐산업 공장의 잔존물을 예술 재료로 전환해 도시의 기억을 재구성한 , 앤디 워홀의 작품과 미디어 아티스트의 협업 전시인 , 그라피티와 전통적 조형 언어를 결합해 한국 미감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한 <전통+현대: 숨바꼭질>, 팔복동 산업 지대의 재생 과정을 여덟 가지 시각예술 장면으로 해석한 <팔복팔경> 등 흥미로운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주소 전북 전주시 덕진구 구렛들1길 46
문의 063-211-0288
전주의 서점



2 2층에선 출판사와 함께 문학 전시를 연다.
물결서사
도시의 이야기를 짓는 책방
책방 물결서사의 안쪽 복도 벽에는 공간과 도시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처럼 흐른다. 2018년 겨울, 물결서사의 탄생. 12월 22일 동짓날, 이방인 7명이 선미촌 골목에 책방 문을 열었다. 물이 좋은 동네라는 의미를 지닌 ‘물왕멀’ (옛) 지명에서 물결을, 옛 서점이자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의 서사를 합쳐 물결서사라 이름 지었다. 선미촌은 1950년대에 성매매 업소가 모인 옛 전주역 주변 동네였다. 2014년 전주시가 ‘서노송예술촌 문화 재생 사업’으로 업소가 들어섰던 건물들을 사들여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물결서사는 그중 네 번째로 사들인 건물에 들어섰다. 이후 7년 동안 물결서사는 흥미로운 서사를 써 왔다. 선미촌의 마지막 남은 업소가 문을 닫았고 김영하, 김애란, 오은, 안희연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이 책방에서 시와 소설로 꽉 찬 시간을 만들었다. 지금도 시인이자 책방 주인 임주아가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 수필가, 배우 등 분야를 막론한 예술인들과 함께 이 공간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1층 서점 공간에서 책을 구매하면 2층의 안락한 다락방 한구석에서 책과 나만의 순간을 비밀스럽게 누릴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출판사와 함께 문학을 주제로 전시도 열고 있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물왕멀2길 9-6
문의 @mull296
interview

임주아 물결서사 대표
2019년부터 서점 물결서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서점을 통해 문학과 예술 콘텐츠를 만들고 글을 쓰는 저와 ‘책의 도시’를 지향하는 전주는 합이 좋다고 할 수 있죠. 전주는 ‘책이 삶이 되는 도시’를 지역의 비전으로 제시한 만큼 제도와 지원이 탄탄하거든요. 전주시립도서관에서 발급하는 도서관 회원증이 있으면 협약을 맺은 지역 서점에서 20퍼센트 할인받아 책을 구매하는 전주 책사랑포인트 ‘책쿵20’ 같은 제도를 예로 들을 수 있어요. 전주는 독립 서점 생태계가 탄탄한가요? 현재 독립 서점이 12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참고로 업계에서는 전주가 독립 서점이 잘 망하지 않는, 오래 유지되는 지역으로 소문이 자자해요. 올해로 3년째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는 독립 출판 북 페어 ‘전주책쾌’도 지난
6월 성황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독서 애호가에게 권할 만한 전주의 명소를 추천해 주세요. 덕진공원 안에 있는 연화정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보세요. 연꽃이 피는 계절에는 꽃으로 뒤덮인 호수 위에 둥둥 떠서 독서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완판본문화관’을 참 좋아해요. 전주에서 출판된 도서 유산을 보전하며 옛 기록과 인쇄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홍길동전> <춘향전> 같은 고전 원본을 전시하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