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해남·영암이 손을 잡고 남도 미식 여행을 제안한다. 이름하여 ‘강해영 프로젝트’. 다산 정약용이 사랑한 차와 푸짐한 시골 밥상, 지역 특산물로 만든 디저트까지, 남도의 특별한 맛을 찾아 나섰다.
남도의 부엌
강진
산과 바다, 강을 품은 덕분에 식재료가 풍성한 강진은 예부터 남도의 부엌이라 불렸다. 연중 싱싱한 먹거리가 넘쳐 나지만 곡식과 과일이 여무는 가을에는 남도의 식탁이 더욱 넉넉해진다. 식재료가 훌륭하니 내로라할 향토 음식도 많다. 강진 한정식, 강진 회춘탕, 민물장어구이, 짱뚱어탕, 병영 돼지불고기구이, 바지락 회무침, 마량 생선회, 강진 신전 개불, 강진 전통 된장, 옴천 토하젓 등 ‘강진10미’는 그중 제일이다. 식욕이 왕성해지는 이 계절, 자연이 차려 낸 식탁을 만나러 강진으로 향했다.

임금님처럼 한정식 한 상
강진에서 꼭 먹어야 할 첫 번째 음식은 한정식이다. 한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강진은 한양과 거리가 멀어 조선 시대 사대부나 왕족의 유배지 중 하나였다. 덩달아 유배를 따라온 수라간 궁녀가 강진에 머물며 궁중 음식 비법을 전수했는데, 전통 상차림과 풍부한 식재료가 더해져 지금의 한정식이 탄생했다. 덕분에 음식 하나하나 완성도가 높고 고급스러우며 차림새가 단아하다.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강진 한정식을 만나러 90년 전통의 ‘예향’을 찾았다. ‘호남관’에서 ‘명동식당’을 거쳐 4대째 손맛을 잇고 있는 한정식 명가다. ‘수라상’ 차림을 주문하니 깨죽을 시작으로 쇠고기 육회, 전복구이, 육전, 바지락 회무침, 보리굴비, 홍어회, 대하구이, 떡갈비, 표고버섯 탕수육까지 20여 가지 음식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느 식탁에서는 중앙을 차지할 법한 요리들이 마치 반찬처럼 상을 채우는 모습에 진짜 임금이 된 기분이다. 강진의 산해진미가 한 상에 차려지니 과연 수라상이 따로 없다. 인상적인 메뉴는 의외로 수수떡. 수수 가루로 만든 반죽을 얇게 부친 뒤 팥소를 넣고 반달 모양으로 접어 만든 수수떡은 쫄깃한 식감과 달콤하고 부드러운 팥의 조화가 일품이다.


다산이 사랑한 차와 정원
강진 여행은 다산 정약용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산은 유배지인 강진에서 무려 18년을 지내며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자그마치 50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유배지에서의 첫 거처인 사의재를 시작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오랜 동무인 혜장선사와 함께 거닐던 백련사 길까지, 강진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산이 한눈에 반해 시를 지었다는 백운동원림도 그중 한 곳이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의 백운동원림은 조선 중기의 처사 이담로가 지은 별서 정원이다. 한국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전남 담양의 소쇄원, 전남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다산은 이곳에 다녀간 후 ‘백운동 12경’이라는 시를 짓고 여기에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를 더해 <백운첩>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원히 잊힐 뻔한 200여 년 전 백운동원림을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백운첩> 덕분이다. 월출산의 뾰족한 옥판봉을 비롯해 동백나무 숲길과 100그루의 홍매화, 집 앞의 푸른 절벽, 시냇가의 단풍나무 등은 여전히 빼어난 모습으로 다산에게 그러했듯,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백운동원림을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월출산 아래 너른 차밭이 시선을 빼앗는다. 월출산 남쪽은 예부터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를 많이 재배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다산은 이곳의 차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다고 극찬했다. 월출산 녹차를 제대로 즐기고 싶어 백운차실로 걸음을 옮겼다. 백운차실은 찻집이자 이한영 차 문화원으로, 아늑한 차실과 함께 이한영 생가가 자리한다. 이한영은 다산에게 매년 차를 만들어 보내던 제자 이시헌의 후손이자 한국 최초의 차 브랜드 ‘백운옥판차’를 만든 이다. 다산이 즐겨 마신 떡차와 일제강점기에 한국 차의 정체성을 지킨 백운옥판차를 맛볼 수 있으니 놓치면 아쉬운 강진 명소다. 월출산 풍광이 액자처럼 담기는 창가 자리도 좋지만, 볕이 좋은 날이라면 차와 자연을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 ‘차 소풍’을 추천한다. 피크닉 바구니에 월산차와 다과, 다구, 온수가 담긴 보온병, 돗자리 등이 들어 있어 잔디밭이나 호젓한 숲으로 들고 나가 티타임을 즐기기 좋다.


