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발견한 의자를 촬영하고 책으로 엮은 소동호 디자이너. 그와 함께 중구와 종로구 거리에 놓인 사물을 새롭게 바라봤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사람마다 감각하는 지점이 다르다. 누군가는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과 행동에 주목하고, 또 다른 이는 죽 늘어선 건물 형태와 쓰임새에 눈길을 준다. 가구 디자이너 소동호의 시선은 길거리 의자에 머물렀다. 새롭게 마주할 풍경을 기대하며 낯선 골목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의 특별한 도시 기록법을 배울 시간이다.



2 의자를 가방으로 활용한 사례. 거꾸로 세우니 수납공간이 생겼다.
3 플라스틱 의자 다리에 나무 막대를 덧대고 색색의 끈과 테이프로 감았다.
서울의 길거리 의자들
건축을 전공한 소동호 디자이너에게 의자는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거나 독립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작업물이었다. 2015년 서울 을지로에 작업실을 얻은 시점부터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면서 우연히 마주한 거리 곳곳의 의자는 기존에 보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 예술품처럼 전시된 것과 달리 길거리 의자는 버려진 건지 쓰이는 건지 경계가 모호했다. 오히려 그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었으나 자료가 조금씩 쌓이니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용자의 의도와 생활의 흔적이 묻어났고, 같은 직종에 몸담은 사람들의 의자에선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었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의자 사진을 찍어 온 소동호 디자이너는 지난해 11월, 350개 의자를 담아 <서울의 길거리 의자들>을 출간했다.
소동호 디자이너의 의자 아카이빙에는 몇 가지 기준과 원칙이 있다. 우선 본인에게 말을 거는 의자여야 한다. 발길을 멈추게 하고 시선을 끄는 대상이어야 휴대폰을 꺼내 든다. 기록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늘 지니고 다니는 휴대폰을 사용해도 충분하다. 의자를 촬영할 땐 위치를 옮기거나 주변을 정리하지 않고 원래 모습대로 포착한다. 그와 함께 서울 의자 탐방에 나섰다. 종로구 세운상가 앞에서 출발해 오직 의자를 찾아 골목을 샅샅이 누볐다.
3분쯤 지났을까. 세운상가 근처에서 첫 번째 의자와 마주친다. 회색 플라스틱 의자에 쿠션을 덧댄 형태다. 의자와 쿠션을 연결한 초록색 끈을 관찰하는데, 소동호 디자이너의 눈이 벽에 붙은 달력으로 향했다. “의자 주변에 달력이나 시계가 있으면 의자 주인이 가까이서 일한다는 의미죠.” 몇 걸음을 옮기니 방이라고 해도 될 법한 공간이 나온다. 투명한 진열대 안에 시계를 보관했고 의자는 약간 틀어졌다. “예지동 시계 골목을 재개발하면서 여기에 영업장을 마련해 준 것 같아요.” 비록 진열대 위에 먼지가 가득하지만, 사람이 급하게 일어나다 돌아간 듯한 의자의 방향과 ‘출장 중’이라는 문구가 기다리는 마음을 품게 한다. 아마도 시계상일 의자 주인의 외출을 잠시 상상했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공중 보행로에서는 누구나 의자 주인이 될 기회를 얻는다. 옛 간판을 활용한 공공 의자 덕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간판을 세워 놓은 것 같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금세 의자임을 깨닫는다. ‘세운기술서적’이라는 문구가 크게 박혀 지역명을 알리는 표지판이자 시민들의 지친 다리를 쉬게 해 주는 의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건축물
중부건어물시장 근처에서 나무에 묶어 둔 의자를 살펴보던 중 주인이 나타났다. “의자를 자꾸 훔쳐 가서 비상용으로 둔 거예요. 먼지가 쌓여 비닐로 덮어 뒀어요.” 원래 쓰던 의자에는 주차 관리원 의자이니 가져가지 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팔걸이에 고정한 나무 막대는 비 올 때 우산을 연결하는 용도다. 의자 앞 택배 박스 또한 옆으로 눕혀 텀블러나 가방을 보관하는 테이블로 이용한다. 전봇대에 붙인 커피 믹스 상자는 영수증 보관함으로 변모했다. “장면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재밌는 부분이 많아요.” 소동호 디자이너의 말을 들으니 길거리 한복판에서 설치미술을 감상하는 관람객이 된 기분이다. 운 좋게 길거리 도슨트까지 만났다.
소동호 디자이너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의자는 중부건어물시장 맞은편 방산시장에서 발견했다. 제작자는 주차 관리원이었다. “산업용 기름통에 골판지를 얹고 테이프로 칭칭 감아 등받이 없는 의자를 만들었더라고요. 주차 관리원 특성상 계속 이동을 하니 가벼운 의자가 필요했던 거죠. 밤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 주차 관리원이 퇴근하면서 택시 승강장 벤치 아래에 의자를 넣고 가는 거예요. 보관까지 고려해 디자인한 거죠.” 이후 의자를 바라볼 땐 어떤 의도가 담겼는지에 집중했고 이제 그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의자는 사람과 밀접한 가구인 만큼 지역이나 장소별 특징이 다르다. 을지로처럼 작업장이 많은 동네에서는 대다수가 변형된 모습을 띤다. 철공소 골목의 의자는 다리가 짧다는 공통점이 있다. 철제에 구멍을 뚫는 기계인 드릴 프레스가 높지 않아 목욕 의자처럼 낮은 의자에 앉아 작업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이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이곳은 실외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주택가와 달리 가져가지 말라는 문구가 적힌 의자가 수두룩하다. 거리에 나온 의자는 주인이 없다고 여겼는데 모든 의자에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그간 버려진 거라고 오해한 의자가 얼마나 많을까 감히 세지도 못하겠다.
하나의 목적을 품은 채 즉흥적으로 걷는 과정은 게임과도 같다. 여정을 마무리할 즈음 소동호 디자이너의 수집 기준인 ‘말을 거는 의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한다. 의자가 기울어져 다른 의자에 기댄 것처럼 보이거나 가방을 걸어 놔서 사람이 앉은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연인처럼 또는 학생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아 슬쩍 말을 걸고 싶어진다. 의자 시트에 무 하나만 올라가도 의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주인이 버린 건지 놓아 둔 걸 까먹은 건지, 혹은 잠시 뒤 찾으러 올 건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시간을 되돌려 당시 상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도 이토록 상상할 여지가 많다니.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시선의 차이고, 그 시선은 세심한 관찰을 통해 얻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소동호 디자이너가 알려 주는 도시 산책법
“대상 하나를 정해서 관찰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것만 보여요. 처음부터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며칠간이라도 글이나 사진으로 기록해 보세요. 핵심은 꾸준함입니다.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는 몰랐다가 기록물이 쌓인 후엔 해당 지역을 해석할 단서를 찾게 될 거예요.”
소동호 디자이너가 소개하는 서울의 길거리 의자들

