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여성들의 강력한 케미, 워맨스

2025년 12월 01일

  • writer 정수진(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로맨스와 브로맨스는 가라. 지금은 누가 뭐래도 워맨스 시대다. 남녀 간의 사랑처럼 뜨겁거나 남성들의 우정처럼 피 튀진 않아도,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은근하고 힘이 센 워맨스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이고,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여전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구태의연한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에서 강력한 키워드는 워맨스(woman+romance)다. 남성들의 우정을 다룬 브로맨스(bromance)의 여성 버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 결은 사뭇 다르다. 브로맨스가 영화 <친구>의 명대사 “아이다,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처럼 간결하게 압축되는 반면,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담은 워맨스는 한층 복잡다단하고 미묘해 음미하며 곱씹는 맛이 있다.

여성 서사물의 진화
대중문화에서 여성 서사물이 보편화되면서 워맨스 또한 주요 서사로 등장했다. 여성 원톱도 좋지만 투톱, 스리톱 등 여러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스토리가 더욱 풍성해지고 상호 보완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인상적이었던 드라마를 훑어봐도 ‘남녀 케미’보다 돋보인 ‘여여 케미’, ‘여여여 케미’ 작품이 많다. 일과 사랑 모두에서 주체적인 세 명의 여성을 내세워 한국 여성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가 방영된 게 2019년. <멜로가 체질>(2019)은 주인공의 연애 묘사 이상으로 주인공과 함께 사는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중했고, <마인>(2021)은 주로 경쟁 구도를 이뤘던 동서지간이나 생모-양모 관계 속 여성들의 연대를 그리며 막장 재벌 드라마의 클리셰를 깨부숴 통쾌함을 안겼다. 술 좋아하는 여자 셋을 주인공으로 삼은 <술꾼도시여자들>(2021)은 방영 당시 티빙 역대 유료 가입 기여자 수 1위를 차지하고 시즌 2까지 제작되는 기염을 토했다.
워맨스의 기세는 2022년 들어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손예진-전미도-김지현을 내세워 마흔을 앞둔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서른, 아홉>을 시작으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엄마들의 미묘한 관계에서 우정을 포착한 <그린마더스클럽>, 청소 일을 하며 인생 상한가를 노리는 미화원 언니들을 보여 준 <클리닝 업>, 친자매는 물론 회사에서 자매처럼 지내던 이와의 연대를 그린 <작은 아씨들>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뿐인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선 나희도와 고유림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달팠고, <더 글로리>에서 ‘사모님’ 문동은과 ‘이모님’ 강현남이 보여 준 피해자들의 연대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웠다. 한번 물꼬를 튼 흐름은 더 큰 물줄기를 형성하기 마련. 2023년, 2024년에도 <퀸메이커> <굿파트너> <정년이> 등 경쟁을 넘어 연대를 꾀하는 워맨스가 계속됐다.

판을 넓히며 확장 중인 여성들의 연대
최근 워맨스는 더 넓은 관계성과 더 깊은 감정선을 추구하며 장르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일찌감치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은 <미지의 서울>을 보자. 쌍둥이지만 서로를 잘 몰랐던 자매 유미지, 유미래가 서로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큰 줄기로 삼았다. 여기에 미지, 미래의 엄마 김옥희와 옥희의 동창이자 의붓아들 수호를 키우는 염분홍의 관계를 더하고, 수십 년간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온 김로사와 현상월의 관계를 미스터리처럼 배치해 오랜 시간 믿어 주고 기다려 주는 우정을 후반부에 진한 여운으로 폭발시켰다. 대놓고 ‘코믹 워맨스 활극’을 표방한 <살롱 드 홈즈>도 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는 네 명의 여성이 뭉쳐 아파트 빌런을 응징한다는 내용으로, 코믹한 터치로 접근하되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며 상처를 보듬는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한국을 강타한 에로 영화의 탄생기를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으로 엮어 낸 <애마>의 상상력은 발칙했고, 두 여성이 10대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촘촘히 직조해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음에도 격렬한 감정의 파고를 일으킨 <은중과 상연>은 놀라웠다. 이 중 <은중과 상연>은 그간 다소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던 여성들의 우정의 다층적 면모를 부각해 찬사를 받았다.
1980년대 버스 안내양들이 서로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시대물 <백번의 추억>과 무난한 인생을 코인 투자로 탈출해 보자는 현실 풍자 코미디 <달까지 가자>에 이어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두 친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범죄물 <당신이 죽였다>까지 나왔다. <당신이 죽였다>는 끝을 모르는 가정 폭력에 목숨을 걸고 연대하는 은수와 희수의 이야기를 담은 범죄물인데, 흥미로운 건 12월 5일 공개하는 <자백의 대가>와 개봉 대기 중인 영화 <프로젝트 Y>처럼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가 범죄와 스릴러물에서 꽃피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왕자와 신데렐라의 일방적 구원 관계가 아닌,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대중의 마음을 홀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외에도 40대 여성들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다음생은 없으니까>가 방영 중이며, 내년에는 여성 변호사들을 내세운 <아너>와 <굿파트너> 시즌 2가 나올 예정이다.

워맨스가 통하는 이유
대중문화 트렌드가 워맨스를 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먼저 여성들이 달라졌다. 여성의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20세기에는 로맨스를 통해 여성의 구원과 성장이 이뤄진 반면 지금의 여성은 자신의 힘으로 어디든 나아가려 한다. 그러한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다 보니 여성 서사물과 더불어 워맨스 작품이 많아진 것이다. 낡은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에 상큼하게 한 방 날리는 작품에 지금의 대중은 환호한다. 오죽하면 경쟁을 넘어 증오하는 사이였던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의 하니와 나애리가 2025년 40주년 극장판에선 워맨스를 쌓는 시대가 됐다니까. 시대를 풍미한 관능의 대명사 킴 카다시안과 나오미 와츠, 글렌 클로즈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대신 함께 최고의 로펌을 만들어 가는 <올즈 페어: 여신의 재판>이 방영되는 시대란 말이다.
연애가 더 이상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않는 것도 한몫한다. 최근 영국판 <보그>에 ‘남자 친구가 있는 게 창피한 일인가?’란 도발적인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그만큼 여성들의 연애관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연애가 아니어도 삶이 충만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며, 로맨스보다 오래갈 수 있는 연대의 관계성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워맨스 붐의 이유로 꼽힌다.
워맨스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켰다. 생활물부터 장르물까지 다양한 변주가 시작된 상황이라 이야기만 담보된다면 확장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기다린다. 식상한 백마 탄 왕자나 재벌 후계자 말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신선하고 도발적인 언니들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