산 한 입, 바다 한 모금
백운동원림과 월출산 차밭을 둘러보고 나니 금세 허기가 져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체력 보충에 제격인 회춘탕. 조선 시대부터 해산물과 육고기가 풍부한 강진의 보양 음식이며 강진10미 중 하나다. 강진 회춘탕은 16년 전 강진군수가 지역의 훌륭한 식재료로 전문가들과 함께 개발한 레시피에서 시작됐다. 당시 완성한 레시피를 식당 일곱 곳에 전달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암면에 자리한 ‘석문정’이다. 이곳에서는 커다란 냄비에 문어, 전복과 함께 유황 오리나 토종닭을 넣어 푹 끓인다. 육수는 가시오가피, 당귀, 헛개나무, 뽕나무 등 열두 가지 한약재로 만드는데, 별다른 양념을 넣지 않고 해산물과 약재로 국물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깊고 맑으면서 담백한 맛이 난다. 석문정 주인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회춘탕 먹으면 정말 회춘하나요?”이고, 이에 대한 답은 “일단 드셔 보세요”다. 실제로 광주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서 과학적 분석을 통해 회춘탕의 효능을 밝혔다. 회춘탕은 저칼로리, 저지방, 고단백 음식으로 불포화지방 함량이 높고 오메가 지방산이 함유돼 심혈관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식당 밖으로 나오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숨어드는 해를 따라 번지는 주홍빛 물결을 바라보며 이맘때 강진에서 꼭 가야 하는 강진만으로 향했다. 탐진강의 열린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강진만에는 너른 갯벌이 펼쳐지고, 먹이를 찾아 날아든 철새들의 하모니가 울려 퍼진다. 특히 가을이 무르익으면 황금빛 갈대가 너울너울 춤을 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진만의 생태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강진만생태공원에는 면적 약 66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갈대 군락지와 약 26제곱킬로미터의 청정 갯벌이 있다. 남해안 11개 하구의 평균보다 2배 많은 1131종의 생물이 서식하며,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수천 마리의 큰고니가 공원을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공원 초입에 자리한 어선 모양 전망대에 오르면 광활한 습지가 한눈에 담긴다. 습지 사이를 직접 걸어 봐도 좋다. 갯벌과 갈대숲 사이에 덱을 설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무성한 갈대숲 한가운데를 걸으며 향긋한 자연의 냄새를 맡고,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로 삐죽 고개를 내민 짱뚱어를 관찰했다. 단순한 산책을 넘어 자연의 일부인 ‘나’를 감각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제10회 강진만 춤추는 갈대축제
10월 25일부터 11월 2일까지, 9일간 전남 강진만생태공원 일원에서 갈대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10주년을 맞아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문화·생태 축제’를 주제로 더욱 다채롭고 풍성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전문 생태 해설사와 함께하는 갈대밭 생태 탐험대, 생태 환경 축제를 콘셉트로 한 업사이클링 등 흥미로운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해 베트남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베트남인의 날 in 강진’도 펼쳐진다.
