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서커스단이 올해로 창단 100주년을 맞았다. 화려한 조명처럼 반짝이는 시간을 지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신파 같은 위기를 이겨 내고 외줄 타듯 아슬아슬한 세월을 건너 묘기에 가까운 기록을 쓰고 있다.

동춘서커스단의 박세환 단장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사람들이 오래된 추억을 한 조각씩 꺼냈다. “재개발로 건물을 허문 공터에 한 달 정도 서커스단이 와서 천막 치고 공연한 적이 있다. 부모님을 졸라 공연을 봤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여름마다 집 앞 강변에서 야시장이 열렸는데, 피에로 분장을 한 아저씨들이 낮에는 놀이기구를 밀어 주고 밤에는 천막 극장에서 묘기를 선보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는 명절 때마다 TV에 서커스단이 나와 묘기를 보여 주고, 마술 쇼를 특별 편성해 방영하곤 했다.” “1970~1980년대에 활동했던 스타는 모두 서커스단 출신이었다.” 서커스가 우리 삶과 꽤나 가까운 공연 문화였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질문이 뒤따랐다. “그런데 요즘도 서커스 공연을 해?”

한 달에 열흘은 이사하고 홍보하는 데 썼고, 스무 날은 밤낮으로 공연을 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산실
2025년은 동춘서커스단이 창단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925년 일본 서커스단원이었던 박동수(예명 동춘) 가 30여 명의 조선인을 모아 동춘연예단을 결성한 것이 시작이었다. 2년 동안 준비해 1987년 전남 목포에서 첫 공연을 올린 동춘서커스단은 곡예와 국악, 연극, 마술 등 다양한 종합예술을 선보이며 전국을 누볐다. 박세환 단장이 입단한 1960년대는 서커스 황금기였다. 전국에 20여 개의 서커스단이 있었고 동춘서커스단은 그 정점에 있었다.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남철, 남성남 등 당대 인기 스타들이 모두 이 무대를 거쳐 갔다. 박세환 단장은 동춘서커스단에서 사회자, 배우, 코미디언, 가수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무대 경험을 쌓았다. 볼거리가 드물던 시대에 서커스는 서민의 유일한 오락이자 마을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서커스의 인기는 1970년대에 TV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보러 천막 극장에 가는 대신 저녁마다 TV가 있는 집 마당에 모여 드라마를 봤다. 단원들은 새로운 꿈을 찾아 방송국과 영화계로 떠나거나 야간 업소로 흩어졌다. 설상가상 1985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동춘서커스단은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서커스단을 떠나 있던 박세환 단장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우리나라 최고 서커스단의 역사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1987년 동춘서커스단을 인수했다. 거금을 들여 단원을 챙기고, 공연을 이어 가며 동춘서커스단의 이름을 지켰다.

공중 줄타기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계속됐다.
대한민국 마지막 서커스단
매체의 변화에 따른 공연 예술의 흐름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줄타기하듯 위태롭게 운영해 온 동춘서커스단은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신종 플루 등의 여파로 해체 수순을 밟는다. 방송을 통해 동춘서커스단의 해단 소식이 알려졌고, 서커스와 함께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누었던 국민이 나섰다. 동춘서커스단을 살리자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이라 여기고 올린 공연은 한 달간 만석을 기록했다. 이후 문화관광체육부와 고용노동부의 지원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동춘서커스는 사회적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동춘서커스단의 결말이 달라진 것이다.
2011년부터 동춘서커스단은 경기도 안산 대부도 입구 방아머리 문화공원에 터를 잡고 상설 공연을 열고 있다. 냉난방 시설을 갖춘 500석 남짓한 천막 극장에서 주중에는 2회, 주말과 공휴일에는 3회 공연을 한다.
전성기에 270명에 달했던 단원은 현재 30명 남짓이고 모두 외국인으로 교체됐지만, 공연장을 채우는 박수 소리와 함성 그리고 관람 후 공연장을 빠져 나가는 관람객들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100년 전과 변함이 없다. 눈속임 없이 온몸으로 연기하는 정직한 무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혹독한 연습, 상대방을 믿고 몸을 맡겨야 완성되는 묘기 등은 신기함과 재미를 넘어 삶의 단면을 보여 주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동춘서커스단이 존폐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직접 나서 단원을 챙기고 공연을 이어 간 사람. 동춘의 이름을 지켜 온 박세환 단장을 대부도 상설 공연장에서 만났다.

