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따라 시간이 흐른다. 경북 영주의 죽계천과 내성천이 굽이돌아 두 마을을 스친다. 오래된 이야기를 품은 물길은 영주호에 이르러 420리의 긴 여행을 마친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과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 위에 떠 있는 무섬마을
무섬마을에는 다섯 가지가 없다. 농토와 우물, 담장과 대문 그리고 사당. 고택 사이 좁다란 길을 걷다 보면 이 마을에만 있는 다섯 가지도 발견한다.

자전거 타고 시간 여행
영주를 가로지르는 죽계천은 도심을 지나 서천이 되고, 내성천에 실려 무섬마을을 휘돈다. 강물이 둥글게 감싸안은 ‘물돌이 마을’. 외나무다리가 물에 잠기면 섬처럼 고립되는 무섬마을이다. 36년 전에 놓은 콘크리트 다리를 자동차로 건너니, 저 멀리 마을의 상징인 외나무다리와 너른 모래톱, 처마를 맞댄 기와집과 초가집이 보인다. 무섬마을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대중교통이 있지만 승강장까지 10여 분 걸어야 한다. 영주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매주 토요일에 운행하는 ‘물돌이 코스’로 무섬마을에 갈 수 있다. 그렇게 찾아간 마을은 평화롭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외나무다리와 고택이 전부인 곳.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본다.
2013년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섬마을을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다. 느리게 걷거나 공공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 초록색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오른쪽으로는 햇살에 반짝이는 내성천과 모래톱, 왼쪽으로는 단정한 고택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가끔은 뒤로 멀어지는 풍경이 아쉬워 자전거를 멈추기도 한다.

마을 입구 오른쪽 끝에는 무섬자료전시관이 있다. 마당 가운데 놓인, 시인 조지훈의 별리(別離) 시비가 발길을 붙든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 / 나직이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 … /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 방울 소리만 아련히 / 끊길 듯 끊길 듯 고운 메아리…”. 청록파 시인으로 무섬마을 김성규의 사위였던 그는 방학 때마다 이곳에 내려와 시심(詩心)을 쌓았다. ‘겨먹이’ ‘띠앗강변’ 등 무섬마을과 관련된 표현은 그의 작품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전시관은 그리 크지 않지만,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품과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만죽재, 오헌 고택 편액과 흥선대원군이 쓴 해우당 편액 진본을 비롯해 무섬마을 출신 선비들의 책과 문서, 무섬마을과 외나무다리 조형물 등이 무섬마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준다.
1989년 마을과 세상을 잇는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오직 외나무다리뿐이었다. 매년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던 다리. 가마를 타고 시집와야 했고, 상여를 타야만 나갈 수 있었던 다리. 불과 150미터 길이의 다리에는 지난 수백 년의 삶이 서려 있다. 지금의 외나무다리는 마을 주민과 출향민이 힘을 모아 예전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물은 깊어야 1미터 정도지만 다리를 건너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불과 20~30센티미터 너비의 좁은 다리에 발을 내딛는다. 발아래로 흐르는 물만 바라보다가는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다행히도 길 곳곳에 서로 비켜 설 수 있는 짧은 다리,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마주 오는 이에게 길을 양보하며 잠시 멈추는 곳. 외길이라도 혼자가 아니다. 고맙다, 괜찮다 서로를 토닥이는 곳. 바로 무섬마을이다.

