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025년 03월 26일

  • EDITOR 이미혜(미술 칼럼니스트, 독립 기획자)
  • PHOTOGRAPHER 서송이

인공지능(AI)이 생활의 일부가 되고 우주 탐사의 새 시대가 열린 지금, 서울 리움미술관에서는 한 편의 SF 영화 같은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다.

안리의 상상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 ‘마음의 눈(S)’(2022).

“왜 우리는 여기 있을까? 모든 것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우리는 모두 혼자인가? 다음은 무엇일까?” 이 철학적인 질문들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 홈페이지에 실린 ‘우리가 우주에 가는 이유’와 연결된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과학자들은 인류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우주를 탐사했다. 반면 어떤 예술가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우리가 ‘지금, 여기’를 여행할 수 있는 보다 심오하고 안전한 방법을 제시한다. 피에르 위그는 그러한 예술가 중 하나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재구성해 새로운 체계를 시험하는 그의 작품에서 시공간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종의 구분 또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7월 6일까지 리움미술관(이하 리움)에서는 프랑스 현대미술가 피에르 위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이 열린다.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동안 화제가 된 바로 그 전시다. SF 영화나 사변적 과학소설 같은 이번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과 리움이 공동으로 제작 지원한 신작들을 포함해 그의 대표작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어 소개한다. 전시 관람객이라면 사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첫째, 당신은 수수께끼를 좋아하는가. 둘째, 암흑 공포증 같은 문제는 없는가. 셋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준비가 되었는가. 만약 모두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자격은 충분하다.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 혹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난 후일지도 모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드람 4’(2011). 수족관 속 브랑쿠시의 유명한 조각 작품(복제품) 안에 소라게가 살고 있다.

제1막 세계의 끝, 혹은 새로운 시작
전시 제목이자 작품 이름이기도 한 ‘리미널’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 말한다. 인간과 자연, 기계, 다양한 종이 공존하는 변화무쌍한 환경,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생명체들이 상호작용하며 진화해 가는 과정,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 1층 블랙박스 전시관의 캄캄한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가운데가 움푹 파인 현무암 조각 ‘에스텔라리움’이다. 태초의 빛이 탄생하기 전, 하늘과 땅이 아직 구분되지 않고 시간 개념도 없는 어느 시공간에 첫발을 디딘 여행자처럼 관람객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이 작품 앞을 지나게 된다. 달 표면에 인류가 남긴 첫 발자국 같기도 한 이 기묘한 표지석에는 “출산 직전 임신부의 배가 남긴 흔적”이라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다. 곧이어 나타나는 건 거대한 스크린. 공허로 둘러싸인 메마른 대지 위, 벌거벗은 여성에겐 얼굴이 없다. 화면 속 여성은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고 손을 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실시간 시뮬레이션 작품 ‘리미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관람객이 접하는 이 영상의 이미지가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미술관 측에 따르면 ‘이 형상의 움직임과 시선은 센서가 포착한 환경 조건과 인공 신경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전시 공간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관람객 수, 온도 등 외부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 가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변화에 따라 작품은 스스로 변모한다. ‘리미널’ 뿐이 아니다. AI와 유기체, 살아 있는 것들로 이뤄진 이 전시에서 고정불변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처럼 각 작품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진행형의 상태로 관람객과 만난다. 예를 들어 ‘주드람 4’에서는 수족관 바닥에 가라앉은 가면을 소라 껍데기 삼아 살아가는 소라게와 화살게를 볼 수 있다. 수지 소재의 이 가면은 추상 조각을 개척한 브랑쿠시의 1910년 작 ‘잠든 뮤즈’를 복제한 것이다. 20세기 모더니즘 예술가가 인체 대신 사물을 조각화했다면 ‘주드람 4’는 이종 교합의 살아 있는 조각이다.
컴퓨터가 생성한 인간 형상은 얼굴 부위가 텅 비어 있지만, 누락된 이 얼굴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한다. 일본 후쿠시마 주변의 핵 배제 구역을 배경으로 한 영상 작품 ‘휴먼 마스크’는 가면을 쓴 원숭이의 움직임을 쫓는다. 폐허가 된 마을의 식당은 원래 원숭이들이 서빙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가면과 가발을 쓰고 사람처럼 옷을 입은 해괴한 모습으로, 원숭이는 나무가 그려진 벽지와 커튼 앞을 오가며 습관적인 동작과 본능적인 행위를 반복한다. 이 가짜 숲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원숭이와 바퀴벌레, 버려진 음식을 뒤덮은 구더기, 그리고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과 바람뿐이다.