땅끝에서 만난 식탁
해남
남도에 이르러서도 한참, 유려한 산맥과 황금빛 논밭을 내달린 끝에 이윽고 바다가 펼쳐진다. ‘바람도 맛있다’는 해남은 꼭 맛봐야 할 향토 음식이 다양해 하루 세 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논밭에서 나는 풍부한 농산물에 더해 진도와 완도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해산물까지 풍요로운 밥상을 마주하니 어딜 가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다채로운 먹거리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된다면 ‘해남8미’를 기억하길. 최근 해남군이 지역의 정체성과 특산물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 여덟 가지를 선정했다. 해남의 대표 음식인 닭 코스 요리와 보리쌈밥부터 삼치회, 황칠 요리, 한우, 해남 밥상, 갯장어, 고구마 디저트까지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배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시간
한반도의 마지막 마을, 해남에 다다르자 뜨거운 볕에 무언가 익어 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주변을 둘러보니 고즈넉한 사찰의 나무가, 금빛 윤슬을 품은 너른 바다가, 수확을 기다리는 채소가 무르익고 있다. 한국에서 가을이 가장 늦게까지 머문다는 해남에는 어디서나 맛있는 냄새가 난다. 첫 번째로 대흥사 초입에 위치한 해남 웰빙 음식촌에서 해남8미에 포함된 보리쌈밥을 먹기로 했다. 산채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해남 웰빙 음식촌에는 보리쌈밥과 파전, 더덕구이 등 자연에서 난 채소를 사용해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식당이 모여 있다. 그중 인기 메뉴는 보리쌈밥. 35년 전통의 보리쌈밥 전문점 ‘한오백년’은 원래 대여섯 가지 산나물을 한 그릇에 담아내는 산채비빔밥을 내놨는데, 손님마다 좋아하는 나물이 다른 걸 보고 방식을 바꿨다. 원하는 나물을 골라 담아 직접 비빔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한 것. 이렇게 만든 비빔밥을 쌈을 싸서 먹는 것이 보리쌈밥 메뉴다. 탱글탱글한 보리밥의 식감과 향긋한 제철 채소가 어우러져 해남의 가을을 한입에 먹는 기분이다.
건강한 한 상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후 대흥사로 향했다. 백제 무령왕 14년, 신라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대흥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됐다. 산세가 완만하면서도 깊고, 너른 품을 가진 두륜산 자락에 자리해 산책하듯 둘러보기 좋다. 완연한 가을, 두륜산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이다. 울창한 대숲과 맑은 계곡을 지나 일주문에 들어서니 부도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사찰 중 승탑이 가장 많은 것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초의선사 부도인 초의탑과 서산대사탑 등 50여 기의 승탑, 14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는 차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초의선사와 특히 인연이 깊다. 초의선사는 대흥사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수행에 전념하면서 차를 즐긴 것은 물론, 새로운 차 종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닭 한 마리로 즐기는 만찬
해남읍 돌고개 일원에는 닭 요리 전문 식당이 늘어선 해남 토종닭 요리촌이 있다. 이곳에서 알아 둬야 할 단어는 ‘통닭’. 기름에 튀긴 프라이드치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다는 뜻이다. 주물럭부터 닭 가슴살 육회, 닭똥집 볶음 등 닭 한 마리가 무한 변신해 상을 가득 채운다. 요리촌에 모인 식당들은 하나같이 ‘토종닭’, ‘닭 코스’를 간판에 내걸고 있다. 그중 유일하게 ‘원조’에 힘을 준 ‘원조장수통닭’에 들어섰다. 이곳의 역사는 50여 년 전 코카상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포장 외길에서 달걀과 음료를 팔며 오가는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던 점방. 단골들의 제안으로 닭 요리를 팔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꽤 좋아 1987년 정식으로 닭 요리 전문 식당을 열었다. 그사이 퍽퍽한 닭 가슴살로 주물럭과 육회를 만들며 색다른 조리법에 도전해 한 상을 가득 채울 만큼 닭 요리 가짓수가 늘어났다.
‘토종닭 코스 요리’를 주문하자 파를 가득 얹은 닭 주물럭, 한약재를 넣고 푹 삶은 닭백숙과 닭죽을 중심으로 갖가지 반찬과 닭 요리가 테이블에 올라온다. 그중 닭 가슴살 육회는 해남에서만 먹을 수 있어 더욱 특별하다. 닭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것에 거부감이 들 만도 한데, 기름소금에 콕 찍어 입에 넣으니 씹을수록 맛이 고소하고 식감이 쫄깃해 젓가락질을 멈추기 힘들다. 닭 코스 요리는 네 명이 함께 먹어도 충분할 만큼 양이 푸짐하다. 이유는 3킬로그램이 넘는 토종닭. 백숙에 나오는 닭 다리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닭죽과 주물럭, 백숙은 사시사철 맛볼 수 있고 닭 육회는 겨울, 닭구이는 여름에 가능하다.


