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땅을 타고 흐르는 기나긴 물길, 그 유장한 세월을 따라 걷는다. 더위에 흐느적거리는 몸과 마음을 씻어 내리는 정결한 여정이었다.


1. 물에 뜬 연꽃같이
부용대와 하회마을
붓으로 그린들 이보다 아름다울까. 물에 뜬 연꽃, ‘연화부수’는 강물이 에워싼 하회마을의 지세를 가리키는 풍수지리적 표현이다. 이 눈부신 풍광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가 바로 부용대다. 연꽃 부(芙), 연꽃 용(蓉) 자를 써서 거듭 연꽃의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절경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법. 화천서원 뒤편의 숲길을 오르는 동안 한여름의 묵직한 열기가 발목을 붙든다. 10분 남짓 등산을 마치고 나면 물기 어린 강바람이 땀을 식히고, 이내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하늘과 물길에 휩싸인 한 떨기 꽃이 두 눈 가득 밀려든다. 하회마을의 주산을 ‘화산’, 이 일대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지류를 ‘화천’이라 일컫는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꽃술에 해당하는 명당엔 양진당, 충효당, 화경당 등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점처럼 작아진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사사로운 근심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듯한 기분이 든다. 옛사람들도 그러했을 터. 서애 류성룡은 부용대 동쪽 끄트머리에 옥연정사를 짓고 은거하며 임진왜란을 회고하는 <징비록>을 집필했고, 그의 형인 겸암 류운룡 또한 절벽 서편에 겸암정사를 세워 학문을 닦았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되새길 만한 연꽃 같은 장면과 이야기다.
주소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산23-3(부용대), 경북 안동시 풍천면 전서로 186(하회마을)
문의 054-852-3588(하회마을 관광 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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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서애 류성룡과 그의 제자이자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한 곳으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의 대표적 유교 건축물이다. 서원의 역사와 문화적 의미만큼 칭송해 마땅한 것이 있으니, 이즈음 붉은 망울을 터트려 만개하는 배롱나무 꽃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입교당 뒤편의 여섯 그루 외에도 존덕사, 장판각, 만대루 등의 건물 주변 곳곳에 자리한 나무들이 여름날 병산서원을 구름처럼 휘감는다. 눈부신 화산 능선과 강줄기가 자아내는 풍광이 운치를 더한다.
주소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문의 054-858-5929
2. 마음을 씻는 낙수
봉정사와 명옥대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천등산에 몸을 숨긴다. 울창한 소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소박한 일주문 앞에 닿는다. 봉정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산지 승원 일곱 곳 중 하나지만 결코 화려하거나 위압적이지 않은 사찰로, 천등굴에서 수행하던 능인 스님이 접어 날린 종이 봉황에서 이름을 따왔다. 만세루 누하 기둥 사이로 이어진 좁다란 계단에 올라서자 대웅전과 화엄강당이 자아내는 환하고 산뜻한 영역에 다다른다. 사바세계를 벗어나 정토에 당도한 기분이 이러할까. 과연 봉황이 머물렀다는 전설처럼 은은한 기품을 간직한 전각들이 서로 어깨를 맞댄 듯 다정하게 늘어서 있다. 한국에 남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국보 극락전과 조촐한 고금당, 고려 시대에 세운 삼층석탑이 자아내는 운치 또한 맑고 그윽하다. 요사채 너머 영산암까지 다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 물 좋고 바람 좋은 명옥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기로 한다. 봉정사를 오가며 독서하던 퇴계 이황은 물이 흘러 ‘낙수대’라 부르던 이곳을 즐겨 찾았다. “비천수명옥(飛泉嗽鳴玉, 솟구치는 샘이 옥돌 씻는 소리를 내네)”이라는 옛 중국 시구를 따 새롭게 명명한 것 또한 그다. 들려오는 물소리에 눈을 감고 번뇌를 씻을 시간이다.
주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봉정사길 222(봉정사)
문의 054-853-4181(종무소), 054-857-9780(관광 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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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풍채만큼이나 자비로운 부처님 앞에서 머리를 절로 조아린다. 사찰 겸 숙소로 사용해 ‘연미원’이라고도 부르던 연미사 터에 자리한 고려 시대 불상으로, 거대한 암벽 위에 머리 부분인 불두를 따로 얹어 만든 형태가 이채롭다. 도톰한 눈매와 입가에 흐르는 토속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느라 시선을 떼기 어렵다. 불상 주변은 제비원 솔씨공원으로 꾸몄다. 서사무가 ‘성주풀이’ 중 “안동 땅 제비원에 솔씨 받어”라는 대목에 따르면, 가옥을 수호하는 신인 성주의 본향이 바로 여기다.
주소 경북 안동시 제비원로 672
문의 054-841-4413(제비원 연미사)
3. 역사를 비추는 우물
임청각


