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묵호에서 어달까지, 바다 마을 다이어리

2025년 06월 26일

  • EDITOR 이제희(여행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전재호
  • 제작 지원 동해문화관광재단

창틀에 바다를 싣고 달리던 기차가 강원도 동해 묵호역에 다다른다. 논골담길 트레킹부터 묵호태 라면까지, 도보 여행 프로그램 ‘뚜벅아, 라면 묵호 갈래’가 제안하는 코스를 따라 길을 나섰다.

1. 물결치는 언덕, 흐르는 이야기
별빛마을과 논골담길

2010년 동해문화원이 어르신 생활 문화 전승 사업으로 주도한 프로젝트가 오늘날의 논골담길과 별빛마을을 이뤘다. 바닷가의 삶과 이야기가 골목골목에 배어 있다.
논골담길의 체험형 전시관 ‘묵호, 시간여행호’. 어민들이 실제 사용하던 어구와 그 시절의 생활용품, 간식을 진열해 놓았다.

좁다란 언덕길을 오르자 형형색색의 지붕과 담장이 이루는 거대한 모자이크화를 맞닥뜨린다. 동해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어린 곳, 별빛마을과 논골담길 풍경이다. 석탄, 시멘트, 수산물을 실어 나르며 어엿한 국제 무역항이 된 묵호항은 한때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로변에는 영화관 수 곳과 백화점이 성업했고, 일꾼들은 항구 뒤꼍 가파른 언덕 위 다닥다닥 지은 판잣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게가 살았다는 ‘게구석’, 제를 지내던 사당이 자리했다는 ‘산제골’, 덕장에 오징어와 명태를 실어 나르느라 땅이 논처럼 질퍽했다는 ‘논골’ 등 정겨운 지명이 그 시절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묵호의 활기도 사그라들었으나 지역 주민과 예술가가 의기투합해 진행한 다채로운 도시 재생 사업이 마을의 모습을 차츰 바꾸어 놓았다. 게구석과 산제골은 별빛마을, 등대 아랫마을인 논골은 논골담길이란 새 이름으로 거듭났고, 화사한 그림이 어두웠던 골목과 담장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전망대 ‘바람의 언덕’에 서서 항구부터 언덕까지 이어지는 눈부신 풍광을 굽어보는 시간. 고단하고도 찬란했던 바닷가 마을의 삶이 너울처럼 밀려온다.
주소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15-122(별빛마을 전망대),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일출로 85(논골담길 전망대 바람의 언덕)
문의 033-534-8012

뚜벅아, 라면 묵호 갈래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의 배경은 동해 어달동 삼본아파트다. 이 일대는 예부터 오징어와 명태 등 해산물을 건조·가공해 온 덕장 마을로, 오늘날에도 지역 특산물 묵호태를 생산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동해문화관광재단이 지역관광추진조직(이하 DMO)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한 도보 여행 프로그램 ‘뚜벅아, 라면 묵호 갈래’는 묵호역에서 출발해 일대 명소를 걸어서 둘러본 뒤 묵호태 고명을 올린 라면을 먹는 코스로 마무리된다. 개별형과 단체형으로 나누어 운영하며, 채지형 작가가 단체 여행자를 인솔한다.
문의 070-8883-4707

DMO가 제안하는 로컬 여행법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DMO 지역민과 지역 사업체, 지자체 등 주체 간 협력을 독려해 관광자원을 발굴하고 지역 자생력을 높이는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해 왔다. 동해시는 2023년 최우수 등급을 받은 데 이어 2024년 ‘한국 관광의 별’에 선정되는 등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4년 연속 공모에 당선됐다. 동해문화관광재단은 DMO 사업인 ‘뚜벅아, 라면 묵호 갈래’를 통해 KTX를 이용한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고, 여행 상점 스탬프 투어와 인증 이벤트를 진행해 지역 소상공인과 상생을 도모한다.