생생한 감동을 품은 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설적인 명량대첩이 펼쳐진 울돌목은 여전히 거센 물살이 몰아친다. 진도와 해남 사이,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지는 해로가 바로 울돌목이다. 바닷물이 차고 빠지며 하루 네 번 울돌목을 일시에 지나면서 조류가 거세지는 것.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이런 특성을 이용해 불과 13척의 배로 왜군 133척을 막아 냈다. 그 위대한 업적은 울돌목 앞에 조성한 우수영국민관광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명량대첩해전사기념전시관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의 전투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 등이 생생한 감동을 전한다. 해 질 무렵,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 끝에 자리한 스카이워크에 올랐다. 총길이 110미터, 주탑 높이 25미터의 스카이워크는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다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여 아찔하고도 신비롭다.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멀리 바라보고 싶어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명량해상케이블카는 약 1킬로미터 구간의 울돌목해협을 가로질러 해남과 진도를 잇는다. 하늘과 바다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된 크리스탈 캐빈을 추천한다. 높이 30미터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총길이 484미터의 진도대교가 시야에서 차츰 멀어지면서 노을 진 울돌목 풍경이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다. 세상의 모든 붉은색을 모아 놓은 듯한 강렬함이 덮치듯 가슴을 파고든다.
해남을 찾는 여행자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지난 10월 1일 호텔 울돌소리가 문을 연 것.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어 자연환경과 지역 문화, 액티비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체험형 테마 공간으로 조성했다. 객실은 총 32개로 슈페리어 더블, 패밀리 스위트, 로열 스위트, 핸디캡 더블(장애인실) 등 6개 타입이 있으며, 탁 트인 창과 우드 톤의 인테리어로 세련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면을 통유리로 마감해 개방감이 뛰어난 ‘라운지 1597’은 호텔 울돌소리의 하이라이트. 천장에도 커다란 유리창이 나 있어 자연광이 쏟아진다. 이곳에서는 해남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며 신선한 제철 식재료로 차린 조식을 즐길 수 있다. 프라이빗한 분위기에서 진정한 휴식을 경험하는 스파와 업무처리에 적합한 비즈니스 센터, 해남의 특산품이 한자리에 모인 로컬 숍까지, 부대시설도 꼼꼼하게 갖췄다.


제7회 해남미남(味南)축제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두륜산도립공원 잔디구장 일원에서 해남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밀키트체험존, 해남밥상존, 해남김체험, 미남플리마켓 등 해남의 다양한 농수산물을 활용해 먹거리존과 체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축제 기간에는 화려한 개막 퍼포먼스, 온 가족이 즐기는 농산물 체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즐길거리도 만난다.
느리게, 깊게, 맛있게
영암
강해영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행지, 영암에 닿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웅장한 월출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은 아늑하면서도 비범한 기운이 흐른다. 예부터 영암은 ‘기의 고장’이라 불렸다. 영암의 기둥인 월출산의 영험한 자태만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월출산을 두고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기를 내뿜는 기상”이라 표현했다. 영암의 기는 맛에도 깃든다. 비옥한 들판에서 자란 쌀과 과일, 영산강의 기운을 품고 자란 건강한 식재료가 여행자의 활력을 북돋운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
영암에서 첫 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던 중 영암의 이야기를 한 그릇에 담았다는 말을 듣고 공방 카페 ‘예담은’으로 향했다. 천연 염색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규방문화원이었던 곳이 방문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카페로 변모했다. 자그마한 정원에서 차와 음식을 즐길 수 있는데, 천연 염색 프로그램도 그대로 운영한다. 대표 메뉴는 월출소반. 영암에서 난 농산물을 활용해 만든 근사한 도시락이다. 음식을 담은 찬기와 도기도 지역 예술가들이 만들어 그야말로 온전한 ‘메이드 인 영암’ 메뉴다.
