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 가득한 지구의 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임성택 사운드워커. 그를 따라 부산 이기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며 걸었다.
평소 소리에 집중하며 길을 걸은 적이 있던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하는 소리는 드물 테다. 임성택 사운드워커는 잠시 이어폰을 빼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말한다.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만나고, 전과는 다른 생경한 자연의 풍경이 펼쳐진다.

들려오는 소리를 음미하다
10년 넘게 숲 해설가로 활동하던 임성택 대표가 지난해부터 사운드워킹을 이끄는 사운드워커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생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자연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체험에 흥미가 생긴 그에게 사운드워킹은 좋은 해답이 되어 주었다. 사운드워킹은 영어로 ‘듣다’와 ‘걷다’의 합성어로, 소리에 집중하며 걷는 행위를 뜻한다. 오롯이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의존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임성택 사운드워커는 부산 이기대를 시작으로 몰운대, 삼락생태공원, 범어사, 금정산 오솔길 등 사운드워킹 코스를 개발했다. 이 중 에디터가 선택한 코스는 부산 이기대 해안 산책로. 동생말 입구에서 출발해 네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 해식동굴에 도착한 뒤 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먼저 아무런 장비 없이 맨 귀로 듣는 일부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꽂힌 시선을 소리로 옮겨 보는 것이다. 첫 번째 구름다리가 나오기 전까지 소리에 집중하며 걷는다. 광안대교를 건너는 자동차의 경적, 어선의 엔진 소리, 발밑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 덤불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등 사방에서 무수한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 요란하다. 마이크를 대고 듣는 소리는 어떨까. 본격적인 체험을 위해 지향성 마이크와 헤드폰을 착용한다. 마이크 전원을 켜니 바로 앞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확성기를 댄 것처럼 또렷하게 귓속에 내리꽂힌다. 나머지 소리는 일부러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먹먹하게 들린다.
처음 귀를 사로잡은 것은 삐삐삐 우는 새소리다. 주인공은 뱁새라고도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 움직임이 날쌔 언뜻 봤다 싶으면 그새 날아가 버린다. 소리로나마 덤불 사이를 분주하게 옮겨 다니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모습을 그려 본다. 까악까악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와 덤불에 있던 시선이 하늘로 옮겨 간다. 길에서 보던 까마귀보다 몸집이 더 크고 두툼한 까만 새가 힘차게 날갯짓하며 울고 있었다. “큰부리까마귀예요.” “이건 박새, 바다직박구리, 괭이갈매기···.” 임성택 사운드워커는 반가운 이웃을 만난 듯 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 주며 미소 짓는다.

소리 너머 생경한 장면
부산 이기대 해안 산책로의 매력은 구름다리에 있다. 구름다리를 중심으로 왼쪽엔 바다가, 오른쪽엔 숲이 있어 서로 다른 소리를 비교해서 들을 수 있다. 총 네 개의 구름다리를 건너는데, 신기한 것은 파도가 땅과 만나는 지형이 구간마다 달라 소리도 상이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구름다리에서는 고운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두 번째에선 파도가 큰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히며 양쪽 뺨을 번갈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세 번째에선 밀려오던 파도가 별 모양으로 된 돌에 부딪혀 회오리치는 소리가 난다. 마지막 구름다리에선 큼지막한 자갈들이 파도에 떠밀려 세차게 구르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다.
파도 소리가 소란스러우면 몸의 방향을 반대로 돌려 마이크가 숲 쪽을 향하게 하면 된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소리인데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2배속 소리처럼 다급하게 느껴진다. “뱀이나 들고양이 같은 동물이 새끼가 있는 둥지에 오지 못하도록 내는 경고음 같은 것이에요. 보이지 않아도 소리로 알게 되는 풍경이 있죠.”
흔히 보는 나무와 꽃을 손으로 만지면 의외의 소리가 나 놀라기도 한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소나무 껍질을 쓰다듬으면 책 넘기는 소리가, 나팔꽃과 생김새가 비슷한 갯메꽃의 꽃잎을 만지면 팽팽하게 잡아당긴 비닐을 문지르는 소리가 난다. 소리를 통해 다시 보게 된 풀도 있다. 왜모시풀이 그렇다. 겉면이 매끄러워 보여 아무 소리도 안 날 거라는 예측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손으로 만져 보니 털이 느껴지고, 맨 귀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지향성 마이크를 대니 까끌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그제야 털 달린 왜모시풀의 생김새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함께 만드는 소리 세상
“살아 있음을 느끼시나요?” 임성택 사운드워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눈빛을 보내자 마이크를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댄다. “우리 몸 안에서도 일정한 주파수로 파동을 보내고 있어요. ‘너 살아 있어.’ 하고요.” 조심스레 가슴 위로 안착한 마이크에서는 쿵쾅쿵쾅 힘찬 심장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뒤로 연신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어 준다. 이내 속도가 느려지더니 파도 소리와 심장 소리가 발을 맞추며 화음을 이룬다. 자연스레 눈이 감기고 이대로 선 채 잠이 들 것만 같다.
감은 눈을 다시 뜨게 한 건 하이라이트 장소에 다 왔다는 임성택 사운드워커의 목소리였다. 기기괴괴한 암석을 지나 해식동굴에 가까이 다가서니 지금까지 거세게만 들리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동굴 벽에 가로막혀 곧장 부드러워진다. 그가 선물을 건네듯 노래 한 곡을 들려준다. 제주 녹차동굴에서 녹음한 기타 연주. 잔잔한 기타 선율 위로 풀벌레의 합창 소리가 짙게 깔린다. 여기에 해식동굴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더해져 황홀한 자연의 풍경이 완성된다. 분명 짭짤한 바다 내음 가득한 동굴 앞에 서 있는데 풋풋한 풀 냄새가 나는 것이 신기하다. 서로 다른 소리가 합쳐지자 두 공간이 동시에 덮쳐 오는 기분이다.


음악이 끝나고도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 몇 분간 멍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마지막 장소인 해식동굴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아까 오던 길과 같은 길인데 소리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해가 기울자 붉은머리오목눈이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더 거세진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하다. 마치 처음부터 새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리는 영원하지 않아요. 환경이 변하면 계절마다 당연히 듣던 소리도 사라지게 될 테니까요.” 다양한 생명체들이 내는 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니 그들과 지구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모든 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만 들을 수 있다. 들려오는 소리가 반갑고 고마운 이유다. 새들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더불어 사는 세상은 모든 생명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소리는 그 마음을 자극하는 확실한 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임성택 사운드워커가 알려 주는 소리를 음미하는 방법
“숨어 있는 소리를 찾아내겠다는 호기심 어린 마음이 중요해요. 다양한 소리가 어떻게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는지 느껴 보는 건 그다음이죠. 듣다 보면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과 환경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