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처럼 거대하고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모여 앉은 울산 울주 땅. 경남과 경북을 잇는 길목인 울주군 언양읍엔 예부터 경상도 7개 고을의 물자가 집산해 ‘칠읍장’이라 부르던 유서 깊은 전통시장, 언양알프스시장이 선다. 쇠를 달구고, 기름을 짜고, 고깃국을 끓여 내는 훗훗한 장날 풍경 앞에서 겨우내 언 몸과 마음을 녹인다.


2 언양매일대장간의 박병오 대장장이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새봄을 맞으며
언양매일대장간
땅이 풀리고 싹이 돋는 시절. 나지막이 들려오는 봄의 귀엣말에 누구보다 빠르게 감응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흙과 더불어 사는 농군이다. 이 무렵 언양매일대장간에 팽팽한 활기가 감도는 이유다. “쇠스랑, 괭이, 낫, 호미, 도끼 같은 쇠붙이를 새로 들이거나 고쳐 쓰려는 손님이 부쩍 많이 찾아옵니다. 농사지을 채비를 하느라 그렇지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장날, 박병오 대장장이는 한나절을 내리 불 앞에서 보낸다. 잡초 뽑는 호미와 흙 고르는 호미가, 풀 베는 낫과 나무 치는 낫이 어떻게 다른지 이따금씩 말을 보태면서.
1941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울주로 이주, 열두 살 때부터 석남 장터의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기 시작한 박 대장장이는 철광석을 생산하던 달천철장의 역사와 울산 대장간 문화의 명맥을 잇는 최후의 인물이다. 언양종합상가시장에 붙어 있는 그의 자그마한 대장간엔 쇠를 달구는 화로(울산 말로 ‘호덕’), 달군 쇠를 두드리는 모루, 담금질하는 물통, 날을 벼리는 숫돌과 그라인더가 한데 들어차 있다. 쇠붙이를 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날을 갈거나 부러진 칼자루에 쇠를 덧대어 붙이는 일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온갖 주문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는 공간이다. 금속성의 리드미컬한 소리, 번쩍번쩍한 불빛으로 가득한 일인극의 무대이기도 하다.
언양매일대장간의 트레이드마크 ‘오’가 새겨진 쇠붙이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풀무꾼에서 메질꾼, 메질꾼에서 집게잡이 대장이 되었을 사내의 다부진 세월이 머릿속을 스친다. “뭐든 다 해낼 수 있어야 이 대장간을 지키지요.” 무수한 담금질로 점철된 단단하고 뜨거운 삶에 새 봄빛이 스민다.


2 최신 설비에 전통 방식을 도입해 특유의 풍미를 유지하고 있는 울산참기름의 제조 공정.
깨 볶는 인생
울산참기름
시장 골목만큼 다종다양한 후각적 자극을 경험하는 공간도 드물다. 이 즈음 언양알프스시장에 가면 그 유명한 언양 미나리의 보드랍고 풋풋한 향내, 울산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의 싱싱한 물 내음,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농밀한 음식 냄새가 뒤섞여 기분 좋은 혼란에 빠지곤 한다. 화려한 감각의 향연 속에서 코가 무뎌질 무렵, 존재감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한다. 근원지는 37년 세월을 버티고 선 방앗간, 울산참기름이다.
경북 영천을 비롯해 영남 등지를 전전하며 영업을 이어 온 이곳은 1988년 울주 언양장에 다다라 새 이름을 내걸고 새롭게 출발한다. 1대 김상준 대표를 이어 2대 김무환 대표가 오랜 시간 살림을 꾸렸고, 이제는 그의 아들인 3대 김성호 대표가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여기 정착한 해에 태어난 아이가 제 일을 물려받았으니,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김무환 대표의 환한 얼굴에 뿌듯함과 애틋함이 교차한다.
울산을 넘어 경남과 경북 각지에 단골을 두고 있는 이 방앗간의 노하우는 불을 때고 솥에 깨를 볶아 분진과 가스를 날리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데 있다. 질 좋은 깨를 엄선하는 것은 물론, 말끔하게 세척·건조한 깨를 정제하고 압착해 이곳만의 고유한 풍미를 낸다. “색이 맑고 향미가 신선한 게 우리 집 기름의 특징이지요.” 참기름과 들기름, 고춧가루, 미숫가루가 나란히 늘어선 매대 앞에서 절로 입맛을 다신다. 인생의 고소한 재미가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2 장날이면 직원들의 손놀림이 더 바빠진다. 밑반찬과 고명도 푸짐하게 내준다.
뭉근한 진심
알프스시장곰탕
언양알프스시장의 특산물을 꼽자면 쇠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까지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던 이곳에서 언양식 불고기가 탄생해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는가 하면, 잡고기를 오래 끓여 낸 언양식 소머리국밥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언양터미널사거리 뒤쪽 골목에 자리한 알프스시장곰탕에 가면 우시장의 역사와 언양 식문화의 내력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최영동 대표를 만날 수 있다. “1959년 12월 11일, 제가 바로 이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건물 맞은편에서 우시장이 열렸고, 멀지 않은 곳에 어시장이 서곤 했죠. 어린 시절엔 고기 냄새가 지겨워서 국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운명처럼 여기서 곰탕을 끓이고 있더군요.”
아내 정춘화, 아들 최병우 씨와 함께 꾸려 가는 식당이 올해 개업 10년 차다. 쇠고기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덜 나게 하는 방법을 비롯해 수년간 품질 향상에 골몰했고, 오늘날 밀키트 월간 판매량 3000개를 기록할 만큼 맛 좋은 곰탕을 완성해 냈다. 말갛고 순수한 국물 맛의 비결은 세 번에 걸쳐 18시간 동안 국물을 끓이는 것. 우족과 잡뼈, 사골, 머릿고기를 넣고 한번 끓여 낸 뒤에 두 차례 더 달이듯 가열한다. 이 과정에서 염도가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조리 시간을 적절히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고생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욕심내지 않고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저 이 국물 맛을 손님들과 오래도록 나누고 싶어요.” 그가 내준 온기 어린 한 그릇에 진심이 그득하다.
주소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장터1길 12-1
문의 0507-1385-5728
장날 2일,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