실시간 시뮬레이션 작품 ‘리미널’(2024~현재). © 리움미술관

제2막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리미널>은 오페라처럼 1막과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이를 따로 구분 지어 설명하지 않지만, 관람 동선이 있는 미술 전시의 특성상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막과 막 사이를 오가며 그 차이를 느끼게 된다. 1막이 어둠 속에서 전개된다면 2막은 창백한 빛의 세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관람객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의 자국, 혹은 문명의 흔적으로 시작되는 1막이 인간이면서도 인간이지 않은 형상과 이종의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지하의 그라운드갤러리에서 이어지는 2막의 이야기는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을 예고한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반투명한 대형 스크린에서는 정확한 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존재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언뜻 사람 같기도 하고 원숭이, 새, 혹은 구름 사이에 등장한 천사 같기도 한 이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안리(Annlee)를 상상하는 누군가의 뇌 활동을 기록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에 의해 생성’된다. 이러한 ‘U움벨트-안리’의 이미지는 지속적인 학습과 인식 과정을 거치며, 이미지의 시퀀스들은 주변 조건의 변화에 의해 계속 수정된다. 가상의 인물 안리는 지난해 리움에서 개인전을 연 필립 파레노의 작품에도 등장했다. 친구 사이인 이 둘은 1999년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이차원 배경 캐릭터의 저작권을 구입해 이것에 안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른 작가들과 함께 다채로운 형식으로 안리를 모델로 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아무도 모르던 단역 배우가 일약 스타가 된 셈이랄까? 두 작가는 안리를 재현의 세계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목 아래 안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만화 같은 이미지와 은유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만 피에르 위그가 펼친 일련의 작업들은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 사회의 이면을 놓치지 않는다.
‘U움벨트-안리’ 뒷면에는 ‘암세포 변환기’가 놓여 있다. 인큐베이터 안에는 실제 암세포가 있고, 이들 세포는 환경에 따라 분열한다. 이러한 변화는 현미경 이미지 데이터에 기록되어 다시 ‘U움벨트-안리’ 화면에서 재생산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시장에 비치된 설명문에 따른 정보일 뿐이며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시장 기둥 높은 곳에 주위의 변화를 감지한다는 금색 공들이 매달려 있긴 하지만, 센서들의 정확한 배치와 AI가 이를 해석해 통합 운영하는 과정, 그 기술의 정확한 결과는 여전히 모호하다. 이 모든 것은 허구일까?
이 하드보일드한 원더랜드의 마지막 무대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으로 알려진 이곳은 천문학자들이 태양계 밖의 외계 행성을 연구하는 시험장이기도 하다. 자기 생성 영상 작품 ‘카마타’는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된 해골 모습을 담는다. 영상 속에서 로봇들은 건조한 모래더미 위에 놓인 해골을 중심으로 수수께끼 같은 의식을 수행한다. 이 영상은 시작도 끝도 없다. 관람객이 영상을 보는 동안에도 AI가 실시간으로 편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 속 장소는 분명 현실 세계이지만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풍겨 문명이 극도로 발전하고 난 이후의 미래 세계를 비추는 듯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진화하고 퇴화하고 소멸했다가 다시 태어나는 숱한 존재들. 피에르 위그는 근미래로 향하는 사변적 고찰과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우연적이고 불확실한 이 세계에서 불완전하지만 독특하고 신비로운 순간들을 발굴하여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피에르 위그가 이끄는 이 특별한 세계를 여행해 보라.

피에르 위그 pierre huyghe
1962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피에르 위그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다. 현재는 칠레 산티아고에 거주 중이며, 그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에 소장되어 있다. 다양한 예술 형태를 시험하는 그의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학습하며 진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퍼포먼스를 포함하고 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부터 전시장에서는 황금색 가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과 몸짓을 보이는 이들은 ‘이디엄(Idiom)’이라는 작품으로, 이 역시 전시의 일부이니 놀라지 말 것. 이번 전시를 후원한 럭셔리 패션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는 작가와 협업해 ‘이디엄’ 을 위한 의상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