INTERVIEW
여행 작가 채지형

동해에 정착해 책방을 운영하시죠. 네, 이곳에 처음 와서는 논골담길 바람의 언덕에 자리한 숙소에서 한 달 살기를 했어요. 해 뜨고 달 지는 묵호 앞바다를 마주하는 동안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지요. 이후 수차례 동해와 서울을 오가며 지내다가 2021년 묵호역 앞에 여행 책방 ‘잔잔하게’를 열고 영화 <봄날은 간다> 주인공 은수가 살던 삼본아파트를 거처로 삼았어요. 지금은 어달항이 내다보이는 집으로 이사했고요. 여기 정착한 지도 벌써 5년째네요. 동해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 <언제라도 동해>가 출간을 앞두고 있어 새삼 설레는 마음입니다.
도보 여행자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 ‘뚜벅아, 라면 묵호 갈래’의 여정을 기획하셨습니다. 묵호역에 KTX가 정차하기 시작한 데 이어 지난 1월 강릉역과 부산 부전역을 잇는 동해선이 개통하면서 뚜벅이 여행자들이 이곳을 부쩍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아직 덜 알려진 도보 여행 코스를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묵호의 영화로운 과거를 간직한 발한삼거리와 동쪽바다중앙시장을 지나 별빛마을 전망대, 논골담길로 이어지는 언덕 능선을 걷는 코스예요. 묵호등대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까지 구경하고 나서 삼본아파트와 덕장마을로 넘어와 ‘문화 팩토리 덕장 카페’에서 묵호태 라면을 맛보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이 코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요. 논골담길의 비좁은 골목길을 거닐며 과거와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뭉클합니다.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이 저마다 길을 내며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기도 하고요. 여러분도 이곳에서 자신만의 길을 발견해 보세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갈래라는 걸 늘 기억하시길.

한 걸음 더, 채지형이 권하는 동해의 맛
논골담길을 오른다면 평화로운 분위기의 카페 ‘103LAB(랩)’에 들러 보세요. 서정적인 논골담길 풍경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만날 수 있어요. 동해안에서 나는 식재료로 건강한 요리를 만드는 다이닝 ‘한섬’도 매력적입니다. ‘묵호 앞바다 문어 카르파초’ ‘동해 보리새우무침’ ‘망상에서 자란 째복 와인찜’ ‘비천골 감자로 만든 뇨키’ 등 메뉴 이름부터 남다르지요. 망상동의 숲에 안긴 카페 ‘현상소’는 유럽의 소도시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에요. 커피 맛이 뛰어난 데다 단호박 파이, 사과 파이 등 디저트도 맛있어요.

<언제라도 동해>
여행자에서 생활자가 된 작가의 동해살이 에세이. “동해는 봄 햇살처럼 따스하다. 여행자를 환영하고 응원하는 마음, 자신의 고향을 사랑하는 온화한 마음이 곳곳에 묻어 있다.”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모든 글줄에 묻어난다.
채지형 지음 푸른향기 펴냄

2. 읽고 쓰며 기록하는 마음
잔잔하게 & 연필뮤지엄

사랑스러운 소품, 사려 깊은 책들이 한데 모여 있다.
연필의 다채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연필뮤지엄.

동네 서점은 마을과 문화를, 여행자와 지역민을 잇는 구심점이다. 묵호역에서 굴다리를 지나 5분 정도 걷다 보면 여행책방 ‘잔잔하게’가 손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방인과 묵호 사람들의 사랑방인 이곳은 여행 작가 채지형·조성중 부부가 4년간 운영해 온 공간이다. 지구 각지에서 흘러든 이국적인 물건과 귀한 서적, 부부가 직접 촬영한 근사한 풍경 사진은 물론 송지현 작가의 에세이 <동해 생활>처럼 강원 지역의 삶을 아우르는 책, 영화와 문학을 경유해 여행의 감각을 환기하는 <여행의 말들> <여행하는 소설> 같은 책이 방랑벽을 부추긴다. 실컷 읽었으니 마음껏 끼적이고 싶어진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연필을 주인공으로 한 박물관, 연필뮤지엄으로 걸음을 옮긴다. 디자이너 이인기 관장은 40여 년간 100여 개 도시를 여행하며 수집한 연필 3000여 점을 다채로운 테마로 큐레이션했다. 길이 18센티미터 남짓의 가느다란 필기구 위에 새긴 사랑스러운 캐릭터, 강렬한 브랜드 슬로건, 알록달록한 패턴이 쉴 새 없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어령, 김훈, 승효상 등 연필을 사랑한 명사들의 이야기와 연필 체험 공간 등을 한자리에 마련해, 쓰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만끽하게 한다.
주소 강원도 동해시 발한로 215-2(잔잔하게), 강원도 동해시 발한로 183-6(연필뮤지엄)
문의 0507-1352-3514(잔잔하게), 033-532-1010(연필뮤지엄)

