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랄이 풍부한 땅, 체계적인 매뉴얼, 철저한 관리 시스템에 의해 아산맑은쌀이 탄생했다. 너른 들판 위로 가을 햇살이 부서지던 어느 날, 수매가 한창인 충남 아산의 미곡종합처리장을 찾았다.

벼가 쌀이 되는 여정
가을 들녘에서 야무지게 익은 쌀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과연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칠까. 첫 번째 단계는 이물질 제거 작업. 조선기에 추수한 벼 이삭을 통째로 넣고 볏대와 먼지, 지푸라기 등을 분리한다. 그리고 풍력 선별기와 진동 선별기 등의 정선기를 이용해 더욱 세밀하게 불순물을 골라 낸다. 그런 다음 벼를 건조하는데, 알맞은 습도는 밥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습도가 15퍼센트 이하이면 쌀이 깨지고 16퍼센트 이상이면 쌀이 썩기 때문에 그 언저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일정한 쌀의 색이나 밀도를 기준으로 이물질과 덜 익은 벼를 걸러 낸 다음 왕겨를 벗겨 현미로 만든다. 현미에서 쌀겨층을 한 겹 더 벗겨 내면 백미가 된다. 이렇게 완성한 쌀은 포장 후 15도 이하로 온도를 유지하며 보관한다. 이렇게 농부에게 잘 영근 벼를 받아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쌀 생산의 전 과정을 담당하는 시설이 미곡종합처리장이다. 미곡종합처리장은 농협과 함께 고품질의 쌀을 생산하고 농가에 안정적인 판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수매 열기로 가득한 미곡종합처리장
추석 연휴를 앞둔 10월 초, 충남 아산시 둔포면의 미곡종합처리장을 찾았다. 연중 가장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현장은 활기찬 분위기였다. 농부들이 추수한 벼를 트럭 한가득 싣고 수매를 하러 미곡종합처리장에 도착했다. 쌀 품종마다 추수 시기가 달라 수매 기간도 제각각이다. 아산에서 가장 먼저 맑은 쌀알을 생산하는 품종은 조생종인 달맑은벼다. 이 품종은 쌀알이 맑고 투명한 색을 띠며, 단백질과 아밀로오스 함량이 낮아 밥이 차지고 부드럽다. 달맑은벼를 추수한 이후에는 익는 시기가 늦은 중만생종 해맑은벼를 수확한다. 마찬가지로 단백질과 아밀로오스 함량이 낮아 밥맛이 좋은 해맑은벼는 병풍해에 강하고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어촌 마을에 들어선 평야
1970년대, 정부의 대대적인 간척 사업으로 아산만과 서해로 배가 드나들던 포구 마을이 농촌으로 변신했다. 아산만 연안과 안성천, 삽교천 등의 하천 하구 지역에는 빗물에 의존해 농사짓는 논이 많았는데, 조수가 거슬러 올라와 염해가 발생하고 가뭄과 홍수로 피해가 잦았다. 1971년 이후 안정적인 농업 기반을 조성하고자 방조제 공사를 본격화하고 아산만 일대에서 간척과 개간 사업을 시작했다. 아산만 방조제, 삽교 방조제, 남양 방조제 등을 차례로 건설해 농업에 필요한 담수를 저장하고 갯벌을 메운 자리에는 농경지가 들어섰다. 아산만 일대가 벼농사 중심의 농경 지대로 변하며 2002년에는 아산의 대표 쌀 브랜드, 아산맑은쌀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아산쌀이 맛있다고 정평이 난 이유는 간척지의 미세한 점토질 토양 덕분이다. 간척지 토양은 처음에는 염분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염분이 빠지고 점토질로 변해 물 보유력이 높아진다. 벼가 좋아하는 물을 오래 머금는 땅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갯벌에서 비롯된 토양이라 미네랄이 풍부해 벼 생육에 유리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간척지 토양은 더욱 비옥해졌다. 하지만 염도 조절과 품종 선택이 까다로워 단순한 대량생산으로는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한 아산쌀만의 정체성을 갖춘, 차별화된 품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대한 고민이 아산맑은쌀이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동력이 됐다. 아산시농업기술센터는 2018년부터 농촌진흥청과 협력해 아산 지역 전용 벼 품종 개발과 시범 재배 사업을 추진했고, 2022년 아산맑은쌀 재배 단지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아산맑은쌀은 지역 맞춤형 벼 품종 개발 프로젝트의 범례인 셈이다.

아산쌀이 맛있는 진짜 이유
“어떤 품종을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식어도 맛있는 밥’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김정규 아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은 황금빛으로 물든 아산맑은쌀 재배 단지를 걸으며 아산 고유의 쌀 브랜드가 탄생한 때를 회상한다. 쌀 브랜딩 프로젝트의 실무 담당자였던 그는 아산맑은쌀의 명성을 만든 주역이다. 김 소장은 단백질 함량이 낮은 쌀로 지은 밥이 찰기와 윤기가 오래 유지된다는 점에 착안해 해맑은벼와 달맑은벼를 세상에 선보였다. 지역색을 살린 품종을 만든 다음 할 일은 재배 매뉴얼 만들기. 그는 치밀한 계획과 수정 과정을 거쳐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을 완성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모든 아산맑은쌀은 토양 관리부터 수확과 이양 시기까지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 재배한다.
“올해부터 영인농협과 둔포농협이 쌀조합공동사업법인을 설립하며 미곡종합처리장을 통합했습니다. 가장 큰 이점은 지역의 쌀을 중심으로 지역 농가가 결속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지난 1월 아산맑은쌀을 생산하는 영인농협과 둔포농협은 미곡종합처리장을 단일 시스템으로 재편하며 고품질 쌀 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결정은 김정규 소장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김 소장뿐 아니라 아산 농부들은 이번 통합을 통해 아산맑은쌀의 재배 면적을 확대하고 생산량을 늘려 궁극적으로는 농가의 소득 증대를 기대하고 있다.
김 소장은 아산맑은쌀이 맛있는 이유 중 하나로 미곡종합처리장의 철저한 관리 시스템을 꼽는다. 아산맑은쌀은 철저한 계약 재배 방식으로 생산한다. 농가가 임의로 품종을 선택해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농협이 종자 보급부터 수확 이후 추곡 수매까지 전 과정을 직접 관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품질이 균일하게 유지되고 생산·유통 과정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가장 이상적인 습도인 15~16퍼센트로 쌀을 건조하고 연중 15도 이하로 저장하는 것 등 꼼꼼한 관리 역시 아산맑은쌀을 지금의 명품으로 키워 낸 노하우다.
“누군가에게 아산쌀의 특장점을 물으면 대부분 갯벌에서 비롯된 토양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일교차라고 생각해요. 벼가 잘 자라서 맛있는 쌀이 되는 데에는 일교차가 가장 중요합니다. 아산은 한국에서 쌀 맛이 가장 좋다는 경기도 이천만큼 주야간 온도 차가 큰 지역입니다.” 아산만 간척지가 서해와 맞닿아 있지만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바닷바람을 포용하면서도 열이 머물지 않는 지리적 요건 때문이다. 아산맑은쌀은 지역의 훌륭한 자연 조건과 사람의 정성으로 이루어 낸 아산 농업의 자부심이자 결실이다. 쌀 한 톨에도 진심을 담은 수많은 이의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의 식탁은 더욱 건강하고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