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

초루, 무르익는 시간의 거처

2025년 02월 09일

  • WRITER 류현경(여행 칼럼니스트)
  • PHOTOGRAPHER 김은주

지천이 차밭인 전남 보성에서 온전히 자연의 의지로 검은 식초를 빚어내는 부부의 이야기.

한 해 한 해 충실히, 흑초와 함께 익어 가는 최진섭·한상미 부부의 시간. 현재 초루에는 2500여 개의 항아리가 있는데, 매년
그 수를 조금씩 늘리는 중이다.

호숫가 십 리 길을 따라 심원한 남도의 사계가 펼쳐진다. 봄이면 만개한 왕벚꽃나무 아래 유채와 청보리 너울이 흔들리고, 가을에는 흐드러진 단풍 사이로 메밀꽃이 망울을 연다. 한껏 물오른 여름의 초록빛도, 시리도록 투명한 겨울의 아침 볕도 저마다 정취가 깊다. 계곡 너머 편백나무 군락으로부터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면 움푹한 노지의 항아리마다 시간이 느릿느릿 무르익는 땅. 해평호와 삼나무 숲의 계곡이 두 팔로 감싸 안은 이곳은 전남 보성 득량면의 오봉산 일원, 지난 13년간 천연 발효 식초를 빚어 온 ‘초루’의 본거지다.

노지의 햇살 아래 넓게 펼쳐진 항아리밭.

숲과 물, 돌과 흙에
깃든 시간

초루 이야기는 오봉산 자락의 숲길 안쪽, 볕과 바람이 모이는 187만 제곱미터(약 57만 평) 규모의 드넓은 터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뭘 만들면 좋을까, 어떤 여정이 이 땅과 가장 잘 어울릴까. 공동대표인 최진섭·한상미 부부의 고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 갔다. 이미 30여 년 전부터 부지를 소유해 온 이들에게 눈앞의 자연은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가능성의 무대였다. “평상시 발효 음식에 관심이 많았어요. 된장이나 고추장보다는 특별히 땅을 활용할 수 있는 차별화된 아이템을 찾던 차에 발효 식초를 만나 결심하게 됐죠. 이곳 노지에서 만들어 볼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발효 식품이란 게 ‘해 보자’ 마음먹는다고 곧장 뛰어들 수 있는 사업은 아니다. 알아야 할 지식도 두텁고, 맞춰야 할 조건도 까다롭다. 특히 온도와 습도 같은 환경적 요소가 엄격해, 조금만 흐트러져도 발효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시중에 출시된 대부분의 양조 식초가 공장의 대형 탱크 안에서 생산되는 이유다. 단, 적절한 야외 환경을 찾아 잘 발효하고 숙성할 수만 있다면 그만큼 귀한 자연의 산물도 없다. 노지 식초는 오래 숙성할수록 빛깔이 점점 짙어지는데, 이를 ‘검을 흑’ 자를 써 ‘흑초’라 한다. 햇살과 바람, 비를 맞으며 끝내 자연의 힘으로 완성되는 검은 식초라니, 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멋진 아이템인지. “흑초로 유명한 일본 가고시마현에 가 보니 기온이 여기와 거의 비슷하더라고요. 돌아와서 바로 시험 발효를 시작했죠.”
땅에서 비롯한 아름다운 꿈은 부부의 매일매일을 시험에 들게 했다. 전국의 식초 명인이란 명인은 죄다 찾아다녔고, 항아리란 항아리는 전부 가져다 써 봤다. 그야말로 ‘0’에서 시작한 만큼 익히고 연구할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숱한 실패를 딛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용기가 절실했을 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갖은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 이들을 다독여 준 존재 역시 이 땅이다. 대표 부부는, 오늘날 초루 흑초의 탄생은 이 지역이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알고 보니 300년간 대를 이어 온 옹기 명인의 작업장이 지척에 있고, 맥반석으로 뒤덮인 암반 지대의 물은 초를 발효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여기에 일교차가 크고 사계절 온화한 득량면 일대의 기후까지 제 몫을 단단히 했다. 2017년 초루의 흑초는 서울발효식문화전의 ‘전통발효식초 전국 품평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며 품질을 인정받았다. “그때 자신감을 얻었어요.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최진섭 대표의 얼굴에 일순 뿌듯함이 번졌다. 우리도 할 수 있구나, 이 간결한 말 한마디가 그간의 노고를 전부 씻어 내는 듯했다.

