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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한 끼, 감자의 여정을 좇다

2025년 07월 23일

  • EDITOR 신송희
  • PHOTOGRAPHER 김은주

건강한 먹거리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플랫폼 ‘벗밭’. 도시와 농촌이 가까워지도록 만남의 장을 여는 벗밭의 배기현 이사를 따라 경기도 여주의 감자밭으로 떠났다.

밭 주변에서 채집한 식물. 개갓냉이, 쇠비름 등 이름도 생소하다.
감자를 캐기 전, 감자의 원산지와 생김새에 대해 탐구한다.
지난 3월에 싹 틔운 씨감자를 심고 3개월간 길러 하지 무렵에 수확했다. 유기농으로 재배해 시중에 판매하는 감자보다 크기가 작다.

순우리말 ‘벗’과 ‘밭’을 합친 벗밭은 건강한 먹거리를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플랫폼이자 커뮤니티다.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던 백가영 대표가 대학 재학 시절 친환경 먹거리 모임 벗밭을 운영하다 졸업 후 2022년에 법인으로 전환했다. 현재는 배기현 이사를 포함한 3인 체제로 운영 중이다.

도시에서 밭으로
벗밭의 목표는 식문화에 대한 가볍고 즐거운 첫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즉흥 과일·채소 클럽’ ‘퇴근 후 마르쉐’ 등 다양한 식경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즉흥 과일·채소 클럽은 매달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모여 제철 과일과 채소를 맛보는 모임으로, 다양한 품종의 식재료와 시즈닝을 조합해 가며 새로운 맛을 경험한다. 지난 4월엔 흑토마토·완숙토마토·방울토마토 등 여러 품종의 토마토를 빵과 샐러드 채소에 곁들이고, 딜·비건 마요·감귤 식초 등을 활용한 달래장을 취향대로 만들어 토마토비빔밥을 먹었다. 퇴근 후 마르쉐에선 저녁을 챙겨 먹기 힘든 이들이 모여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요리해 먹고 마르쉐 농부와 대화도 나눈다. 벗밭이 마련한 식탁엔 보통 다듬지 않은 작물이 올라오는데,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시간도 갖는다.
식재료의 여정을 체험하기 위해 다 같이 교외 농장이나 도시 텃밭을 찾아가기도 한다. ‘OO 마트’ 프로그램이 그것. 벗밭이 랜선 식물 공동체 ‘샐러드연맹’과 함께 작년 3월부터 운영하는 OO 마트는 ‘감자 마트’ ‘냉이 마트’ 등 식재료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감자와 냉이 같은 채소가 마트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에게 감자와 냉이가 자라는 밭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지난봄 냉이 마트에 이어 지난 6월 중순엔 감자 마트가 열렸다.
에디터도 하지를 맞아 감자 마트가 열리는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감자 마트에 참가 신청서를 보낸 사람은 10여 명. 참가 이유는 모두 감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직접 캔 감자로 감자 포카차를 만들고 싶어서” “하지를 성대하게 즐기는 사람으로서 하지 감자를 놓칠 수 없어서”. 내 손으로 캔 감자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주말 아침에 모인 사람들이다.

삼삼오오 모여 감자를 캐고 있다.
감자 요리에 곁들일 배추 겉절이를 된장에 무친다.

여름이 제철, 하지 감자를 만나다
감자 마트의 목적지는 곽동훈 농부의 감자밭. 그를 따라 도착한 밭엔 정체 모를 검은 비닐이 뒤덮여 있었다. 모두 힘을 합쳐 비닐을 걷어 내니 푸른 감자 잎사귀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누어 준 목장갑을 끼고 고랑에 앉아 난생처음 호미를 들고 감자밭과 마주한다.
뜨겁고 건조한 흙을 열심히 걷어 내니 시원하고 촉촉한 흙이 손끝에 닿는다. 젖은 나무껍질에서 나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더 깊이 팔수록 흙 속에 감춰져 있던 이름 모를 곤충과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은 건강한 토양임이 분명하다. 단단히 뭉친 흙을 감자로 착각해 실망하기를 여러 번. 온 힘을 다해 땅을 파니 흙보다 옅은 색의 무언가가 흘끗 시야에 잡힌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주변 흙을 걷어 내니, 큰 잎사귀와 덩이줄기가 하나로 이어진 진짜 감자가 한 손에 잡혀 나온다.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자 더욱 열성적으로 감자 캐는 일에 집중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주변에서도 감자를 수확한 듯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파도 파도 계속 나오네.” “내가 캔 감자가 제일 큰 것 같아.”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올망졸망한 감자가 어느새 탑을 이루고 있다.
족히 1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감자를 캔 시간은 고작 20분.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허리가 뻐근하고 다리는 찌릿하게 저려 온다. 접혀 있던 다리 사이에 찬 땀이 발등까지 주르륵 흘러내리자 그제야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자각한다. “오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내리 감자만 캐요.” 순간 곽동훈 농부의 말이 떠올라 아득한 기분이 든다.