한 마을과 한 가족의 시작, 만죽재고택
무섬마을은 1666년(현종 7년) 반남 박씨 박수(朴檖)가 만죽재를 짓고 터를 잡으며 시작되었다. 이후 90여 년이 지난 1757년(영조 33년), 그의 증손서인 선성 김씨 김대(金臺)가 처가인 이곳에 자리 잡으며 마을은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지만 마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40여 가구 50명 남짓한 사람들은 여전히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소박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 360년 역사를 가진 만죽재고택을 찾는다. 멀리서 봐도 기품이 느껴진다. 문 앞에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계단. 촘촘한 것은 사람이, 너른 것은 소가 다니던 길이다. 외양간이 있던 자리엔 다듬이돌과 재봉틀, 인두, 등잔불 등이 놓여 있다. 안채 벽에는 빛바랜 가족사진과 밥상이 걸려 있다.
만죽재는 미음(ㅁ) 자형 기와집으로, 디귿(ㄷ) 자형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가 자연스러운 중정을 이룬다. 마을의 여느 고택과 달리 중문 왼편에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가 있다. 360년 된 고택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정갈한 이 집의 주인은 반남 박씨 가문의 12대 주손 박천세와 그의 아내 장춘옥이다. 고택을 지키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울과 영주를 오가다 4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정착한 입향조로부터 13대째 같은 집에서 살았어요. 저는 이 집 안방에서 태어났고요. 삶의 시작도, 마무리도 이곳에서 하려고 합니다.”
오래된 집은 종종 앓는 소리를 낸다. 국가유산수리기능자의 손길을 빌리기도 하지만, 집 안 구석구석 부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날이 따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군불을 때 습기를 날린다. 집에 사람이 살아야 불을 피우고, 불을 피워야 집이 숨을 쉰다. 오래된 집이 건강한 이유다. 몸을 놀려야 살 수 있는 집에는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 긴 세월 동안 손때 묻은 대청마루에 앉아 찬찬히 집을 둘러본다.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냄새가 안주인이 내준 곡물 차처럼 구수하다.
아궁이 옆 문을 열고 나서면, 장독대를 지나 별채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교육과 시문학 공간이었던 섬계초당.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섬계초당 마루에 서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내성천과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사시사철 자연을 품어 안는 고택. 봄 다르고, 여름 다르다. 아들이 아들에게, 또 그 아들에게 옛집의 지혜를 대물림한다. 그렇게 무섬마을의 시간이 흘러간다.
영주 반띵관광택시
규정 요금의 반값을 영주시에서 지원하는 영주 반띵관광택시. 최소 4시간에서 최대 7시간까지 이용 가능하다. 관광 비수기인 2·7·8·12월에는 10퍼센트 더 지원한다.
문의 www.yeongju.go.kr/open_content/tour/index.do
황금빛 용이 내려앉은 영주호
내성천 상류에 생긴 댐이 주변 풍경을 바꾸고 있다.
댐이 만든 영주호에는 섬과 섬을 잇는 두 개의 다리가 놓였다.

호숫가에 새롭게 깃든 삶
영주 곳곳을 흐르는 물길은 평은면에 이르러 더욱 깊고 푸르러진다. 9년 전 영주댐이 건설되면서 영주호가 생겼다. 그 물 아래, 한때 금강마을이라 부르던 마을이 있었다. 비단 금(錦), 강 강(江). 비단같이 흐르는 강을 품었던 마을은 금강마을이란 이름만 남긴 채 호수 아래로 사라졌다. 400여 년을 이어 온 인동 장씨 집성촌이었고, 내성천이 감싸안은 터전이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천변을 따라 고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마을을 수호하던 국가유산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댐이 완공되면서 모든 것이 물속으로 잠겼다. 이전할 수 있는 것은 옮겼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히 용마루 공원 초입에 조성한 영주 전통문화체험단지에 일부 고택과 국가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호숫가에 새로운 터전을 꾸린 이들도 있다.
영주댐 건설로 생긴 거대한 인공 호수 한가운데, 섬처럼 떠오른 용마루에도 새로운 공간이 조성됐다. 용마루의 ‘용(龍)’은 이 지역 옛 이름에서 따왔다. 댐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용혈리(龍穴里)’, 즉 용의 거처라 불렸다. 자연스럽게 공원 이름도, 다리 이름도 용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영주호 안으로 쑥 들어온 금광리의 하트 모양 땅에는 용마루1공원을, 용두교와 용미교를 건너 만나는 미르미르섬에는 용마루2공원을 조성했다. 이중 용마루1공원에는 댐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전망대와 정자, 카페가 공원에 들어서며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전망대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부담도 적다. 전망대는 용이 구름을 휘감고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건축물로, 영주댐의 총담수량 1억 8110만 세제곱미터를 기념해 18.1미터 높이로 세웠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따라 오르면 탁 트인 영주호가 한눈에 담긴다.


