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공립 사진 미술관이 개관했다. 한국 사진사의 흐름과 변화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 중)
커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도봉구, 종일 인파로 붐비는 창동역 앞에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 5월 29일 개관 특별전을 시작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검은색 정육면체 건물은 사진의 픽셀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빛에 따라 반응함으로써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건축적으로 드러낸다. 공공에서 운영하는 국내 첫 사진 전문 미술관이 이 동네에 문을 연 건 여러 의미가 있다. ‘아기공룡 둘리’의 고향이기도 한 쌍문동 구도심에는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이 살던 백운시장과 생선 가게 팔도건어물이 있고, 옛 방호 시설을 개조한 복합 문화 공간과 평화울림터, 김수영 시인의 본가와 시비가 있다. 머지않아 한국 최대 규모의 K-팝 공연장도 들어선다. 분단국가의 아픔과 대중문화 강국으로서의 위상, 민중의 생활이 공존하는 지역인 셈이다. 오래전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란 인간의 눈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라고 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그런 사진을 담는 쨍쨍한 그릇으로, 영원을 꿈꾼다.

한국 사진, 그 역사의 시작
2015년부터 건립을 준비해 온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그간의 수집과 연구를 바탕으로 두 개의 특별전을 준비했다. 먼저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은 한국 예술 사진의 역사적 전환점을 만든 작가들을 조명한다. 이를 위해 국내에 사진술이 도입된 188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활동한 사진가들의 목록을 정리해 주요 작가 200명을 추리고, 다시 26명의 사진가와 2만여 점의 컬렉션을 구축하는 과정을 거쳤다. 첫 전시의 주인공은 정해창, 임석제, 이형록, 조현두, 박영숙이다. 암실처럼 꾸민 전시장에는 약 100년 전 이곳에 살았던 세련된 남자의 자화상부터 1940~1950년대 마포 석탄 공장, 남대문시장, 당인리 우물가의 풍경이 펼쳐진다.
미술관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부터 전시장 안은 관객들로 북적인다. 관객의 면면도 흥미롭다. 카메라를 멘 사진 동호회 사람들, 유아차를 끌고 온 부부, 연신 감탄하는 중년 여성,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사진을 보며 누군가는 추억에 젖기도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1956년도의 까까머리 평창동 소년과 어린 동생을 포대기에 들쳐 업고 책을 보던 소녀···. 사진 속 인물들은 마치 어제의 이웃처럼 생생하다.
그중 가장 오래된 사진들은 정해창의 작업이다. 도쿄에서 유학하고 온 그가 1929년 서울 소공동 광화문빌딩에서 연 전시 <예술사진개인전람회>는 1929년 3월 28일 자 <조선일보>에 조선 최초의 사진 개인전으로 소개되었다. 당시엔 희귀했던 유리공예품, 영문 책자, 석고상, 파이프 등을 담은 초기 정물 사진과 조선인의 모습을 한 목각 인형들을 회화적 구도로 연출한 사진은 물론, 작가의 강렬한 예술적 자의식을 담은 자화상도 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손현정 학예사의 말에 따르면, 전시된 사진은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원본 프린트다. 1941년 작가가 직접 유리 건판에서 밀착 인화한 사진들을 스크랩북 형태의 사진첩에 선집해 둔 것. 만약 기회가 된다면 구본창, 주명덕 등 유명 사진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인화한 정해창의 다른 프린트 버전과 비교해 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가장 최신의 서양 기계를 사용해 포착한 이 사진들은 서양 회화의 미학적 요소를 차용했지만 그 대상은 조선의 풍경이며, 동양화처럼 낙관도 찍혀 있다.

새로운 응시의 방법
해방 직후 한국의 생활상을 담은 임석제는 노동 현장에 카메라를 세우고 부둣가의 하역 인부나 석탄 공장의 광부, 소작농의 모습에서 역사의 주체를 발견했다. 묵직한 울림을 주는 그의 사진 뒤로는 한국 추상 사진의 선구자 조현두의 ‘잔설’(1966)이 보인다. 사진관을 운영하며 다양한 특수 효과 기법을 익힌 그는 한겨울 마포 강변의 모래와 얼음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형태와 무늬에서 사진이 구현할 수 있는 형상성과 조형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최초의 사진 연구 단체 신선회를 공동 창립하고(1956) 싸롱아루스를 결성한(1960) 이형록의 작업도 눈여겨봐야 한다. 리얼리즘 사진의 새 방향을 모색한 그는 한국 사진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수레를 끄는 소와 판잣집을 배경으로 도로의 물웅덩이를 건너는 사람을 포착한 ‘진탕길’(1954), 소시민의 생활사를 담은 ‘거리의 구두상’(1956), ‘시장의 아침’(1957) 등 그의 카메라에 담긴 생의 현장은 가난하지만 활기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또한 건설 현장 철골 구조의 기하학적 형태를 부각한 작품 ‘구성’(1956)에서 알 수 있듯, 사진의 조형적 요소를 강조한 이형록의 사진은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중시함으로써 다큐멘터리 사진과 구별된다.
선정 작가 중 유일한 여성인 박영숙은 숙명여대 재학 시절 싸롱아루스 전시를 계기로 현대사진연구회에 가입했다. 교내 사진 동아리 숙미회를 창립하고 졸업 후에는 여성지 <여상>의 사진기자로 일하며 한 편의 시를 감각적인 사진으로 해석하는 ‘시와 사진’ 코너를 담당하기도 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절, 이 포토 에세이 코너는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1966년 박영숙은 중앙공보관에서 여성 사진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이름을 알린 ‘미친년 프로젝트’ 연작과 그 이후의 작업 대신 초기작에 주목해 여성주의 사진의 단초를 발견한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녀’(1966) 연작은 김혜순 시인의 시 ‘마녀 화형식’에서 착안해 1980년대에 새로 이름 붙인 것이다. 흔히 여성 작가의 작업에는 ‘섬세하다’거나 ‘감성적’이란 상투적 감상이 따르지만, 박영숙의 사진에서 눈길이 가는 건 대상의 선정과 표현 방식의 과감한 시도다.

