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아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지금, 한국 근현대 미술의 120년 역사가 궁금하다면 대구로 가야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대구의 분지 지형은 마치 깊은 마당 같다. 소설가 김원일은 자전소설 <마당 깊은 집>에서 1950년대 대구 시가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시내 중심 거리인 중앙통·향촌동·송죽극장 일대에는 넥타이를 맨 양복장이와 양장 차림에 뒷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은 젊은 여자들로 넘쳤고, 군복 차림의 한국군과 미군도 민간인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편 피란민·실업자·지게꾼·거지·구두닦이 또한 발에 차이는 돌멩이만큼 널려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었던 대구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문인과 미술가도 그중 하나였다.
전후의 혼란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이 ‘마당 깊은 집’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매일같이 전시되는 문화 예술의 보고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해 수성구에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한 데 이어 최근에는 대구미술관이 새 단장을 마쳤다. 대구미술관은 예식장으로 사용하던 부속동을 미술관으로 확장하면서 단일 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 되었다. 지난 1월 14일에 시작된 상설전 <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과 소장품 하이라이트전 <계속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영원히 계속된다>는 2011년 개관 이후 대구미술관이 지속해 온 근현대 미술 아카이빙과 오랜 연구의 결과물이다.


대구 예인들의 특별한 가계도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은 아마 이 지역 명물인 막창, 뭉티기만큼이나 익숙할 것이다. 박목월, 조지훈, 현진건 같은 소설가나 시인뿐 아니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초대 작가 곽훈을 비롯해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 일본의 획기적인 미술 운동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우환,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회고전을 열고 있는 이강소 등 수많은 미술가가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추사 김정희의 서풍을 확장해 한국 근대 서화를 새롭게 정립했다고 평가받는 서화가 서병오(1862~1936)도 그중 하나다.
대구미술관은 첫 번째 상설전 <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을 준비하며 서병오를 중심으로 ‘대구 근대 문화의 인물 관계도’를 정리했다. 서병오는 ‘우현서루’라는 도서관을 세워 인재 양성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이일우와 사돈지간이다. 이일우는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의 백부이기도 하다. 최초의 국내 서양화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큰형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의 남편이기도 하다. 대구 계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1922년 대구 최초의 서양화 연구회를 설립했다. 동양화가 이여성은 이상정과 함께 대구 화단의 한 축을 담당했다. 언론인이자 학자이기도 한 그는 한국 근대 리얼리즘 회화를 대표하는 이쾌대와 형제다. 또 수채화가 서동진과 그의 제자 이인성 등은 대구 지역 서양화가 모임인 ‘향토회’를 통해 이들 예술가들과 연결된다.
앞으로 약 3년간 계속되는 상설전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 근대 회화의 흐름을 보여 준다. 1963년 김구림과 함께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추상미술 그룹 ‘앙그리(Angry)’를 창설한 이영륭, 한국적 추상화를 개척한 정점식의 작품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시는 대구라는 지역을 특정하지만 한국 근대 회화의 큰 흐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피란 시절 대구역 앞 경복여관 2층에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 이중섭의 일화나, 당시 향촌동 일대 다방에 모여 교류하던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격랑의 시대에 뒤얽히고 때로는 함께 저항해 온 이들을 지역으로 구분 짓는 건 의미 없어 보인다.

소장품 상설전.