월출소반 도시락 뚜껑을 여니 알록달록한 음식이 소담스레 담긴 모습이 마치 한 다발의 꽃 같다. 영암에서 난 양상추 샐러드에 영암 특산품인 무화과로 만든 드레싱을 곁들이고, 검정·분홍·노랑의 삼색 주먹밥은 영암 쌀과 농산물로 선명한 색과 맛을 냈다. 무화과로 재워 식감이 부드러운 볼카츠도 예담은에서 개발한 별미다. 여기에 영암의 또 다른 특산물 멜론으로 만든 아삭한 장아찌가 중간중간 입안을 개운하게 해 준다. 도시락 옆 작은 도기에는 임금님 진상품으로 알려진 어란을 얹은 미니 주먹밥과 영암 멜론, 대봉감, 고구마 등 제철 재료로 만든 양갱이 오른다. 영암의 맛을 생생하게 즐기는 진귀한 경험이다.
식사를 마쳤으니 이제 디저트를 즐길 차례. 영암의 가을은 무화과와 대봉감이 익어 가는 계절이다. 월출산으로 둘러싸인 영암은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해 대봉감이 유독 실하다. 쫀득한 식감에 은은한 단맛이 나 만주, 스무디, 타르트 등의 디저트에 주재료로 사용한다. 신비의 과일이라 불리는 무화과도 영암이 국내 최대 산지다. 부드럽고 달콤한 무화과는 단백질 함량이 높고 섬유질이 많아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예담은과 오솔길 하나를 두고 마주한 카페 ‘미술관 아래’에서는 무화과와 대봉감으로 만든 디저트를 선보인다. 시그너처 메뉴는 무화과 샌드. 묵직한 버터 쿠키 사이에 화이트 초콜릿 버터크림과 럼에 절인 무화과를 가득 넣었는데, 바삭하고 고소한 쿠키와 진하고 부드러운 크림, 향긋한 무화과의 조화가 일품이다. 무화과 로고가 그려진 상자에 포장해 선물용으로도 제격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함께 운영하는 미술관 아래는 이름처럼 카페 위층에 미술관이 있고, 맞은편에는 한지와 도자기 공예 체험 공간이 자리해 영암의 맛과 멋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
영암에 머무는 내내 마을 전체를 둘러싼 월출산의 속살이 궁금했다. 저토록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의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월출산을 오르기 부담스럽다면 도갑사를 방문하라는 주민의 말을 듣고 월출산 북쪽 계곡으로 향했다. 월출산에 안긴 도갑사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1456년 영암 출신의 수미왕사가 중건했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는 ‘호남의 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산세를 굽어보고 호국의 기운을 담아내고자 이곳에 도량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문인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가을볕에 노랗게 익은 나무들이 방문객을 정토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윽고 단번에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해탈문이 등장한다. 해탈문은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이르는 불교의 해탈 사상을 상징하며, 국보로 지정됐다. 경건한 마음으로 문을 통과하자 비로소 부처를 모신 불전에 이른다.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월출산을 등에 업은 채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 앞을 석조 5층 석탑이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다. 사찰 뒤편은 곧바로 월출산으로 들어서는 등산로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이 사방을 감싸안아 세상의 소음이 완벽히 차단되는 곳. 걷는 내내 오직 나뭇잎이 땅에 닿는 소리만 들린다. 속세의 걱정과 근심도 툭, 툭, 길가에 내려놓는다.
