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토종 곡물 탐구 공간, 공주 곡물집

2025년 03월 26일

  • EDITOR 이미선(여행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김은주

곡물집은 토종 곡물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쇼룸이자 그로서리 카페다. 지역 농부들과 협력해 토종 곡물을 보존하고, 토종 곡물의 다양성을 활용해 제품을 개발한다. 이를 통해 씨앗의 멸종을 막고 지역 생태계를 활성화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느티나무 아래>에는 토종 씨앗과 함께 생존하는 농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잔잔하게 사계절이 흐르는 가운데 마트에선 보기 힘든 곡식과 채소가 자란다. 수확량은 볼품없고 경제성도 낮다. 하지만 농부들은 토종 씨앗이 자연 상태에서 자라고 순환하도록 숭고한 마음으로 파종하고 채종하는 지난한 과정을 반복한다. 고집스럽게 우리 종자의 종별 다양성을 지켜 온 사람들. 곡물집은 그들과 동행한다.
네이버 라인프렌즈의 브랜드 MD였던 김현정 대표는 농부처럼 삶을 주체적으로 일구기 위해 가족과 함께 충남 공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2020년 8월, 제민천 인근 한옥에 터를 잡고 ‘곡물집’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쌈지농부’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농가와 농부를 브랜딩하던 남편 천재박 대표와 함께였다. 자연이 키운 농작물의 가치와 농부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주목한 것은 토종 곡물. 특정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해 오랫동안 살아남은 곡물이다. 곡물집은 토종 곡물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쇼룸이자 그로서리 카페다. 지역 농부들에게 공급받은 작물을 활용해 다양한 음료와 디저트를 선보인다. 그뿐 아니라 산지의 매력을 탐구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 지속 가능한 미식 경험을 디자인하는 등 도시와 농촌을 잇는 일을 하고 있다.

토종 곡물을 전시한 곳간 같은 카페
“곡물집의 ‘집’은 한자로 모을 집(集) 자를 써요. 천재박 대표는 평소 ‘치즈집’ ‘마늘집’ ‘간장집’처럼 하나의 카테고리 내에서 습관처럼 다양한 품종을 수집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첫 번째 프로젝트가 토종 곡물을 모으는 ‘곡물집’이 된 거죠.”
쇼룸은 2020년부터 곡물집이 수집하고 탐구한 토종 곡물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곡물 형태를 볼 수 있도록 쇼케이스에 담아 전시하고 이름표를 붙였다. 선비잡이콩, 대추밤콩, 베틀콩, 아주까리밤콩, 비목수수, 재팥, 버들벼, 흑갱, 돼지찰벼 등 이름이 모두 낯설다. 쇼케이스 옆에는 해당 곡물의 역사 및 곡물집의 탐구 활동을 적은 카드와 노트를 비치했다. 맛과 향, 식감과 목 넘김은 물론 어울리는 음식까지 적었는데, 효능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토종 씨앗 보존과 지속 가능한 미식에 방점을 찍고 곡물 자체의 가치를 알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향을 맡고 맛을 보면서 직접 토종 곡물을 경험한 다음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음료로 제조해 드려요. 토종 곡물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죠. 처음에는 토종 곡물을 접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선택하기 어렵지만, 한번 오셨던 분들은 알아서 주문을 해요. 인기 있는 조합은 제품으로 출시하기도 하고요.”
곡물집은 토종 곡물이란 공통분모 아래 다양한 미식을 탐구하는 실험실 같다. ‘같은 콩(사실 커피콩은 씨앗이다)인데 커피콩과 토종 콩을 볶아서 섞으면 어떤 맛이 날까?’ ‘싱글 오리진 커피처럼 하나의 곡물 가루로 음료를 만들면 곡물 특유의 맛이 도드라질까?’ 호기심 가득한 실험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바로 고객. 이들의 피드백은 다시 곡물집의 데이터베이스로 쌓인다. 전문가 소견이 아니기에 김현정 대표는 이러한 활동에 ‘탐구’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볍고 경쾌하게 공간을 이끌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지역 장인이 로스팅한 원두에 곡물 가루를 블렌딩한 커피 티백과 선비잡이콩, 대추밤콩, 베틀콩, 아주까리밤콩으로 만든 곡물 차 ‘미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콩·밀·팥·수수 네 가지 토종 곡물과 커피 원두 4종을 블렌딩한 커피백. 그리고 토종 곡물 가루로 만든 미수.