청신한 기운이 흐르는 영남산 동쪽 자락, 낙동강 물줄기를 굽어보는 배산임수 명당에 50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버티고 선 임청각이 있다. 조선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세운 이 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이 태어난 곳으로, 존재가 곧 역사를 증언한다. 석주는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몸을 던져 싸우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했으며, 그의 아들 준형은 아버지의 문집 <석주유고>를 정리한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보탤 뿐이다”라는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통탄할 일은, 3대에 걸쳐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낸 아흔아홉 칸 고성 이씨 종택이 일제가 감행한 중앙선 철도 부설 사업으로 크게 훼손된 사건이다. 남은 건물도 소음과 진동으로 고역을 치렀으나 꼿꼿한 기개만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하다. 자랑스레 핀 무궁화가 마중하는 앞마당, 작은 전시관으로 꾸민 행랑과 중정, 무수한 독립 열사와 묵객의 자취가 깃든 군자정을 살피는 동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석주가 탄생한 ‘우물방’ 앞에선 발길이 더뎌진다. 우물방 앞 맑은 우물이 비추었을 아름다운 얼굴들, 아프고도 위대한 시절을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
주소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63
문의 054-859-0025

이렇게 여행하세요
안동시티투어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도시 안동에는 무수한 문화유산과 볼거리가 산재하니 안동시티투어의 다채로운 테마별 코스를 활용해 동선을 설계해도 좋다. 최근에 선보인 ‘리더의 도시 안동, 100년 리더십 여행’ 코스는 옛 안동역사를 개조한 여행자 플랫폼 ‘중앙선1942안동역’에서 출발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탄생한 임청각, 한국 전통 복식을 체험할 수 있는 한국문화테마파크, 제21대 대통령을 배출한 예안면 도촌리 일대를 차례로 둘러본다.
문의 www.gbtour.kr
4. 우정은 강물을 타고
고산정


퇴계가 거닐던 청량산과 낙동강 기슭의 오솔길을 이르는 ‘퇴계예던길’은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고찰한 대학자의 사상과 함께하는 여정이다. 연시조 ‘도산십이곡’에서 퇴계는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봬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라고 썼는데, 여기엔 옛 성현이 앞서 닦은 길을 따라 걷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퇴계예던길의 모든 장면이 찬란하지만, 열두 폭 병풍처럼 유려한 바위 절벽과 물줄기가 굽이치는 가송협은 과연 백미라 할 만하다. 풍광을 완성하는 것은 고산정이다. 퇴계의 애제자이자 정유재란 때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성재 금난수가 지어 올린 정자다. 이곳을 즐겨 찾아 노닐던 퇴계는, 어쩌다 제자를 만나지 못한 날의 감회를 “창망운산독좌구(愴望雲山獨坐久,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라는 시구로 남기기도 했다. 무수한 묵객이 몸을 기댄 고산정에는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글줄이 차고 넘친다. 봉화 금씨 문중은 원본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고, 이곳 정자엔 탁본을 걸어 정취를 보존했다. 고아하게 낡은 기둥과 서까래, 창 너머 어른거리는 협곡과 바람결에 실려 오는 물 내음, 미려한 자태를 뽐내는 소나무···. 선비의 눈을 빌려 풍경을 연모한다.
주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
문의 054-857-4387
5. 수면에 어린 안동의 밤
월영교


청량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여름밤, 초승달 모양의 쪽배가 수면을 가로지른다. 안동호를 둘러싼 능선이 검푸른 어둠에 잠기고, 꽃 같은 조명이 불을 밝히니 비로소 월영교의 시간이다. 달이 비친다는 뜻의 ‘월영’이란 이름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암벽 월영대와 옛 지명 음달골에서 비롯되었다. 길이 387미터, 너비 3.6미터로 압도적인 자태를 자랑하는 월영교엔 풍광만큼이나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 중엽에 한 여인이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 한 켤레, 그리고 남편에게 쓴 편지가 1998년 고성 이씨 문중 묘 이장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일명 ‘원이 엄마 편지’로 알려진 이 서신은 월영교가 간직한 낭만과 애틋함을 더한다. 하늘에서 굽어본 월영정과 월영교의 모습이 미투리 형상이라는 사실 또한 절묘하게 느껴진다. 야경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 여행지를 둘러보면서 설렘을 다스린다. 근사한 카페가 모여 있는 안동문화관광단지에서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비밀의 숲’이라는 별칭이 붙은 낙강물길공원의 싱그러운 녹음을 누리니, 계절의 축복 안에서 충만해지는 기분이다.
주소 경북 안동시 상아동 569
문의 054-857-9783(월영공원 관광 안내소)

이렇게 여행하세요
2025 안동 수(水)페스타
낙동강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흐르는 땅, 안동은 물의 도시다. 뜨거운 햇볕, 훗훗한 열기를 식힐 물놀이 문화 축제 ‘2025 안동 수(水)페스타’가 한층 진화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안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선보이는 감각적인 공연, 드넓은 물놀이장과 짜릿한 물총 싸움, 허기를 달랠 푸드 트럭과 수제 맥주,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보듬어 줄 캠크닉장, 눈이 즐거운 플리마켓까지, 온몸이 들썩일 만큼 흥미로운 체험 요소가 가득하다.
장소 경북 안동 성희여자고등학교 앞 낙동강 변
기간 7월 26일~8월 3일
문의 www.waterfest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