월출산 아래에는 고즈넉한 한옥 마을이 자리한다. 좁은 흙길을 따라 돌담과 기와집이 이어진 구림마을이다. 전국에 흔한 것이 한옥 마을이라지만 사뭇 다른 풍경이다. 무려 2200년 역사를 품은 마을에는 통창을 낸 카페나 퓨전 음식을 파는 식당 하나 없이 주민들의 고택만 모여 있다. ‘구림’이란 이름은 신라 말기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에 등장한다. 한 처녀가 빨래를 하다 강물에 떠내려온 오이를 집어 먹었는데, 그 후로 아이를 갖게 됐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처녀의 부모는 출산 후 아이를 숲에 버렸다. 며칠 후 그곳에 다시 찾아가 보니 비둘기 떼가 둘러싸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훗날 이 아이는 고려 건국을 예언하고 불교를 부흥시킨 도선국사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비둘기 ‘구(鳩)’와 수풀 ‘림(林)’을 합쳐 구림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구림마을은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한 왕인박사와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정말 월출산에서 나오는 기가 남다른 걸까. 다양한 일화를 되새기며 구석구석 걷다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구림마을에 가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한복을 입고 마을을 걷는 것.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유독 깔끔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띄는데, 한복 체험을 할 수 있는 ‘고영한복’이다. 한복을 단순한 전통 의상이 아닌 문화유산으로 여기는 고영 대표의 보금자리. 30여 년간 서울에서 한복집을 운영하며 조선 왕릉 제관 복식과 사직단 재현 복식 등 국가 행사에 필요한 한복을 손수 지은 그는 귀향을 고민하던 중 구림마을에 반해 정착을 결심했다. 고영한복은 맞춤형 한복을 제작하는 곳이지만, 한복을 입고 마을을 둘러보는 한복 대여 프로그램 ‘한복입고 유유자적’도 운영한다. 내 몸에 꼭 맞는 한복을 입고 고색창연한 고택과 야트막한 황토 담장, 정자와 누각을 거닐다 보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갯벌 속 인삼, 낙지의 변신
월출산에서 기를 충전했다면, 이제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울 차례. 영암 여행을 계획하며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읍내에 자리한 독천낙지거리. 지금이야 평범한 거리지만 과거 이곳에서는 큰 우시장이 열렸다. 근처 미암면 일대에는 영산강 하굿둑이 건설되기 전까지 너른 갯벌이 펼쳐진 갯마을이 있었다. 1970년에 문을 연 독천식당 대표는 우시장에서 갈비탕을 팔다가 근처 상인들이 좌판에 낙지를 펼쳐 놓은 모습을 보고 갈비탕에 낙지를 넣어 보았다. 이것이 독천낙지거리의 대표 음식인 갈낙탕의 탄생 배경이다. 이후 2010년 음식 문화 개선 시범 거리로 지정되면서 독천식당 일대는 ‘독천낙지거리’라 불리게 됐다. 갈낙탕을 처음 만든 ‘독천식당’은 3대째 전통을 잇고 있다. 대표 메뉴인 갈낙탕부터 낙지 초무침, 낙지 연포탕, 낙지구이 등 다양한 낙지 요리를 선보이고, 직접 만든 젓갈류로 밑반찬을 낸다. 갈낙탕에 들어가는 쇠고기는 식당을 오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영암에서 나고 자란 국내산 육우만 사용한다. 진한 국물에 갈빗대와 낙지가 통째로 들어가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신선한 채소와 통통한 낙지, 깊은 맛의 양념이 어우러진 낙지 초무침도 별미. 입맛을 돋우는 새콤달콤한 양념은 물론, 아삭하고 쫄깃한 식감도 먹는 재미를 더한다.
구림마을 근처 십리벚꽃길 옆에 자리한 구림한옥스테이는 올해 5월에 문을 연 한옥 펜션이다. 전통 한옥의 고즈넉한 멋에 침대와 에어컨 등 편의성을 갖춰 도시 생활에 익숙한 여행자도 편안하게 머물 수 있다. 객실은 수홍재, 동백재, 자미재, 죽림재, 노각재 등 5동으로 이뤄졌으며 각각 너른 마당이 딸려 있다. 그중 가장 안쪽에 자리한 수홍재에 짐을 풀었다. 푸른 어둠이 깔린 저녁, 수홍재 툇마루에 달빛이 내려앉는다. 건물 뒤란의 대나무 숲과 툇마루에서 스며 나오는 향긋한 나무 냄새에 솔솔 잠이 쏟아진다. 강해영에서의 마지막 밤이 고요히 저물어 간다.

2025 월출산 국화전시회
지난해 18만 4000여 명의 관광객이 찾으며 성황리에 개최됐던 월출산 국화전시회가 다시 돌아왔다. 올해는 10월 30일부터 11월 16일까지 월출산 기찬랜드 일원에서 열린다. 단풍과 함께 23종 21만 본의 국화가 만들어 내는 형형색색의 꽃물결이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할 예정. 국화로 만든 다양한 조형 작품과 포토존도 마련돼 특별한 추억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