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청년 사업가 한은경 대표가 강원도 영월에서 쑥 약과를 빚는 사연.

강원도 영월은 삼척, 정선, 태백과 더불어 손꼽히는 한국의 폐광 지역이다. 한때 강원도 최초의 탄광 지역이라는 명예로운 수식을 누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강원도 탄광문화촌을 방문하는 것으로 번성기의 역사를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영월을 잊힌 땅으로 치부하기는 이르다. 바닷가가 있는 지역만큼 1년 내내 관광객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빼어난 자연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월에는 청령포가 있다.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된 조선 6대 왕 단종이 머물던 곳. 특히 소나무 숲이 장관인데, 그중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단종의 애달픔을 지켜보았다는 뜻의 ‘관(觀)’, 단종이 슬퍼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의 ‘음(音)’을 합쳐 붙인 이름)에 단종이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령포와 이곳에 서린 단종의 슬픔은 서울에서 나고 자라 사업을 하던 한은경 위로약방 대표를 영월로 이끈 연결 고리였다.

위로가 간절했던 청년 사업가
“그랬구나, 이리 와.” 일상을 무탈하게 보내고 있는 누구라도 순간 마음이 동요할 만한 문구가 위로약방 문에 새겨져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은경 대표와 장하다 실장이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분명 태어나 처음 만나는 이들인데, 두서없이 속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위로약방은 영월 쑥으로 만든 디저트 브랜드이자 카페로, 이미 서울에서 팥 초콜릿 브랜드인 레드로즈빈으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한은경 대표가 2021년 영월 마차리에 문을 열었다. 팥 초콜릿이라는 아이템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연고도 없는 영월에 오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살다 보면 불현듯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한은경 대표의 경우 신학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어머니가 당뇨로 쓰러진 사건이 팥 초콜릿을 개발하는 계기가 됐다. “학생이다 보니 매번 비싼 건강식품을 구입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렴하고 좋은 재료를 찾아 직접 만들겠다 마음먹고 약용·식용 식물도감을 뒤졌어요. 돌이켜 보면 순진했지만 그만큼 절박했던 거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어머니는 고단함을 당으로 푸는 당 중독이었다. 어머니의 자동차 안을 가득 채운 각종 주전부리를 대신할 먹을거리를 찾던 그의 시선이 팥에 멈췄다. “곡물 중 가장 단맛을 낸다”라는 문구에 기대어 팥을 삶고 찌고 굽고, 다양한 배합으로 초콜릿을 더해 가며 연구한 끝에 지금 레드로즈빈에서 판매하는 팥 초콜릿 ‘팥콜릿’을 완성했다. 하늘도 그의 정성을 알아봤는지 놀랍게도 어머니의 증세가 호전됐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이 이런 신통한 것은 특허를 내야 한다고 부추겼다. “서류를 준비해 무작정 변리사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특허를 내는 데 돈이 든다는 거예요. 망연자실해 있는데, 어떤 분이 무료로 도와줄 테니 그 대신 이 사업을 10년간 하겠다는 약속을 하자고 했죠. 2년 전에 약속했던 10년이 지나서 전화했더니, 그걸 기억하고 있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특허라는 날개를 달고 호기롭게 사업을 이어 가던 어느 날, 어머니가 그를 불러 앉혔다. “당뇨가 나은 것은 제가 아침마다 팥 초콜릿을 만드는 정성에 감동한 어머니가 간식도 팥 초콜릿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식이요법을 병행했기 때문인데, 팥 초콜릿이 당뇨 치료약이라고 자만할 거라면 사업을 하지 말라고 하셨죠. 노파심이 드셨나 봐요.”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은경 대표는 어머니의 조언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2012년 레드로즈빈을 론칭하던 때와 달리 저당 디저트가 상대적으로 흔해진 지금도 꾸준히 매출을 유지하는 것은 ‘특허받은 디저트’임을 내세우기보다, 선물 받는 이의 건강을 생각하고 위로와 감사를 전하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이 닥쳤다. 그 무렵 한은경 대표는 서울시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자원을 기반으로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넥스트로컬’ 프로그램을 접하게 된다. “참가자가 창업하고 싶은 지역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어요. 유달리 영월에 마음이 가더라고요. 매년 영월에서는 비운의 어린 왕을 위로하는 추모제인 단종문화제가 열리잖아요. 저도 위로가 필요한 때였으니까요.”