2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망대.
미르, 용이 깨어나다
용마루1공원에서 용마루2공원 주차장까지는 약 700미터. 그 길을 따라가면 두 개의 출렁다리를 건너 옛 평은역사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만난다. 주차장에서 덱을 따라 내려서면 첫 번째 출렁다리, 용미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75미터 길이의 아치교는 예상보다 흔들림이 적지만, 중간에 설치한 여러 개의 투명 유리가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발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호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전율이 밀려온다. 다리를 건너면 장미터널과 산책로가 이어지고, 그 끝에 용두교가 기다린다. 150미터 길이의 현수교로, 용미교보다 조금 더 출렁거린다. 용 꼬리에서 머리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출렁다리를 따라 걷다 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구름, 호수에 반사된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용두교에서 옛 평은역사까지는 두 갈래 길로 나뉜다. 하나는 영주호의 절경을 보며 걷는 길, 다른 하나는 전망대를 향해 오르는 등산로다. 오가는 길에 서로 다른 풍경을 보고 싶어 등산로를 택했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오르니 심장이 빠르게 요동친다. 전망 덱과 기념비 광장으로 내려가면 영주댐 수몰 지역 이주민들의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표석이 보인다. 호수를 향해 자리한 벤치가 혹여 그들을 위한 자리일까 싶어, 순간 가슴 한구석이 시려 온다. 그렇게 10여 분쯤 걸었을까. 동서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조형물 너머로 옛 평은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주댐 건설로 철도가 이설되면서 2013년에 폐쇄했다가 2015년 다시 이전 복원되었다.
영주시티투어 버스
주요 관광지를 알차게 둘러볼 수 있는 영주시티투어 버스가 매주 주말에 운행한다. 요금은 성인 8000원, 청소년·어린이·장애인 4000원. 입장료와 체험비, 식사비는 포함되지 않는다. 코스는 두 가지. 부용대와 관사골, 영주중앙시장을 거쳐 영주댐 관광지와 용마루공원, 무섬마을을 둘러보는 ‘물돌이 코스’와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 죽계구곡 등을 둘러보는 ‘선비 코스’다. 출발 장소는 영주역, 영주시외버스터미널이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해야 하며, 잔여석에 한해 당일 현장 접수도 가능하다.
문의 www.yjtour.kr
풍류와 충절이 깃든 순흥마을
옛 선비의 풍류가 흐르는 땅을 지나 금성대군의 충절과 한이 서린 마을을 찾았다.

선비의 풍류를 따라
영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21킬로미터,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의 비봉산 아래에 순흥면이 있다. 바로 이곳에 우리나라 3대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그 시작이었다. 서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1548년(명종 3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조정에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 담긴 소수서원 현판을 내렸다. 강학당과 장서각, 영정각 등 건물마다 충, 효, 예, 학의 선비 정신이 살아 숨 쉰다.
서원 입구에서 방문자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울창한 송림이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솔향이 마음을 투명하게 한다. 숲을 지나 서원 앞에 다다르면, 죽계천 건너 이황이 터를 닦았다는 취한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 정자에 서면 누구라도 시 한 줄쯤 읊고 싶었을 것 같다. 죽계천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경자바위가 보인다.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백운동)’은 퇴계 이황의 글씨, 그 아래 ‘敬(경)’ 자는 주세붕의 것이다.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축지변으로 죽계천에 수장된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붉은색으로 글자를 칠하고 제를 올렸다는 것. 이곳에도 순흥의 아픔이 서려 있다.
소수서원 위쪽으로는 소수박물관, 선비촌, 선비세상이 자리한다. 2022년에 문을 연 선비세상은 K-문화 테마파크를 표방한다. 한옥, 한복, 한식, 한지, 한글, 한음악 등 여섯 개 테마를 기반으로, 보고 입고 먹고 즐기며 선비정신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한음악 감상실, 다도 체험, 한지 뜨기 체험, 한식 쿠킹 클래스, 한복 천 공예 등 체험 프로그램도 풍성하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한복촌에 있는 18미터 길이의 오토마타 인형극장이다. 영주도령이 과거에 급제하고 한양에서 영주까지 오며 겪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부석사, 소수서원, 무섬마을 등 오밀조밀한 풍경 위로 인형들이 살아 움직인다. 스토리를 읊는 개그맨 김태균의 목소리도 반갑다. 여섯 공간을 누비다 보니 선비세상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어렴풋이 와닿는다. 주야장천 책만 읽는다고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잘 노닐어야 선비다. 멋도 없고 여유도 없는 ‘꽁생원’은 처량하다. 선비세상에서 한바탕 잘 놀고 나니, 마음에 풍류가 흐른다.