곡물집이 지역과 공생하는 방식
“모두가 알 것 같지만 사실 토종 곡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토종 작물의 매력을 익히 알았고, 좋은 생산자는 물론 농업 기반 기관과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비즈니스 모델을 구체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전국에 흩어져 있는 토종 곡물을 모으는 것은 다른 문제였죠.”
토종 곡물은 누가 얼마나 생산하는지 알 수 없고, 개인이 소량 생산해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아 정량화가 어렵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비즈니스 모델로 낙제점이다. 그러나 토종 작물을 기르는 농부들 역시 곡식을 파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대물림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다. 올해 농사를 쉬어 씨앗을 남기지 못하면 내년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곡물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힘들어도 매년 조금씩 농사를 짓는 것이다. 김현정 대표는 그와 같은 사명감을 지닌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에 도움을 구했다. 이곳은 전국을 다니면서 토종 씨앗을 모으고,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작물 농사를 이어 가는지 조사하며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민간 단체다.
“곡물집은 낯선 토종 곡물을 경험하고 친숙하게 만들어 식생활화 하기 위한 활동을 해요. 토종 곡물이 일상이 되면 소비가 늘고, 농부들은 생산량이 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죠. 곡물집을 운영하며 지역 생산자들과 네트워크가 생겼고, 그 결과 생산량이 늘어난 경우가 많아요. 자식 같은 농산물이 어디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모르는 것보다 곡물집을 통해 소비되길 바란다며 문의하는 젊은 농부도 많아졌어요.”
반대 경우도 있다. 김현정 대표는 우연히 공주에서 유기농 밤 농사를 짓는 생산자와 만나 대화를 하다 밤을 이용한 디저트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밤은 1~2주마다 불규칙하게 소량 입고된다. 시작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다. 말이 유기농 밤 농사지 산을 통째로 가꾸는 일이기에 안정적인 공급이 불가능하니까. 밤을 올리는 와플은 앉은키밀을 사용한다. 소량의 밀을 가루로 만들어 줄 제분소를 찾지 못한 농부는 밀가루를 대량 만들었는데, 판로가 막히자 곡물집을 찾아왔다. 와플에 밤을 올린 곡물집의 인기 메뉴는 그렇게 탄생했다.
“곡물집은 토종 씨앗을 대물림하는 농부들의 노력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에요. 가끔 그분들이 오셔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던 일을 하느라 힘들었는데, 곡물의 가치를 알아주고 잘 포장해 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세요.”

곡물집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2024년 8월에 진행된 ACG 아카데미 프로그램. 호스트는 아워플래닛이었다.

지속 가능한 미식을 위한 다양한 시도
“곡물집은 지속 가능한 미식이란 명제 아래 주로 토종 곡물을 다루지만, 궁극적으로 미식 콘텐츠를 만드는 조직이에요. 토종 곡물을 수집하는 일로 시작해 지역 생산자들의 식품 컨설팅을 하고, 지역 생산물을 브랜딩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취향에 맞는 토종 곡물을 찾는 재미도 중요하지만, 보다 입체적인 경험은 일상을 변화시키기도 해요.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해 ‘곡물 경험 워크숍’을 열고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해요. 직접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토종 경작단도 출범했고요.”
다양한 토종 곡물을 직접 감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골라 자신을 위한 밥을 지은 다음 전문 셰프가 계절 식재료로 차린 밥상을 받는 곡물 경험 워크숍은 곡물집의 인기 프로그램이다. 솥에 밥을 짓는 동안 불 조절을 하며 집중하는 시간을 ‘밥멍’이라 하는데, 반응이 좋아 키트로 제작, 판매하고 있다. 키트에는 워크숍 순서와 같은 사용설명서가 들었다. 김연수 작가는 셰프와 함께 소설 속 요리를 만들어 나눠 먹으며 북 토크를 진행했고, 사라져 가는 토종 씨앗을 50명의 디자이너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석한 포스터를 제작해 전시를 열기도 했다.
“곡물집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대부분 토종 곡물이 좋아 타 지역에서 공주로 이주했어요. 일하면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일을 익힌 뒤 독립해서 토종 곡물과 지역 생산물로 상을 차리는 밥집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지요. 토종 경작단은 지역 어르신들로 구성되는데, 자투리 땅에서 토종 작물을 길러 공급해 주세요. 곡물집 워크숍에 참석하는 수강생 대부분이 타 지역에서 오는 청년들이고요. 곡물집을 통해 농부와 소비자가, 청년과 어르신이, 도시와 시골이 연결되는 것 같아요.”
북유럽의 미식 수도 덴마크 코펜하겐은 2000년대 초반부터 덴마크 요리의 정체성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선두에 셰프들이 있었다. 그들이 발표한 ‘뉴 노르딕 키친 선언서’에는 현지 식재료를 사용하고, 자연과 다시 연결되는 생산과 소비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서 매드(MAD) 아카데미가 파생됐다. 환대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미식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의 특강으로 이루어져 수업료가 높은데, 국가에서 장학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김현정 대표는 덴마크 매드 아카데미를 모티브로 지속 가능한 미식을 탐구하는 ‘ACG(A Collective Gastronomy)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농업 분야에서는 교육 콘텐츠가 비즈니스가 되고, 비즈니스 콘텐츠가 다시 교육이 되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ACG 아카데미를 공주시와 협력해 지역 성장을 견인하는 지속가능한 미식 교육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곡물집은 어콜렉티브(A Collective)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브랜드예요. 쇼룸으로 시작해 지속가능한 미식 전반의 제조업, 콘텐츠업, 교육 서비스업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경쾌함을 잃지 않고 유쾌한 탐구를 지속할 우리의 활동을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