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원 꾸미기에 한창인 아티스트 이효재를 만나러 충북 괴산으로 갔다. 자연에 깃들여 사는 검박한 삶의 풍경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때마침 억새와 강아지풀이 손을 흔들며 낯선 객을 반겨 주었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골몰하는 시대, 우리는 정작 삶의 근간인 살림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을 뜻하는 순우리말 ‘살림’은 옷가지를 정돈해 입거나 음식을 요리해 먹으며 집 안팎과 세간살이를 돌보는 일련의 일상적 행위를 아우른다. 의식주를 수반하는 가사 노동이 점차 집 밖으로 밀려나 ‘외주화’되는 지금, 살림이란 말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낡아 가는 듯하다. 그사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반듯하게 개켜 놓은 빨랫감, 정성껏 차린 소박한 밥상, 보기 좋게 정리한 물건이 우리에게 안기는 작은 기쁨과 은은한 성취감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알록달록한 생활 감각,
생생한 살림 풍경
문득 떠오른 이름 하나. 살림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라이프 스타일리스트 이효재다. 한복집 ‘효재’의 주인장으로 배우 배용준에게 전통문화를 전수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보자기 예술가이자, 가수 나훈아의 무대 의상을 담당한 스타일리스트인 그는 일찍이 남다른 살림 솜씨로 출판계와 방송계에 널리 호명되며 ‘효재처럼’으로 대표되는 자연주의적 살림법을 설파해 왔다. ‘1세대 인플루언서’라는 수식어가 그의 시그너처, 항아리 원피스만큼 꼭 어울리는 이유다.
“아름다움은 마음의 창으로 들어온다. 먼지 같은 풀꽃들, 어둑거릴 때의 서늘한 산그림자, 때마침 걸려온 친구의 전화 목소리가 보일 때 나는 늘 부자다.” 2009년에 출간해 당대 베스트셀러로 손꼽힌 사진 수필집 <효재처럼 살아요>의 맨 앞 장에 적힌 문장이다. 일상을 누구보다 풍요롭게 채워 나가는 마음 부자 효재.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살림살이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발부리에 채이는 돌 주워다 상에 올려서 김 누르고, 호두 깰 때 받침돌로 쓰고, 깨진 독은 손님맞이용 큰 접시로. 온갖 풀잎 따다가 테이블 세팅하니, 다들 재미있어한다.” ‘재미’는 ‘효재처럼’ 사는 삶을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효재처럼 자연으로 상 차리고, 살림하고>를 시작으로 <효재처럼 보자기 선물> <효재의 살림 연장> <효재의 살림 풍류>에 이르는 살림 지침서를 펴낸 그는 에세이 <효재처럼 풀꽃처럼>, 여행기 <효재, 아름다운 나라에서 천천히>, 우리 생활 문화를 다룬 동화 연작 <효재 이모와 전통 놀이 해요> <효재 이모의 사계절 뜰에서> <효재 이모처럼 지구를 살려요>를 출간해 작가로도 사랑받았다.
보자기를 동원해 온갖 물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업사이클링’ 아티스트, 돌멩이나 나뭇가지 하나도 그냥 버리지 않는 ‘제로 웨이스트’ 실천가, 빗자루에서 장독대까지 취향껏 수집한 살림살이의 내력을 소개하는 ‘공답 요정’, 풀포기를 반려 삼아 나만의 정원을 가꾸는 ‘식집사’, 손수 기른 푸성귀를 요리해 식탁을 꾸미는 독창적 ‘먹방러’…. 다재다능, 다종다양한 그의 면모엔 시대를 초월하는 감수성과 지혜가 어른거린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꿈을 꾼다. 그래서 늘 현실이 못마땅하여 끝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중략) 종교는 벽이 있지만 문화는 벽이 없다. 치마저고리가 청바지가 되고, 보자기가 종이 백이 된 이 시대에 우리 것 하나는 놀이로 문화로 즐기자는 것.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나의 풍류 놀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효재의 살림 풍류> 중에서
자연주의를 넘어 자연이 된 효재,
괴산에 깃들이다
성큼성큼 나아가던 그의 행보는 각별한 우정을 나눈 배우 김수미와 2016년에 함께 쓴 요리 에세이 <음식, 그리고 그리움>을 끝으로 더뎌졌으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효재의 살림 풍류는 한층 깊고 은밀해졌다. 충북 괴산 청천면에 홀연히 새 거처를 꾸민 것이다.
최저 기온 영하 10도를 기록한 어느 아침, 억새와 강아지풀로 뒤덮인 아늑한 뜰에 다다랐다. 지난 5월 TV 프로그램 <건축탐구-집>에 등장해 소소한 화제를 모으기도 한 바로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의 다정한 인사가 우리를 반긴다. “추운데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우선 밥부터 들고 얘기해요.” 먹이고 챙기기를 좋아하는 그가 눈 깜짝할 새 뭉근하게 끓인 서리태 죽과 향긋한 코코넛 커피를 내왔다. 고운 그릇과 컵, 먹음직스러운 담음새에 눈이 먼저 즐겁다. 젓가락 받침에 꽂아 둔 작은 나뭇가지마저 사랑스럽다. “개복숭아 가지예요. 봄이 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놓았어요.” 봄빛처럼 따뜻한 환대다.

“문자 하랴 카카오톡 하랴 다들 뭔가에 바쁘니 봄이 훌쩍 오는 줄 알지만, 나같이 집안퉁수 아날로그는 안다. 봄이 슬로로 서서히 온다는 것을. 촉을 올리고,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워내는 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 어떤 꽃도 쉽게 피어나는 꽃은 없음을. 봄눈 속에서부터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를 하는지 찬찬히 지켜보는 나는 알고 있다.”