초루의 흑초와 발사믹 흑초 제품.

시간을 마신다는
의미에 대하여

초루의 현미 흑초는 오직 세 가지 재료로 빚는다. 지역 농가에서 재배한 유기농 현미와 지하 80미터에서 길어 올린 천연 암반수, 그리고 둘 사이의 중간재 역할을 하는 누룩. 재료는 간단한데 문제는 과정이다. “식초가 발효 식품 중에서도 유독 담그기 어려운 건 서로 다른 발효가 두 번 이뤄지기 때문이죠. 1차 알코올 발효, 2차는 초산 발효예요. 즉 막걸리가 됐다가 그다음에 식초로 바뀌는 거예요.” 과정을 간략히 서술하자면 이렇다. 우선 현미를 누룩으로 빚어 섭씨 25도에서 열흘쯤 알코올 발효한다. 이후 원재료가 술로 변하면 약 40~60일간 초산 발효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때 필요한 온도는 섭씨 32도다. “보성은 보통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 사이 기온이 32도예요. 그러니까 2차 발효 시기에 맞추려면 1년에 딱 한 번, 5~6월에 식초를 담가야 하고요. 천연 발효가 왜 어려운지 아시겠죠?”
비단 온도만이 아니다. 대담하게도 노지에 터를 잡은 흑초 생산자들은 자연의 온갖 불확실성과 끝없는 사투를 벌여야 한다. 특히 2차 발효가 끝나면 식초를 넣은 항아리를 완전히 밀봉하는데,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인내의 시간이다. 비가 쏟아지든 눈보라가 휘몰아치든 초를 숙성하는 건 오롯이 자연의 몫. 그저 지켜보며 틈틈이 확인하는 것 외에 인간이 나설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여름에 태풍이 닥치면 언제 항아리 뚜껑이 날아가 다른 항아리를 깰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른다. 어느 해는 강수량이 너무 많아 걱정이고, 또 어느 해는 일조량이 너무 적어 노심초사하고. 그럼에도 이 고단한 여정을 지속하며 나아가려는 건 아마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 때문일 테다. 이를테면 ‘귀한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가치.
부부가 전라남도 무형유산 이학수 옹기장의 항아리를 고집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장인이 9대째 이어 온 전통 방식 그대로 빚어낸 항아리는 일교차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스스로 숨을 쉰다. 두께가 얇아 태양 빛을 흡수하거나 땅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기능도 수월하다. 현재 초루 부지 내에서 유독 볕이 잘 드는 자리에는 무려 2500여 개의 항아리가 넓게 도열해 있다. “흑초는 숙성 기간이 길수록 유기산이나 필수아미노산 같은 영양 성분이 많아지고 맛은 한층 부드러워져요. 톡 쏘지 않고 은은하면서 기분 좋은 산미를 내죠. 저희는 적어도 3년 이상 이곳 항아리에서 숙성한 흑초만 출시해요.”
발효 식초를 향한 부부의 진심은 전통을 더듬어 끊임없이 길을 닦고 연구한 생산자로서 사명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주세령으로 한국 전통 식초의 맥이 거의 끊어졌거든요. 1960년대 밀주 단속 여파도 컸고요. 식초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술을 담가야 하니, 술 문화가 멈추면 식초 문화도 자연스레 단절되는 셈이죠.” 부부가 일본이나 중국의 발달한 식초 문화를 확인할 때마다 느낀 안타까움은 이후 고스란히 초루에 전해졌다. 현재 이곳에서 출시하는 3년산과 5년산 흑초는 현미, 흑미, 녹차 세 종류다. 흑초에 사과, 녹차, 망고를 조합한 세 종류의 발사믹 흑초도 함께 선보이고 있다. “발효는 기다림이에요.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하죠.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거든요. ‘시간을 마시는 순간’이란 슬로건은 그런 의미예요.”

숙성 중인 흑초를 살피는 최진섭 대표.

