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철학자가 된 시인 나태주

2025년 08월 29일

  • WRITER 이미선(문화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황필주

풀꽃문학관 신관 개관 소식을 듣고 나태주 시인을 만나러 충남 공주로 향했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시를 채집해 시인에게서 태어난 말에는 운율이 실리고, 사람들에게 되돌아간 시는 마음을 위로한다. 그리고 시인은 어린이 같은 시선을 가진 철학자가 된다.

풀꽃문학관 신관에서는 ‘시인의 집’(구 풀꽃문학관)과 공주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1964년부터 43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인의 과거를 만날 수 있는 신관 상설전시실.
신관 개관 기념 기획전 <공주 원로 작가 3인전>이 진행 중인 기획전시실. 나태주 시인의 수집품으로 구성했다.

서울국제도서전 티켓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한참 비뚤어진 때였다. 책을 읽지 않는데 텍스트는 힙하고, 책이 팔리지 않는데 도서전 티켓이 매진되는 기이한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물며 시라니! 과연 우리에게 행간의 여백을 견딜 힘이 있긴 한 걸까. 다정한 말을 찾아 나태주 시인에게로 갔다. 시인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챙이 긴 밀짚모자로 볕을 가리고 땀을 흘리며 꽃에게 말을 걸 듯 정원을 돌보고 있었다. 잔디에는 나뭇가지를 구부려 십자 모양으로 포개 우산처럼 씌워 둔 게 여럿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뿌리를 내린,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작은 풀꽃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시인의 정원에는 그렇게 바람을 타고 날아와 사는 식물이 많다.

피카소 그림을 닮은 시
한국 현대 시를 대표하는 나태주 시인은 자연과 인간, 일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치열한 성찰을 순수한 언어로 풀어낸다. 시인의 언어는 소박하고 투명하다. 복잡한 이론이나 추상적 사유보다 사소한 순간, 주변의 평범한 사물에까지 ‘생명의 감각’을 부여한다. 특별한 수사나 화려한 수식이 없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를 사용한다. 시에 쓰는 언어가 본래 말하는 언어, 곧 입말에서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짧고 간결한 그의 시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세상에 흩어진 작은 감동을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포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피카소 그림과 닮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1964년부터 43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의 동심, 자연의 아름다움,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집, 풀꽃문학관
대부분의 문학관이 전시관 형태를 갖춘 것과 달리 충남 공주의 풀꽃문학관은 시인의 집 같았다. 1930년대에 지은 일본식 목조 주택은 방과 거실, 부엌, 다락까지 원형 그대로인데, 2014년부터 풀꽃문학관으로 운영하며 나태주 시인이 소규모 강연을 하고, 찾아오는 관람객과 담소를 나누곤 했다. 운이 좋으면 시인을 찾아온 문인을 만날 수도 있다. 지난 7월 29일 풀꽃문학관 신관이 개관했다. 기존 문학관을 산처럼 포근히 감싼 건물로 문학관 기능의 대부분이 옮겨 가고, 구관은 ‘시인의 집’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풀꽃문학관 신관은 시를 닮았다. 최소한의 콘텐츠를 전시하고, 나머지 공간은 관람객이 사색할 수 있도록 여백으로 두어 일부러 문도 만들지 않았다. 나태주 시인은 구심점인 문학을 빌미로 전시를 보고 강연도 들으면서 쉴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1층 상설전시실에는 시인이 사용하던 물건과 출간한 시집, 에세이집,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평소 도서관처럼 운영할 풀꽃라운지에서는 금요일마다 시인의 강연이 열린다. 2층은 관람객이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시인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 모든 말이 시처럼 들립니다. 시는 무엇일까요?
나의 감정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이 시예요. 시가 되기 전 단계를 보면, 내가 너에게 하는 고백이자 하소연이죠. 그리고 그 너머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요. 사람들에게 용납되는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해요. 나의 고백과 하소연을 다른 사람들이 듣고 ‘나도 그렇다’고 느끼고 인정하게 만드는 거죠.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감정을 언어로 바꿔 너에게 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이에요. 사람들의 인정이란 감정적인 도움일 수도 있고 삶의 지혜나 지침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인생의 지혜가 되고 친구가 되는 시가 사라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좋은 시란 무엇일까요?
한때 나는 ‘위대한 시는 이발소로 간다’고 말했어요. 옛날 이발소에는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적혀 있었거든요. 머리를 감거나 면도를 하려고 의자를 젖히면 시선 닿는 곳에 그 시가 적혀 있었어요. 그래서 이발소 세대 남성들은 푸시킨의 시를 다 알아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괴테와 헤르만 헤세도 같은 말을 했고, 성경에도 같은 말이 나옵니다. 모두 인생에 관한 시예요. 좋은 시는 나의 하소연과 고백을 알지 못하고 만나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전할 때, 사람들이 나의 시를 통해 위로받고 의욕을 갖고 용기 있게 살아가게 돕는 것,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면서 치유를 받는 시예요.