단장님을 만난다고 하니, 다들 아직도 서커스를 하냐고 묻더라고요.
대부도에 터를 잡고 14년째 공연하고 있는데, 해마다 15만 명의 유료 관객이 들어요. 매달 1만~1만 5000명의 관객이 찾는 셈인데, 오페라와 뮤지컬을 포함한 무대 예술 중에 한국에서 이만큼 관객 동원을 할 수 있는 공연은 없을 겁니다. 물론 K-팝이나 뮤지컬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건 맞지만. 서커스가 대중의 기억 속에 머무는 과거의 공연이 아니라 지금 가장 관심받는 공연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고요. 그래도 관람 만족도가 높아 재관람 관객이 많은 편이니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6개월마다 공연 내용을 바꾸고 있어요.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하게 된 스토리가 궁금해요.
경주에서 나고 자랐어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 학창 시절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경주에 공연 온 동춘서커스를 봤어요. 잘생긴 얼굴에 화려한 언변, 검은 정장에 흰 머플러를 두른 사회자가 이끄는 대로 반응하는 사람들! 완전히 반했어요. 꿈을 찾은 거죠. 양반집 종손인 제가 서커스단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가출해서 서커스단에 입단하고 10년 동안 집 근처에도 못 갔어요. 당시 서커스는 곡예뿐 아니라 국악, 신파극, 대중가요, 코미디, 마술, 풍물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에 가까웠어요. 실제로 방송국이 개국했을 때 프로그램에 출연한 배우, 가수, 코미디언, 사회자 등 거의 모든 사람이 서커스단 출신이었죠.
1987년 존폐 기로에 놓인 동춘서커스단을 인수한 이유는 뭔가요?
배우가 되고자 서커스단을 떠났는데, 배우가 되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배역에 맞는 훈련을 받아야 하니까. 돈을 벌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 생필품 가게를 차렸습니다. 십수 년간 서커스단에서 갈고닦은 말솜씨와 친화력 덕에 사업은 번창했고, 작은 점포가 대형 마트 규모로 확장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자금이 꽤 모였을 때 동춘서커스단 소식을 들은 거죠. 서커스단을 떠나 있었지만, 당시 야간 업소 악사나 가수, 마스터들이 모두 서커스단 출신이라 소문이 빨랐거든요. 최초의 서커스단이자 스타 등용문이었으며 내가 몸담았던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더라고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까요? 서커스 산업은 TV가 등장한 1970년대부터 내리막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명감이나 책임감일 수도 있지만 희망도 품었어요. 영화, 연극, 뮤지컬, 마술, 콘서트, 비보잉 등 거의 모든 대중예술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올라가다 보면 서커스에서 만나게 돼요. 동춘서커스단은 그 문화의 정점에 있는 예술 단체고요. 흉내 낼 수 없는 긴 역사가 있고, 공연 내용도 풍성하니 반드시 맥을 이어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배우가 되는 대신 서커스단 단장의 길을 택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의미로 서커스단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나는 동춘을 지키러 왔으니 다른 이름은 의미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존폐 위기에 처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서커스 산업은 계속 내리막이었어요. 공연을 지속하기 위해 외부 강연을 다니고, 비보잉을 가르치거나 연극에 필요한 액션을 지도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요. 2009년 해체를 결심하고 마지막 공연을 올렸습니다. 겨울이었는데 눈이 정말 많이 내렸어요. 공연 시간은 다가오는데 관객은커녕 거리를 지나는 사람조차 없었어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연 시간이 30분쯤 남았을 때 사람들이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공연장 앞에 줄을 서더라고요.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전석 매진을 기록했어요. 알고 보니 방송국에서 보도한 ‘동춘서커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동춘서커스를 살리러 와 준 거였어요.
국민이 살린 서커스단의 역사라니, 굉장히 감동적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뭉클하죠. 한번은 공연을 기다리던 관객들의 대화가 들린 적이 있어요. 여성 관객 세 분이 일행을 기다리며 전화 통화를 하는데, ‘관람료 1만~2만 원이면 동춘서커스단이 되살아난다는데 그거 못 돕겠냐’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적선하듯 관람하는 공연은 지속성이 없어요. 공연 자체가 입소문을 타야 해요. 2009년 동춘서커스는 미디어와 국민의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지금까지 이어 올 수 있었던 건 결국 콘텐츠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단장님이 생각하는 동춘서커스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동춘서커스의 매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한다는 점입니다. 서커스는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인데, 동춘서커스단은 우리 정서에 맞게 전통적인 요소를 잘 융합했어요. 한때는 곡예뿐 아니라 국악, 신파극, 대중가요, 코미디, 마술, 풍물 등 다양한 장르가 어우러졌어요. 동물 묘기가 큰 인기를 끌었지만, 동물보호법이 강화되면서 동물원을 없앴죠. 한때 국내에서 창경원 다음으로 큰 동물원을 소유한 서커스단이었음에도 말이죠. <태양의 서커스>가 세계적으로 히트했을 때 우리도 공연에 테마를 입히고 연극적 요소를 접목했어요. <홍길동전>이나 <흥부와 놀부> 같은 고유의 콘텐츠를 창작했죠. 요즘은 아트 서커스를 지향합니다. 단원들은 묘기 이전에 발레와 무용, 체조 등을 익혀 움직임에 응용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동춘서커스는 종합예술을 지향하고요.
동춘서커스가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들려주세요.
서커스 전용 상설 극장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관객들이 좀 더 안락한 환경에서 서커스를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싶어요. 또 서커스 아카데미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단원을 육성하고, 서커스 기념관도 지어 동춘서커스단은 물론 대한민국 서커스사를 알리고 싶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부도 일대에 땅을 매입해 터를 닦는 중이에요. 예술 회관 규모로 지으려면 안산시와 경기도, 정부 문화 예술 기관과의 논의가 필요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