자연과 공존하는
초루의 새 베이스캠프

제조 공간에서 복합 공간으로, 초루의 여정에 2막을 연 건 2023년 삼나무 숲과 계곡 경사면을 끼고 들어선 모던한 건축물이다. 수평의 건물과 수직의 삼나무가 교차하는 절묘한 미감 사이, 누마루를 연상시키는 낮은 모듈형 공간은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소장의 작품이다. “소장님을 처음 만날 때 저희가 원하는 건물의 특징을 A4 용지에 적어 갔어요. 건물이 ‘나 여기 있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한 한 자연을 덜 훼손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글이었죠.”
실제로 초루의 건축은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자연에 조응하도록 설계했다. 아담한 중정을 중심으로 툇마루처럼 내부 공간을 감싸고, 사방으로 창을 내어 언제 어디서든 눈부신 자연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계곡을 따라 난 아랫길과 삼나무로 무성한 윗길을 옥상 브리지로 연결한 것도 굴곡진 지형 속 건축과 자연의 순환적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브리지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멀리 해평호와 항아리 속 흑초, 그리고 계곡물이 서로 연결되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최진섭 대표의 오랜 열망이 담긴 이 건축물은 현재 초루의 플래그십 스토어 겸 흑초 문화 홍보관 역할을 하고 있다.
최 대표가 부지 안팎을 오가며 이른바 하드웨어적 면에 집중한다면, 한상미 대표의 주무대는 건물 안, 특히 주방이다. 현재 예약제로 선보이는 음료와 브런치, 코스 메뉴 모두 그가 한식, 양식, 차와 디저트 등 각종 분야에 걸쳐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개발한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어떻게 흑초와 이 지역 산물이 잘 어우러지도록 조합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둔 결과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초루의 모든 메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흑초가 쓰인다. 음료에 넣을 유자청을 담글 때도, 다식에 올릴 무화과를 조리거나 코티지 치즈를 만들 때도 빠지는 법이 없다. “식초가 이렇듯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거든요. 그래서 이 공간을 만들고, 여러 체험거리를 준비한 거죠. ‘식초가 들어간 줄 몰랐는데 너무 맛있다’라거나 ‘식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장 기쁘고요.”
한 대표는 무엇보다 자연이 지닌 치유의 힘을 굳게 믿는다. “이곳을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사람들이 느끼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달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희의 모토예요. 몸 상태는 초루에서 좋은 발효 식품으로 만든 차와 요리를 맛보며 변화시킬 수 있거든요. 마음 치유는 자연이 다 알아서 해 줄 거고요. 툇마루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충분하죠. 저희가 건물 외벽 전체를 유리로 마감한 이유예요.”
초루는 단순히 흑초를 만들고 소개하는 것을 넘어, 발효 식초를 테마로 폭넓은 휴양을 체험할 수 있는 융복합 산업 단지를 꿈꾼다. 지난 10년이 노지에서 가능성을 찾고 쌓아 온 시간이라면, 앞으로 10년은 이 자리를 베이스캠프 삼아 흑초 문화를 산업적으로 확장하는 여정일 수도 있겠다. 숱한 가능성 중 부부가 현시점에서 고려하는 다음 단계는 일명 ‘초이너리’.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 밸리처럼, 방문객이 흑초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고 즐기고 체험하는 투어 프로그램과 공간을 새롭게 구상 중이다. 덕분에 고민거리는 늘고 준비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예상외로 걱정이 그리 깊진 않다.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고마운 분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물론 지칠 때도 있는데, 참 희한한 게 그럴 때마다 다가와 힘을 주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이제는 저희가 좋은 의도를 갖고 있으면 결국 좋은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힘을 합치다 보면 혼자서는 못 할 일도 해내겠죠.” 부부는 모든 것이 초루를 품은 자연의 혜택이라 믿는다. 안온한 볕과 흙으로, 꽃과 나무로, 때로는 거센 비바람으로 이 땅에 계절을 심고 가꿔 온 자연. 그 깊숙한 손길로 묵묵히 내준 시간이 흑초와 함께 천천히 익어 가는 중이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초루를 품은 자연의 혜택이라 믿는다.
안온한 볕과 흙으로, 때로는 거센 비바람으로 이 땅에 계절을 심고 가꿔 온 자연.
그 깊숙한 손길로 묵묵히 내준 시간이 흑초와 함께 천천히 익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