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서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서브컬처에 속했다. 스포츠로 따지면 비인기 종목. 그런데 요즘 들어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분다. 과연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올까?

‘K-애니메이션’이란 용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한국에선 뭐든 잘나가는 것에 ‘K’를 붙이는 것이 ‘국룰’. 그런데 정말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가 잘나간다고? 답부터 말하자면 ‘네니오’다. 영화를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가 그려진 캐릭터 상품을 사 본 적이 있을 것이고, <겨울왕국>의 ‘Let It Go’를 흥얼거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를 물어보면 주저할 가능성이 크다.
요즘 들어 ‘K-애니메이션’을 말하는 건 몇몇 작품이 거둔 소기의 성과 때문이다. 올해 2월 개봉한 오컬트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12세 이상 등급 중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최고 성적을 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계가 체면치레를 한 것도 애니메이션 덕분이었다. 한국 장편영화가 3년 연속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에 실패한 가운데 정유미 감독의 <안경>이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비평가 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다. 5월 말에는 넷플릭스 최초로 한국에서 제작한 한국어 애니메이션 영화 <이 별에 필요한>이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7월엔 <킹 오브 킹스>가 개봉한다. 이 작품은 북미에서 먼저 개봉해 <기생충>을 꺾고 북미 박스오피스 한국 영화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한국 언론은 유독 ‘최고’ ‘최초’ ‘1위’ 같은 말에 사족을 못 쓰는 경향이 있다. ‘K-애니메이션’이란 말이 뉴스에 오르는 이유다.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K-애니메이션
촘촘히 들여다보면 이 작품들을 ‘최고’ ‘최초’ ‘1위’ 같은 수식어로만 소개하기엔 아쉽다. <퇴마록>은 <레드슈즈> <유미의 세포들 더 무비> 등을 제작한 로커스 스튜디오가 제작을 맡아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섬세한 3D 작화를 선보여 호평받았고, 그에 힘입어 후속 편 제작도 논의 중이다. 매력적인 원작 IP를 활용해, 이우혁 작가의 1000만 베스트셀러를 망친 졸작이라 혹평받은 동명의 1998년 작 실사영화에 실망한 팬들의 마음을 달랜 것도 이 작품의 혁혁한 성과다.
넷플릭스의 첫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이자 성인 타깃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은 2050년 서울,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접은 제이의 로맨스를 그린다.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로 불리는 한지원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만큼 아날로그 감성을 한껏 자극하는데, 공개 이후 성적과 네이버 평점도 준수한 편이다. 김태리와 홍경이 목소리 연기를 맡아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정유미 감독의 <안경>은 칸 영화제 초청에 이어 감독의 전작 <파라노이드 키드>와 묶어 연속 상영 형식으로 메가박스에서 6월 11일 단독 개봉했다. <파라노이드 키드>와 <안경>은 극장은 물론 OTT에서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발상과 비주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배두나의 내레이션을 더한 <파라노이드 키드>는 일상 속 만연한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내면을 독특한 발상으로 풀어냈으며, 연필로 그린 흑백 드로잉으로 대사 없이 진행되는 <안경>은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은유가 탁월하다. 영화제 외에는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을 접하기 힘든 현실에서 관객의 경험을 넓힐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모팩 스튜디오가 제작한 3D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는 접근법이 돋보인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원작으로 한 종교물이란 점과 처음부터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기획했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으로는 협소한 내수 시장에서 통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나온 발상인데, 이것이 적중했다. <킹 오브 킹스>는 북미 개봉 첫 주말, 27년 만에 드림웍스의 <이집트 왕자>를 제치고 종교 소재 애니메이션 최고 오프닝 기록을 썼고, 6700만 달러가 넘는 월드와이드 수익을 냈다. 30년 이상 VFX 기술력을 선보인 제작사 모팩의 기술력이 돋보이는 가운데 게임 언리얼 엔진을 활용한 리얼타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관객 저변 확대가 시급한 K-애니메이션
솔직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토양은 척박했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은 ‘영유아 혹은 어린이나 보는 만화영화’ 이미지였다.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으로 시작해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V>를 거쳐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그랬다. 최초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영화 <블루시걸>이 나온 게 1994년. 이후 두 번째인 <아치와 씨팍>이 나오기까지 12년 걸렸고, <돼지의 왕> <사이비> 등 사회 고발적인 애니메이션이 나오기까지 또 몇 년이 걸렸다.
어린이 대상 애니메이션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외 애니메이션 명작 대부분이 전체 관람가다. 단,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 영화라는 점이 다르다. <이웃집 토토로> <업>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그 누구도 영유아나 어린이만 보는 영화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애니메이션 대표 선수로 꼽히는 ‘뽀로로’ ‘신비아파트’ ‘아기상어’ 시리즈는? 어린 자녀와 조카를 위해서라면 모를까, 성인 관객이 자발적으로 저 시리즈를 보러 극장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당장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성적 순위 10위권까지 살펴봐도 전부 영유아와 어린이 대상인 전체 관람가다. 2011년 작 <마당을 나온 암탉> 정도가 전체 관람가이면서 성인 관객의 마음도 사로잡아 220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랭크됐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청소년 이상이 타깃이었던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 사례를 보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시장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할 수 있다.
웹툰과 웹소설, 문학 등 매력적인 한국 IP가 많음에도 그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발굴하려는 노력이 더딘 점도 안타깝다. 오히려 한국 IP를 해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경우가 있다. 그림책 <구름빵>으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알사탕>이 그 예다.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과 정서를 보여 주는 러닝타임 21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인데, 놀랍게도 제작사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을 제작한 일본의 도에이 애니메이션이다. 단편이라 상업성이 없음에도 원작의 매력을 알아본 프로듀서가 회사를 설득한 끝에 제작했다고 한다. 결과는? 미국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고, 국내 개봉 3주 만에 10만 관객을 모았다. 한국 웹소설을 원작으로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나 혼자만 레벨업-리어웨이크닝->의 사례도 있다. 6월 20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어떤가. K-팝 아이돌이 주인공이며, 저승사자 등 한국적 소재가 등장하지만 정작 제작사는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소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K-팝 종주국 입장에선 조금 머쓱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밝은 미래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서 기대를 걸 부분은 팬덤이 확실한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 실제로 2024년 장르별 흥행 순위를 보면 애니메이션 장르가 21.9퍼센트로 매출 2위를 기록했다. 좋은 작품만 나오면 관객은 언제든 한국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하반기에는 이진주의 <달려라 하니> 탄생 40주년 기념으로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를 공개할 예정이다. 하니와 라이벌 나애리가 고등학생이 되어 벌어지는 극장판 오리지널 스토리로, 하니에 대한 추억이 있는 세대는 물론 신규 관객도 타깃으로 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차기작으로 심해 생물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가족의 탄생> <만추>를 만든 김태용 감독은 연극 원작 애니메이션 <꼭두>의 연출을 맡았다. <내부자들> <서울의 봄>의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준비 중이다. <기생충>이 이룬 한국 영화의 영광을 이어 갈 다음 타자가 K-애니메이션이 되지 말란 법 있나. 작금의 기류는 그 시그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