2018년 중구 남산동2가
명동의 테마 거리 재미로의 한 만화방 앞에서 만났다. 장소를 알면 형태가 이해된다.

2018년 중구 을지로4가
철제 깡통에 골판지를 두껍게 접어 올리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옮기기 편하고 보관이 용이해 보인다.

2018년 중구 을지로4가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타고 날아갈 것 같다. 다리에 끼운 테니스공이 재미를 더한다.

2018년 종로구 장사동
의자가 ‘찡긋’ 하고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등받이 한쪽이 떨어져 나가 기능은 잃었지만 표정을 얻었다.

2019년 종로구 낙원동
도로와 보도 사이에 의자가 위태롭게 놓였다.
캐릭터 눈망울이 당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2020년 종로구 종로5가
다양한 색상의 행주를 걸어 놓았다.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도 빨래 건조대나 옷걸이가 될 때가 있다.

2020년 종로구 장사동
다리를 다친 의자가 좋은 의사를 만났다. 평범한 나무 의자지만 멋지고 튼튼한 금속 다리를 가지게 됐다.

2021년 은평구 갈월동
안경 가게를 안내하는 표지판으로 변모한 의자. 직접 써 붙인 타이포그래피가 인상적이다.

2022년 중구 을지로3가
주차 관리원의 의자. 군용 탄띠 같은 벨트에 생수병을 이어 붙였는데,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