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괴테가 말했지만 이것마저 세계에 통할 줄은 몰랐다. 한국 토속신앙인 무속이 그 주인공으로, ‘K-무속’이라 불릴 만큼 힙한 대중문화 콘텐츠가 많아졌다.


모든 일은 하루아침에 벌어지지 않는다. K-팝과 무속을 결합해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킨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죽을 운명의 소년을 지키려는 무당 소녀의 로맨스로 글로벌 흥행을 누린 드라마 <견우와 선녀>의 인기가 신기하다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오래전부터 대중문화에서 다룬 무속 문화에 친숙함을 느껴 왔다. 여름밤이면 <전설의 고향>을 보며 이불 속에서 벌벌 떨었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자 주술을 쓴 이야기의 사극을 보며 자란 한국인 아닌가. 물론 ‘K-무속’이란 명칭이 붙은 작금의 기류는 남다르다. 과거 무속 소재 작품은 오컬트 영역이거나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한(恨)’을 극대화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무속 콘텐츠는 심오함은 덜어 내고 장르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음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무속이 양지로 나온 형국이다.

젊음 입고 발랄함 내세운 K-무속
먼저 MZ세대 무속인의 전면 등장이 돋보인다. 지난해 흥행작 <파묘>의 ‘MZ 무당즈’ 화림과 봉길이 결정적이다.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채 굿판에서 춤추고, 헬스장에서 스피닝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평상시엔 과감한 버건디색 가죽 코트를 입고 ‘아아’를 마시는 화림의 모습은 기존 무당 이미지를 산산이 깨부수었다. 축경(귀신을 쫓거나 액운을 막는 제문)을 팔뚝에 새기고 뱅앤올룹슨 헤드폰을 낀 봉길의 이미지와 함께 화림은 젊은 세대에게 다양한 ‘밈’을 확산시켰다. 악령을 퇴치하는 걸 그룹 ‘헌트릭스’가 악령 세계에서 탄생한 보이 그룹 ‘사자 보이즈’의 정체를 밝히며 세계를 지킨다는 내용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말할 것도 없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는 10~20대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에서 착안, 젊은 세대의 모습과 취향을 반영해 친숙함을 안긴다.
무속과 로맨스의 결합이 도드라지는 것도 K-무속의 특징이다. 물론 무속 기반 로맨스물의 인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왕과 무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궁중 로맨스 드라마 <해를 품은 달>과 귀신을 보는 영매 체질의 여자가 운명의 남자를 만나 사연을 지닌 영혼들을 위령하는 내용의 <주군의 태양>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도깨비와 소녀 사이의 운명적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저승사자와 삼신 같은 한국의 전통적 사후 세계관의 캐릭터를 대거 등장시킨 <도깨비>는 또 어떻고. 그러나 2010년대만 해도 무속인의 정체성을 로맨스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드물었다. <해를 품은 달>의 무녀는 사실 기억을 잃은 세자빈이었고, <주군의 태양>의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귀신을 보게 된 인물이었으니까.
최근 들어 K-무속 콘텐츠는 무속인을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데 스스럼이 없다. 무당의 운명을 거부하는 무녀 여리가 자신의 첫사랑 몸에 갇힌 이무기 강철이와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귀궁>, 여고생 무당 성아가 첫눈에 반한 견우의 목숨을 살리고자 ‘인간 부적’이 되길 자처하는 <견우와 선녀>가 대표적이다. 첫사랑이라는 애틋한 장치를 두어 ‘무속+청춘물’이라는 하이브리드 형식을 꾀한 점도 신선하다. 한국 연애 리얼리티 예능의 신기원을 열었다 할 만한 <신들린 연애>는 어떤가. 이 프로그램은 현실의 무속인들을 연애 굿판으로 소환, 국내 MZ세대의 뜨거운 호평을 넘어 올해 시즌 2를 해외 62개국에 판매하며 글로벌 관심을 입증했다.

K-무속이 대중문화에서 급부상한 이유
K-무속의 인기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시청각적 즐거움이 있다. 무속의 필연적 요소인 굿판을 보자. “음악과 춤으로 악귀를 쫓는 한국 무속 의식인 굿이야말로 이 영화의 콘셉트와 딱 맞을 것 같았다”라고 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의 말처럼, 관점을 바꾸면 굿은 한바탕 신명 나는 콘서트다. 형형색색 한복을 입고 강렬한 음악에 맞춰 파워풀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화려한 모습이 단박에 시선을 붙든다. 마찬가지로 신칼과 작두 같은 도검류와 방울, 부채, 오색기 등 각종 무구도 예전에는 두려움과 터부의 대상이었으나, 헌트릭스 멤버들이 무당의 신칼을 무기로 쓰는 것처럼 해외에선 신기한 굿즈처럼 비쳐져 관심을 샀다.
K-무속의 시청각적 매력이 극대화된 사례는 예능 <월드 오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댄스 크루 ‘범접’이 선보인 퍼포먼스 ‘몽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퍼포먼스는 상모돌리기, 부채춤 같은 한국 전통 무용을 바탕으로 갓 쓴 저승사자들이 망자를 황천길로 인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세계를 홀렸다. 저승사자의 시그너처 아이템인 갓은 ‘몽경’뿐 아니라 이미 여러 콘텐츠에 등장해 해외에서 힙한 아이템으로 통한다.
무속이 감정적 교감을 꾀하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한다는 점도 K-무속이 인기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악령을 퇴치하는 것에 그치는 서구권의 구마와 달리 한국 무속은 악령마저 억울한 사연을 들어 주고 천도시키려는 위로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 남다르다. 이런 감정적 교감은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 계층 이동이 닫힌 사회 시스템에 절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준다는 분석이다. 무속인들이 직접 유튜브, 틱톡 등 SNS에서 활동하며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MZ세대가 이를 통해 손쉽게 정서적 힐링을 얻는 현상도 한몫한다. 20대의 78퍼센트가 무종교지만 점이나 타로 상담을 즐긴다는 조사 결과에서 젊은 세대가 무속을 실용적이고 문화적으로 소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K-무속, 스테디 메가 콘텐츠 될까
비합리성을 상징하던 무속은 한국 민속 문화 및 세계관과 결합해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자원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저승사자, 망자의 영혼 인도 등 무속과 사후 세계관을 기반으로 해 1, 2편 모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신과 함께> 시리즈의 성공이 좋은 예시다. 기존에 빛을 발했던 오컬트 장르도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는 추세다. 공인중개사인 퇴마사가 퇴마 사기꾼과 팀을 이뤄 원귀를 퇴치하는 생활 밀착형 드라마 <대박부동산>이나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다 악귀에 씌인 청춘을 내세우고 민속학을 결합한 <악귀>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다큐멘터리 <샤먼: 귀신전> 같은 콘텐츠도 K-무속의 한 갈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무속 문화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대중의 이해를 넓힌 이 작품은 2024년 첫 공개 후 역대 티빙 오리지널 다큐 중 유료 가입자 수 1위 기록을 경신했고, 최근 시즌 2 제작을 발표했다. 8월 말 방영을 시작한, 12지신 설화를 모티브로 한 액션 히어로물 <트웰브>처럼 전통에 새로움을 접목하는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새로운 스타일을 입은 K-무속 콘텐츠가 대중문화의 보고로 자리매김할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