시에 대한 새로운 정의처럼 들립니다. 보통 시와 산문을 나누는 기준을 ‘형식과 표현’에 두니까요.
백석의 시는 산문처럼 썼는데 왜 시일까요. 문장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듯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의 결과를 걸러 정제한 다음 문장으로 만든 거죠. 그래서 백석의 문장은 ‘물기 머금은 복숭아 꽃대처럼’ 탱탱해요. 시의 문장인 거죠. 이성적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현대 시는 건조해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예요. 세상에 건조한 감정은 없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에도 물기가 가득해요. 요즘 시는 감정을 배설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체한 걸 토하듯 배설하고 나면 나는 시원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오물일 뿐 시가 아니에요.

언어 생활도 같아요. 조롱 섞인 표현이 위트 있는 거라 여겨지고, 따뜻하고 다정한 말은 오글거린다는 말로 막아 버리니 언어가 더 건조해지는 느낌입니다.
건조하다기보다 거칠고 약해진다는 표현이 옳아요. 언어가 단순해지는 거죠. 좋으면 ‘대박’, 나쁘면 ‘헐’. 감탄사가 두 개뿐이면 세상은 두 개로 나뉘어요. 중간이 없는 사회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양극단으로 치닫게 되죠. 시인의 임무가 큽니다. 시인은 사회가 잃어버린 말을 찾아 예쁘게 써 주고, 자기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 의무가 있어요. 우리는 이미 자기 안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죠. 감정에 따라 감탄사가 달라져야 해요. 남의 감탄사를 따라 한다는 건 아주 불편한 일이에요. 사는 게 복잡하니 대충 크게 그룹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요. 그러면 어딘가에 속할 수 있고 편하거든요.

외로울 때 시를 통해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시인의 임무가 크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고요.
앞서 말했듯 시는 나의 호소이자 고백을 언어로 표현한 건데, 이를 조금 발전시키면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너의 입장에서 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느낀 감정을 시로 써서 ‘네 마음이 이렇지 않냐’고 묻는 거예요. 지금 힘들더라도 조금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는 거죠. 쉽게 설명하면, 여기 많은 꽃이 있어요. 꽃은 저마다 아주 적은 양의 꿀을 가지고 있어요. 벌은 꽃에 다가가 꿀을 모아 꿀통을 채워요. 그런데 꿀은 원래 벌의 것이 아니에요. 벌은 꿀이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꽃꿀이 아니라 벌꿀이라 불러요. 벌이 꿀을 모으듯, 시인은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아주 적은 양의 시를 모아 자신의 꿀단지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시를 지었으니 돌려줘야 한다는 말씀에, 풀꽃문학관을 찾은 관람객들과 사진을 찍어 주던 장면이 떠올랐어요.
사람들에게 받은 꿀을 돌려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예요. 시를 쓰고 시집을 만들어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언어로 돌려주는 것과 문학관을 찾아온 이들에게 사인을 해 주거나 사진을 찍어 주는 거죠. 풀꽃문학관 신관을 개관하면서 한 가지 방법이 더 생겼어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문학관 ‘풀꽃라운지’에서 강연을 할 계획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요. 강연 주제나 대본 같은 건 준비하지 않을 거예요. ‘너’가 된 ‘사람들’과 만나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려고요.

시인의 언어가 순수하기 때문인지 어린이 독자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한 존재지만, 내게는 특히 어린이 독자가 소중해요. 한번은 글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내 시집을 읽어 줬더니 “마술책이다”라고 했다는 독자가 있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다른 시집을 보내 줬어요. 그랬더니 “마술책이 또 생겼네”라고 하더래요. 나는 내 시가 마술이 되길 바라요.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어요. 어른이 되면서 시를 잃어버린 거죠. <어린 왕자> 서문에 “어린이 시절이 없는 어른은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은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적혀 있어요. 첫 문장은 맞는 말이에요. 다음 문장은 주관적이긴 해도 맞는 말이죠.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이다’라고 덧붙이고 싶어요.

풀꽃문학관 신관 개관에 대한 소회가 궁금합니다.
부러워하는 외부 시선과 달리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유지·보수를 하며 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큽니다. 유지·보수에는 물리적 측면뿐 아니라 콘텐츠도 포함돼요. 살아 있는 시인이 문학관을 연 것에 대한 부담감도 굉장히 커요. 아주 힘들다는 표현을 ‘불편하다’고 하는데, 굉장히 불편한 상태죠. 풀꽃문학관을 찾는 이들이 문학을 매개로 잠시 쉬면서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서적인 충족감과 위안을 얻어 치유되길 바라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려요.
우리가 시를 읽는 건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예요. 부자가 되고 싶고, 남들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을 때는 시를 찾지 않아요.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 시를 찾죠. 시는 마음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 주거든요. 각자 만족하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연습해 봐야 만족되지 않을 테지만 연습이라도 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족하는 연습은 체념과 달라요. 체념은 포기하는 것이고, 만족하는 연습은 노력하는 거니까. 노력의 과정을 인정하고 만족하며, 실패하더라도 괜찮다고 자기를 위안할 필요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