변화하는 풍경, 변화하는 미술관
본래 예식장 건물이던 부속동에서는 소장품 하이라이트전이 열리고 있다. 본동과 부속동을 잇는 통로와 라운지까지 전시 공간이다. 작품들이 전시장과 미술관 안팎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근대 회화전이 열리는 제4·5전시실에서 이곳 제6전시실로 가는 길에는 미야지마 타츠오의 작품 ‘변화하는 풍경/변화하는 대구미술관’(2024)이 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풍경을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적힌 미러 시트 사이로 볼 수 있는데, 이 숫자는 관람객 참여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와 관람객이 함께 선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만나는 일본 작가의 작품은 시대의 변화를 상기시킨다. 이우환의 ‘관계항’(1984)은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싼 팔공산의 너른 자락과 마주한다. 원재료 상태의 물질 그 자체를 예술의 언어로 활용하는 그는 산업사회를 상징하는 강철판 위에 자연물인 돌을 올려 둠으로써 이질적인 항들을 작품 속에 병치시킨다. 신랑 신부의 가족과 하객들이 인사를 나누고 부조금을 받던 이 공간의 큰 창 밖으로는 팔공산 아래 아파트 단지와 삼성라이온즈파크가 보인다. 유현한 정취와 일상의 활력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이다.
‘계속 변화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영원히 계속된다’라는 제목처럼 이번 전시는 삼라만상의 순환과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자연과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소장품이 주를 이룬다. 관람객은 산책하듯 전시장을 거닐며 현대 영남 서화계의 상징적 작가인 서근섭의 ‘대나무’ 시리즈, 정용국의 ‘유기적 정원’(2007) 등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예술적 명상의 비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돌무더기다. 리처드 롱의 ‘한강 서클’(1993)로, 작가는 1993년에 한강 변을 걸었던 경험을 토대로 마치 종교적 제식처럼 조심스럽게 돌멩이들을 골라 둥글게 펼쳐 놓았다. 이 거대한 서클 너머로는 사각 프레임 안의 찻잔들이 보인다. 곽훈의 ‘찻잔’(1998~2012)은 언뜻 흙에 묻힌 유물 같다. 가까이 가서야 종이에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 멤버로,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한 곽훈은 한국적 정서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조선 시대 도공들이 만든 다완을 통해 선(禪)의 세계를 보여 준다. 30년 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그가 선보인 ‘겁/소리-마르코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 또한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 설치·퍼포먼스 작품이었다.
소장품전인 만큼 기증자 이름도 눈에 띈다. 이우환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한 김인한 유성건설 회장,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 등 대구에 기반을 둔 유명 미술 컬렉터들이다. 이건희 컬렉션도 심심찮게 만난다. 삼성가의 미술 사랑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고미술 수집에서 출발했다. 상설전, 소장품 하이라이트전과 더불어 오는 6월 22일까지 1980년대 대구 미술에 초점을 맞춘 네 번째 대구 포럼이 열린다. 2027년 대구대공원까지 들어서고 나면 미술관로는 더욱 활기를 띨 것이다. 대구미술관과 이웃한 대구간송미술관을 연결하는 계단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예술(Art that transcends time).” 마당 깊은 집의 안마당에는 새로운 흙이 쌓이고 역사와 유령들의 이름 위에서 오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마당 풍경은 계속 변할지라도 이들의 삶과 예술은 서로 연결되며,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대구미술관은 부속동을 개관하며 ‘보이는 수장고’를 공개했다. 폐쇄적 형태의 수장고에서 벗어나 수장과 전시 기능을 아우르도록 꾸민 것이다. 과거 예식장 식당 자리던 이곳에서는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소장품 관람이 가능하다. 1980여 점의 미술관 소장품 중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미술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입구에는 격납 작품의 수량과 유형, 내부 온습도를 알려 주는 안내판이 있고, 전시장 앞쪽에는 미스터의 ‘스트로베리 보이스’(2007), 키키 스미스의 ‘메두사’(2003), 박종배의 ‘못과 심연’(1994) 등이 전시돼 있다. 내부 관람은 제한되지만 바깥에서도 충분히 안쪽 격납부에 보관된 최정화의 ‘연금술’(2013),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2014) 등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부속동 1층 교육실에는 알록달록한 도형의 변화 과정을 보여 주는 김용관의 ‘둥근 네모’, 대구 출신 미술가 박종규의 ‘프로젝트 닷(DOT)’이 설치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