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잘 자란다, 될성부른 아역 배우들

2025년 05월 02일

  • WRITER 정수진(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지금 가장 빛나는 아역 배우들과 시대를 주름잡은 아역 배우 변천사.

영화 <승부>에서 어린 이창호로 분한 김강훈.

사실 아역 배우란 말은 다소 모호하다. 아역(兒役)이란 단어는 연극이나 영화 등에서 어린이 역할 또는 그 역을 맡은 배우를 뜻하는데, 요즘은 ‘주인공 누구누구의 어린이 역할’이 아닌 한 명의 캐릭터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인공의 어린 시절 역할로 짧게 등장해서 성인 배우 못지않은 열연을 펼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 재미있게도 올해 어린이날 저녁에 방송하는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는 2009년생 문우진과 2011년생 김태연이 각각 영화와 방송 부문 신인연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성인 배우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연기를 선보였단 소리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부마자 소년으로 눈길을 끈 문우진.

요즘 제일 잘나가는 얼굴들
최근 남자 아역 배우 중 눈에 띄는 이름은 단연 김강훈과 문우진이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인 동갑내기로, 몇몇 배역을 읊으면 바로 알아챌 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먼저 김강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궤짝 안에서 떨던 어린 유진 초이로 얼굴을 알린 그는 <동백꽃 필 무렵>의 필구 역으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다. <마우스>의 어린 사이코패스나 <재벌집 막내아들>의 어린 진도준도 많은 이가 강렬하게 기억하는 얼굴. 최근 개봉한 영화 <승부>에선 어린 이창호로 분해 조훈현 역의 이병헌에게 당돌하게 대응하는 모습으로 초반부 긴장감을 책임졌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김강훈이 이병헌의 아역이었던 걸 생각하면 퍽 재미난 인연이다.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에서 ‘연기 천재’로 눈길을 끌었던 문우진의 커리어도 만만치 않다. <무인도의 디바>의 채종협 아역,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풋풋한 소년 한준우로 얼굴을 알렸는데, 특히 올해 쉴 틈 없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영화 <검은 수녀들>에서 악령에 씐 소년이 되어 유니아 수녀 역의 송혜교에게 수위 높은 욕설과 침을 내뱉으며 백상예술대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게 시작. 드라마 <트리거>에서 미스터리한 소년으로 소름이 돋게 하더니, <그놈은 흑염룡>에선 ‘중2병’ 그 자체인 어린 반주연이 되어 시청자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5월부터 방영하는 <사계의 봄>에도 주인공 아역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김강훈과 문우진은 이미 <나의 나라>에서 주인공들의 아역으로 합을 맞춘 바 있는데,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에도 문우진이 중학생 양관식으로, 김강훈이 금명의 조카 양제일로 등장하며 지금 제일 잘나가는 아역임을 증명했다.
여자 아역 배우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김태연은 <폭싹 속았수다>의 어린 애순으로 옹골찬 연기를 펼쳐 백상예술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파친코>의 어린 선자와 <굿파트너>에서 주인공의 딸 김재희로 열연한 2011년생 유나도 업계와 대중이 주목하는 이름.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담보>와 드라마 <악귀>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등 전천후로 활동하는 2012년생 박소이도 성인 배우 못지않은 노련한 연기로 사랑받고 있다.

영화 <마음이…>에 함께 출연한 아역 스타 유승호와 김향기.

귀한 만큼 빛났던 20세기 아역 배우들의 활약
콘텐츠가 다양하지 못했던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아역 배우는 누군가의 아역이란 한계 때문에 배우 자체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성공한 아역 배우 출신으로 손꼽히는 이름은 안성기와 고(故) 강수연 정도였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국민배우’로 불린 안성기는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도 까불까불한 어린 소년 안성기를 만날 수 있다. 만 세 살에 영화로 데뷔한 강수연은 아역 배우가 성인 배우로 성공한 첫 케이스다. 안성기는 공백기를 거치며 아역 배우의 잔상이 옅어진 후에 성인 배우로 나섰지만, 강수연은 아역 배우로 인지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하이틴 스타로, 다시 월드 스타로 꾸준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1980~1990년대에는 ‘세자·세손 전문 배우’로 불린 이민우를 필두로 양동근, 김민정, 정태우 등이 똘망똘망한 연기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양동근은 드라마 <서울뚝배기> <형> 등에서 성인 배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했고, 김민정은 1991년에만 무려 20편의 CF를 찍었다. 그러나 이들 외에 성인 배우로 안착한 케이스는 드물었다. 드라마 <달동네>의 ‘똑순이’로 전국구 인지도를 쌓은 김민희나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로 큰 사랑을 받은 이건주처럼 시대를 호령한 아역 배우도 있었지만, 아역 배우 시절의 강렬한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아역 배우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상처를 입고 사라지거나 일찌감치 얻은 인기와 돈이 오히려 독이 되어 연예계를 떠나는 경우도 많았다. ‘아역 배우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징크스가 옛말이 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 이야기다.

성공한 아역 배우의 계보를 잇다
2000년대 들어서며 성인 뺨치는 존재감으로 스타급 인기를 구가하는 아역 배우가 많아졌다. ‘국민 여동생’이라 불린 문근영이 대표적. 2000년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송혜교의 아역을 맡으며 눈도장을 찍은 문근영은 영화 <장화, 홍련>을 거쳐 <어린 신부>로 스타덤에 올랐다. 문근영 이후로 ‘국민’ 타이틀은 여러 배우가 경쟁적으로 나눠 가졌다. 남자 배우 계보로는 1993년생 유승호에서 1997년생 여진구로 이어지는 흐름이 뚜렷했다. 첫 영화 <집으로…>에서 주연을 맡은 유승호는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걸출한 스타 탄생을 예고하더니, ‘잘 자란’ ‘훈훈한 동생’ 포지션으로 인기를 끌었다. 여진구는 그 뒤를 이어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어린 세자로 등장해 ‘잘생기면 다 오빠’ 타이틀을 달았고, 영화 <화이>로 그해 각종 영화제 신인상을 거머쥐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했다.
여자 아역 배우들의 활약상은 더욱 화려하다. 드라마 <스토브리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무인도의 디바> <하이퍼나이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광폭 행보를 보이는 박은빈과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이어 최근 <재혼황후> 캐스팅 소식을 알린 이세영이 아역 배우에서 성인 스타 배우의 반열에 오른 대표적 케이스다. 1992년생인 이들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타로는 1999년생 동갑내기인 김유정, 김소현이 있다. 이 둘은 <해를 품은 달>에서 여진구와 함께 초반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했는데, 이후로도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눈길을 끌었다. 이 외에도 영화 <증인>으로 만 19세에 각종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2000년생 김향기, 영화 <곡성>에서 “뭣이 중헌디”란 대사로 화면을 씹어 먹은 2002년생 김환희, <폭싹 속았수다>의 오제니로 시선을 강탈한 2006년생 김수안과 드라마 <지옥>에서 풍부한 감정 연기를 보여 준 2006년생 이레 등이 성공한 아역 배우의 계보를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