영풍장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담다
선비세상에서 나와 선비촌으로 향한다. 봄을 맞아 활기가 넘치는 선비촌. 커다란 선비상 뒤로 ‘무형문화재 제15호 영풍장도장, 풍기 은장도’라 적힌 작업장 간판이 보인다.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니 이면규 장도장이 망치로 무언가를 두들기고 있다. 소뼈로 장도를 만들고 있는 것.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장도에 대해 물으니, 한 자루의 장도를 만들려면 수천 번 손길이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열여덟에 세공 일을 시작한 소년은 이듬해에 스승 김일갑(경상북도 무형유산)을 만나 장도의 길에 들어섰다. 한때는 칼을 만드는 대장장, 칼집과 칼자루를 만드는 장도장, 금속 장식을 만드는 장석장이 힘을 모아 장도를 만들면 전국 팔도강산으로 팔려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한다. 장도 한 자루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에서 보름. 한 달을 꼬박 작업해도 세 점을 완성하기 어렵다. 외롭고 지난한 작업이지만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무형유산 전승교육사로 인정받은 그는 전통 장도 기술을 보전하는 한편, 자신만의 장도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동물의 뿔과 이빨을 이용한 장도, 현대적 감성을 더한 증표 장도, 을자 문양과 일자 장도까지. 그의 손끝에서 장도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새롭게 태어난다.
장도는 허리춤에 차면 패도(佩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낭도(囊刀)로 차는 위치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용도도 다양하다. 호신용으로 지니기도 하고, 노리개처럼 장식용으로 쓰기도 한다. 손주가 팽이를 깎아 달라고 할 때, 체해서 손을 따거나 제사상에 올릴 밤을 깔 때, 향을 자를 때도 장도는 요긴하게 쓰인다. 칼집과 칼자루의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뼈다. 푹 고아 기름기를 완전히 제거한 암소 다리뼈는 단단하고 맑은 흰빛을 띤다. 뼈로 만든 장도는 세월이 흘러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 언제나 첫 마음을 간직하라는 듯 첫 빛을 그대로 유지한다.
“제 호가 소당, 작은 집입니다. 항시 자신을 낮추라는 뜻으로 지었어요. 저는 인생에 100이라는 숫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9단, 은의 순도도 99.99퍼센트. 100퍼센트란 존재하지 않죠. 50년 넘게 장도를 만들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껴요.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장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장인의 손끝,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온기와 열정. 그의 장도에는 그렇게 삶이 녹아 있다.

금성대군의 핏빛 어린 충절
소백산에서 발원된 죽계천은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지나 순흥면을 가로지른다. 죽계천과 나란히 흐르던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피끝마을 표지석을 만난다. ‘피끝’은 말 그대로 피가 끝난 자리. 섬뜩한 이름과 달리 이곳은 슬픈 역사가 깃든 마을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강직한 성품으로 조카인 단종을 보호하려 했으나,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흥도호부로 유배되었다.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했으나, 한 관노의 밀고로 죽음을 당한다. 정축지변(丁丑之變). 그해 순흥은 피로 물들었다. 거사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순흥 근방 30리 안에 사는 사람들까지 무참히 희생되었다. 죽계천을 따라 흘러간 피는 10리 너머 지금의 안정면 동촌1리까지 닿았다고 한다.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고, 약 5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정축지변이 순흥에 남긴 상처는 깊지만, 사람들은 지난 역사를 되새기며 아픔을 보듬는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땅은 불탔다. 다행히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은 고마운 먹거리가 되었다. 순흥 사람들을 먹여 살린 귀한 메밀은 지금 순흥을 대표하는 건강 식재료로 대우받는다. 역사 깊은 메밀묵집도 몇 곳 있다. ‘순흥전통묵집’은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메밀묵 전문점. 매일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쑤어 낸 메밀묵에 진한 멸치 육수와 조밥 한 그릇을 곁들인 묵밥이 이곳의 유일한 메뉴다.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만들어 낸 맑은 맛. 슴슴한 묵밥 한 숟가락에 달큼한 명태포를 얹어 먹으면 진심으로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묵집에서 2킬로미터쯤 가면 금성대군의 마지막 이야기가 깃든 금성대군신단을 만난다. 따스한 봄기운이 신단을 감싸고, 뒤편에는 1200년을 산 은행나무가 바람에 잎을 흔든다. “순흥이 죽으면 나무도 죽고,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난다”라는 옛 노랫가락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정축지변 때 고사한 나무가 226년이 흐른 뒤 잎을 틔우고 가지를 뻗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1683년(숙종 9년), 순흥도호부가 복원된 해였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제청과 주사가 보인다. 제사를 준비하고 지내는 이 두 건물은 1980년 무렵에 만들었다. 매년 봄가을 순흥 유림이 이곳에서 성심을 다해 제향(祭享)을 지낸다. 일각문을 지나 신단으로 들어서면 품(品) 자 형태로 놓인 세 개의 재단과 순의비가 눈에 들어온다. 상단은 금성대군신단, 중단은 이보흠부사신단, 하단은 순절의사신단이다.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재단, 그 앞에 서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영주 한국선비문화축제
5월 3일부터 5일까지 경북 영주시 문정둔치와 선비촌 일원에서 영주 한국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선비의 온기, 만남에서 빚어진 향기’를 주제로 선비의 야간 유등 퍼레이드, 국악 공연, 흥 콘서트 등이 펼쳐진다.
문의 www.yctf.or.kr/seon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