껍질이 붉은빛을 띠는 홍감자와 속이 진보랏빛인 자색감자는 감자 특유의 아린 맛이 없어 샐러드용으로 적합하다.

무궁한 가능성이 꽃피는 식탁
부지런히 일했으니 이제 굶주린 배를 채울 차례다. 메인 요리는 감자전, 감자수제비, 감자샐러드. 각자 역할을 분담해 분주히 움직인다. 방금 밭에서 캔, 흙 묻은 감자를 물로 씻어 내는 것을 시작으로 흑밀과 딩켈멜로 만든 수제비 반죽을 얇게 펴고, 강판에 곱게 갈아 낸 감자를 프라이팬에 올린다. 감자 요리에 곁들일 반찬은 배추 겉절이. 봄에 수확한 토종 배추를 한 입 크기로 썰어 한쪽은 된장, 다른 한쪽은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에 묻힌다.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요리하며 감자 레시피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배기현 이사가 제일 간단하다며 선보인 샐러드. 껍질이 붉은빛을 띠는 홍감자와 속이 진보랏빛인 자색감자를 삶은 뒤 양푼에 담아 으깨고 소금과 후추로 가볍게 간을 한다. 여기에 쫑쫑 다진 로즈메리까지 더하면 완성. “너도나도 따라 할 수 있으려면 일단 쉽고 재밌어야 해요. 그래서 익숙한 식재료로 새로운 조합의 음식을 만드는 조립식 레시피를 추천해요. 정말 간단하고 맛있어서 나도 한번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걸요.” 10분 만에 뚝딱 만든 로즈메리 감자 샐러드를 맛보니 포슬포슬한 감자의 식감과 함께 로즈메리의 향긋함이 진하게 풍긴다. 감자와 로즈메리의 조합이 의외로 잘 어울려 다른 허브와의 조합은 어떨지 상상해 본다.
하나둘 완성한 요리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리니 감자로 가득한 한 상이 차려졌다. 기다렸다는 듯 분주히 젓가락질을 하며 내 손으로 완성한 감자 요리를 맛본다. 감자는 요리 방법에 따라 담백하거나 고소하거나 달큼한 맛을 내기도 했다. 같은 감자로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맛이 난다. 이렇게나 다종다양한 감자 요리를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또 있을까. 호사를 누리는 기분으로 1년 치 하지 감자를 원 없이 즐긴다.

인천 강화도의 협동조합 청풍과 벗밭이 협업해 진행한 ‘강화, 가을의 맛’ 프로젝트. 순무, 속노랑고구마, 섬쌀 같은 강화 고유의 문화와 맛을 담은 레시피 카드와 생산자의 인터뷰 QR코드가 담겨 있다.

한 끼, 그 너머의 의미
앞으로 마트에서 감자를 마주할 때마다 이날이 떠오를 테다. “심고 거두기까지, 그 사이에는 정말 많은 과정이 있어요. 그 지난한 여정을 상상하면 감자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감자에 깃든 시간도 함께 오는 것 같아요.” 백가영 대표의 말처럼 씨감자가 밭에 던져진 순간부터 식탁 위에 올라오기까지 감자의 기나긴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한 끼에 얽힌 수많은 관계와 노력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벗밭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식사, 즉 연결되는 식사와 이어진다. 밥 한 끼를 시작으로 자연과 농부 너머의 관계를 떠올리고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한다. 더 나아가 그 관계를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벗밭이 생산자를 만나 지속 가능한 재배 방식을 함께 고민하고, 건강한 식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을 만나 친환경으로 재배한 제철 작물을 다 같이 나누어 먹는 이유다.
“원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오게 됐는지 이야기를 듣고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물이 태어난 땅이 궁금해지고 그 땅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 마음을 발굴해 내는 것이 저희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이들이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밭과 식탁을 잇는 벗밭의 재미난 실험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