2 위로약방의 디저트는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많다.
지역 사업의 시작이자 전부, 진정성과 사명감
위로약방은 영월군의 도시 재생 사업으로 재탄생한 마차리 폐광촌에 자리한다. 깔끔하게 단장된 마차리는 전봇대를 철거하고 건물 외관을 현대식으로 단장했으며 세대마다 일관된 디자인의 명패가 달린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적어도 초행자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지역 관련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온 한은경 대표의 입장은 달랐다. 막막한 심정으로 며칠을 보내던 그는 마차리에서 환경 미화 작업을 하고 있던 ‘할머니 무리’를 맞닥뜨린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강원도의 정기가 또렷하게 느껴지는 할머니들과 친해지려고 고군분투하던 그는 카페 안으로 할머니들을 들이는 데 성공한다. “서울은 실력이 곧 사업과 수익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지역은 관계가 훨씬 중요해요. 제가 서울에서 얼마나 잘나가는 청년 사업가인가보다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지역민과 소통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죠.”
목표는 뚜렷했다. 지역 식재료가 들어간 디저트를 개발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 커뮤니티와 상생하는 것. 할머니들에게 보람과 행복도 선사하고 싶었다. 영월은 내륙에 위치한 산간분지로 기온 차이가 큰 대륙성기후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많이 나고 석회질 땅이라 특산품인 사과, 포도 등 과일의 당도가 높다. 고추, 옥수수 역시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평균연령 70~80대 할머니들은 일찍이 농사일에서 물러난 상황. 고민이 깊던 차에 한 할머니의 제안이 귀에 쏙 들어왔다. “산에 가서 쑥이라도 캐 올까? 그건 공짜인 데다 품도 얼마 안 들어.” 게다가 영월 쑥은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을 정도로 품질과 향이 독보적이다. 한은경 대표는 할머니들이 캐 오는 쑥을 킬로그램당 가격을 매겨 지불했다. 그렇게 할머니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관계를 다져 갔다. 지금은 영월협동조합에서 쑥 가루를 받아 디저트와 음료를 만든다. 또 위로약방에 모이는 할머니들의 모임을 ‘위따뚜이’(위로약방과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의 합성어)라 이름 지어 소속감을 부여했다. 1년간 빵, 쿠키, 사탕, 초콜릿 등 각종 디저트를 만들며 시행착오를 겪었고 쑥 약과에 정착했다. 위따뚜이 멤버들은 쑥 약과를 제조하는 날이면 위로약방에 모여 시급을 받고 약과를 만든다. “반죽을 약과 틀에 넣고 꾹꾹 누르면 되는데, 이게 치매 예방에도 좋다고 하더라고. 여기서 일하는 날이 기다려지고 아주 행복해요.” 위따뚜이 회원 중 한 분인 김분철 할머니의 손길에 흥이 붙는다.
한은경 대표는 영월에 대한 청년층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위로 콘텐츠’도 기획했다. 직접 작가 지원 공모를 냈고, 이를 통해 선발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창작한 캐릭터 팥곰, 팥다, 캐모마이언의 입을 빌려 인스타그램용 ‘위로툰(위로를 전하는 웹툰)’을 제작한다. 한은경 대표는 특별한 사업 철학은 없다고 겸손해하지만 청년 사업가로 10년 넘게 거쳐 온 모든 과정에서 이미 실력과 감각을 증명해 냈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에게 배운 건강한 맛에 대한 기준, 연고도 없는 지역에 들어와 둥지를 튼 용기, 지난 6년간 넥스트로컬 프로그램에 지원한 청년 사업가 중 유일하게 영월을 지키고 있는 끈기, 그리고 지역 사업에 대한 사명감이 만들어 낸 결과다. “영월에 와서 비즈니스만 하고 떠난 외부인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이 사업이 지역 사회를 위한 안정적인 선순환 시스템을 갖추는 데 최대한 기여하고 싶습니다. 할머니들과의 의리는 말할 것도 없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