3. 손안에 쥔 작은 행복
무코야 선물가게 & 바다바란

시원한 바다를 마주한 무코야 선물 가게. 구매한 물건을 창가에 모아 놓고 인증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필수 코스다.
장 골목 한편에 홀연히 자리한 상점, 바다바란. 알록달록한 테트라포드 모양 소품부터 반려돌 ‘어도리’까지, 동해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얀 외벽에 바다만큼 푸른 지붕을 얹은 집, 무코야 선물가게는 논골담길의 다정한 이정표다. 금계국이 흐드러진 앞마당에 놓인 벤치는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온 방문객을 위한 것이다. 덕분에 묵호등대와 시원한 바다 전망을 쉬엄쉬엄 감상할 수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창문 너머로 넘실거리는 파도와 벽 한쪽에 붙여 둔 타륜에 시선이 머문다. 크루즈 선실처럼 꾸민 근사한 공간엔 묵호등대, 어달항, 묵호역 등 동해를 대표하는 장소를 담아낸 이곳만의 시그너처 자석과 엽서가 빼곡하게 자리해 있다. 물고기, 해달, 고양이 모티브 굿즈도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오래도록 추억하게 한다. 동쪽바다중앙시장 골목 한편엔 무인 상점 바다바란이 있다. 동해를 바라보며 성장한 두 친구 나리와 예슬이 운영하는 곳으로, 레진 아트에 조가비와 바다 유리를 접목해 만든 작고 영롱한 물건을 판다. 모빌, 열쇠고리, 자석, 반지와 팔찌까지 어느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물건을 고른 뒤엔 ‘뿔소라 명언 뽑기’에 도전한다. 소라 껍데기 안에 특별한 메모가 들어 있어 여행 운을 점치기에 그만이다. “삶의 파도들이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인도 경전의 한 구절에 마음 속 격랑이 고요해진다.
주소 강원도 동해시 등대오름길 24-5(무코야 선물가게), 강원도 동해시 시장안길 7(바다바란)
문의 0507-1328-2340(무코야 선물가게), 0507-1424-1722(바다바란)

4. 걷기 여행 에필로그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 어달항

도째비골 해랑전망대는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묵호 바다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게 한다.
호젓한 바닷가 마을의 아침.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물빛이 투명하다.

어둠이 내리면 도깨비불처럼 기묘한 푸른빛이 번쩍이던 골짜기. 도째비골이란 지명은 도깨비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 ‘도째비’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스카이밸리’라는 이름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했지만, 도째비처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59미터 높이에서 바다를 굽어보는 아찔한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골짜기 바닥까지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나선형 슬라이드, 골짜기 이편과 저편을 짜릿하게 가로지르는 스카이사이클이 상상 이상의 스릴과 긴장감을 안긴다. 원 없이 걷고 발을 구른 뒤엔 어달항에서 지친 다리를 쉬어 간다. ‘어달’의 어원은 고구려 말, 샘을 ‘어을’, 산을 ‘달’이라 부르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선비가 많이 나던 고향이라는 뜻에서 한묵(翰墨)의 ‘묵’을 따 이름 붙인 묵호보다 훨씬 앞선 이름인 셈이다. 이즈음 어달항이 자주 회자되는 이유는 총천연색 테트라포드와 쌍둥이 등대가 이루는 채도 높은 풍경에 있다. 한낮의 햇살이 내려앉은 여름날 항구. 빨강, 파랑, 하양, 분홍, 노랑···. 모든 것이 본연의 색으로 빛을 발하는 시절이다. “동해의 푸른 꿈이 출렁이는 곳, 여기가 어달항이라네.” 방파제에 적힌 문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듯하다.
주소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2-109(도째비골 스카이밸리), 강원도 동해시 일출로 230(어달항)
문의 070-7799-6955(도째비골 스카이밸리), 033-530-2272(어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