창동, 스토리지 스토리
또 하나의 개관 특별전은 미술관 건립 과정을 동시대 작가 여섯 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아카이브한 <스토리지 스토리>다. 미술관이 위치한 창동(倉洞)은 양곡 창고가 있던 동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병자호란 이후 한양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성을 쌓을 때 공사에 필요한 기자재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 지명처럼 작품과 이야기를 보관하는 창고라는 의미를 지닌 이 전시에서는 사진을 예술의 재료, 기록의 도구, 정보-데이터라는 세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다큐멘터리 사진부터 상업사진, 사진 콜라주, 기술 기반의 실험적 작업을 진행해 온 여섯 명의 작가는 여러 해에 걸쳐 미술관 건립 현장을 오가며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작업으로 남겼다.
주용성은 구술과 문헌을 토대로 창동이라는 장소가 지닌 역사적 층위와 정체성에 주목한다. 영화감독 이창동의 단편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도 언급되었듯 서울 변두리였던 도봉 일대는 1980년대부터 도시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섰다. 녹천마을 주민 김문국, 김순녀 할머니의 증언과 작가가 채집한 사진은 지워져 있던 시간과 기억을 현재로 소환한다. 건축 현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정지현이다. 그는 3년간 촬영을 지속하며 기나긴 과정 속에서 중첩되는 시공간을 다중 노출된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공개했다. 한편에 비치된 VR 기기를 통해 관객은 마치 망원경으로 건축 현장을 보는 듯한 공간적 체험을 경험한다. 서동신과 원성원은 미술관 건립 과정에서 파생된 건축자재와 공산품 카탈로그 같은 기능적 이미지의 물리적 요소를 이미지로 재구성함으로써 자유로운 예술 창작의 재료로 사진을 바라본다.
특히 오주영이 2층 전시장에 구현한 디지털보존복원실은 관객들이 오래 머무는 장소. 인공지능(AI)과 인터랙티브 시스템을 기반으로 이미지 복원과 서사의 재구성을 실험하는 그는 미술관이 수집한 낱장의 원본 사진을 고해상도 디지털 이미지 파일로 만들고, 열정적인 AI 사진 복원사와 함께 이미지의 ‘인식’과 ‘감상’에 관한 학습을 실험한다. AI 사진 복원사는 원본의 ‘아우라(aura)’를 디지털 파일에서 찾아내기 위해 여러 실험을 이행하며, 관객은 그때마다 필요한 단계별 지표를 책상 서랍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벽면에 장식된 미술관의 소장품 이미지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 카드 세 장을 선택해 ‘기계 감상 시스템’ 선반에 올려 두면 AI 관점에서 이를 해석해 준다. 직접 정희섭의 한복 입은 여성 사진과 홍순태의 옛 서울 사진, 문선호의 연예인 사진을 맥락 없이 골라 선반에 올려 놓으니 “이 이미지들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지점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탐구하게 한다”는 AI의 해석이 화면에 뜬다. 자신의 감상과 AI의 화려한 언변을 비교해 보는 건 또 다른 재미. 마지막으로 1층 로비에서는 수장고 속 사진을 복사 촬영하여 재구성한 정멜멜의 대형 플렉스 간판 작업이 극장의 상영 예정작처럼 전시되어 있다. 빛의 그림, 사진을 다각도로 해석한 개관전은 오는 10월 12일까지 이어진다. 사진은 미술관에 담긴다. 그리고 비로소 과거는 오늘의 우리와 만난다.

포토 라이브러리 이용하기
오스트리아 야드릭 아키텍투어와 한국의 일구구공도시건축의 협업으로 완성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1층과 4층에는 포토북 카페와 포토 라이브러리, 암실, 교육실이 있다. 빨강, 초록, 파랑 등 사진의 RGB 컬러와 조리개, 프레임 등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가구를 배치해 미술관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휴게 공간이다. 특히 사진 전문 도서관인 포토 라이브러리는 국내 작가들의 주요 사진집과 사진사 연구 서적, 학술 전문지 등을 갖췄다.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운영 시간은 화~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값비싼 사진집과 희귀본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사진 문화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