<효재처럼 풀꽃처럼> 중에서
언젠가 산속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한 선언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무엇이 괴산살이를 결심하게 했나요.
코로나19 시기에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중 인적이 거의 없는 산골 마을을 찾아야 했어요. 그때 발견한 곳이 바로 여기예요. 산봉우리가 하도 빼곡해서 이마에 부딪힐 것 같은 동네잖아요. 덕분에 자연주의를 노래하던 제가 이곳에 와서 ‘찐’ 자연주의자가 됐어요. 실은, 이제 도시에서 궁금한 게 없어요. 무얼 보아도 우리 집 앞 ‘고릴라 바위’보다 예쁘지 않으니까요. 문 열면 코가 시큰한 바람이 불어닥치고, 날마다 다른 석양 빛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이 좋아요. 정원에서 풀을 정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시시각각 달라지는 노을에 마음이 뭉클하거든요.
괴산 살림의 규모는 비교적 조촐한 편입니다. 집 안팎의 공간과 세간살이를 소개해 주세요.
깍두기처럼 네모난 2층 집에 부엌, 차실, 침실이 있어요. 건너편 트레일러는 그간의 작업물을 진열해 전시실로 활용하고요. 공간이 아담한 편이라 꼭 필요한 것만 두고 새로운 물건을 들이지 않으려 하죠. 다만 바구니를 좋아해서 벽 한편에 여러 개를 죽 늘어 두었어요. 장독대는 큰 물건을 보관하는 서랍장 대용으로 써요. 지난 크리스마스엔 부엌 창가에 둔 장독에 소금을 눈처럼 뿌려 놓고 미니어처 트리를 꾸미기도 했어요.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차실 이름은 ‘운상정’이에요. 구름 위의 정자라는 뜻인데 현판을 나훈아 씨가 손수 써 주었어요. 창틀을 가리는 대나무 파티션은 전시장에 있던 걸 버리지 않고 가져온 거예요. 우리 집 곳곳엔 이렇게 주운 나뭇가지가 많아요. 겨울엔 개복숭아, 생강나무 가지를 화병에 꽂아 둬요. 그러면 산이나 들에서 보는 것보다 더 빨리 꽃을 볼 수 있거든요. 저는 이런 일에 아주 극성맞은 편이에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산중입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일과가 궁금합니다.
여기서 머무는 날엔 새벽 네 시쯤 일어나 이리저리 어슬렁거려요. 괴산 콩이 정말 맛있어서, 서리태를 갈아 먹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죠. 이 집은 제가 계획 중인 지역 문화 살롱 거점 중 하나예요. 말하자면 ‘괴산 스튜디오’랄까. 일주일 중 하루는 충북 청주 초정행궁에서 보자기 만들기와 전통문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주말엔 전북 완주 대승한지마을에서 머지않아 개관할 보자기 한지 문화관 준비 작업에 참여해요. 나머지 시간엔 괴산에 머물거나 서울을 오가며 지내요. 한반도의 허리인 괴산에 베이스캠프를 둬서 가능한 일정이에요. 이렇게 옷을 갈아입듯 거처를 바꾸니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저는 낯선 기분을 사랑해요.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끊임없이 생기거든요. 얻게 되는 지식도 많아요. 괴산은 선비들이 유배 생활하던 지역이에요.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이 머물던 수월정, 송시열이 사랑한 화양구곡, 이황과 정철이 즐겨 찾은 쌍곡계곡이 언제 가장 아름다운지 잘 알죠. 나중에 여기서 ‘선비 투어’를 운영하는 게 작은 꿈이에요. 제가 만든 옷을 손님들에게 입히고 산막이옛길이며 화양구곡을 마냥 걷는 거예요. 그러다 낙엽이 쿠션처럼 쌓인 바위에 드러누워 수다 떨고 차도 마시면서요.

생활 반경이 집에서 정원으로, 정원에서 산으로 넓어진 것 같네요. 그래도 여전히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시죠.
이제 속리산국립공원이 우리 집 마당 같아요. 요즘 산막이옛길 절벽에 물이 얼었는데, 그게 반짝반짝하니 꼭 보석 같아요. 스와로브스키가 다 뭐예요. 곧 녹아 없어질 테니까 더 열심히 봐 둬야죠. 멀리 못 나가는 날엔 정원에 앉아 산봉우리가 몇 개인지 헤아리는 게 일이에요. 정원 한편엔 새들이 날아와서 쉬라고 강아지풀이랑 억새를 심어 놓았더니, 정말이지 아침 10시 10분이면 정확히 여기 내려앉더라고요. 가끔 고라니나 새끼 멧돼지처럼 작고 어린 산동물이 찾아오기도 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하고 이 친구들의 안녕을 기도해요.
그러고 보니 산간에서 겨울을 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습니다. 괴산의 겨울 생활을 들려주세요.
도시에선 기상예보를 듣고 미리 추위를 걱정하는데, 이 산골짝에선 그저 겨울답게 춥겠거니 생각하고 말아요. 설거지할 때 고무장갑이, 빨래할 때 세탁기가 더 고마울 따름이죠. 상황을 부정하기보다는 즐기려는 편이에요. 요즘엔 겨울만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어요. 부엌에 느지막이 볕이 스미는데, 그때 창 너머 마른 버드나무 가지 그림자가 흔들리기 시작해요. 그걸 보면서 차 한잔 마시는 순간이 제겐 큰 행복이에요. 잎을 떨군 앙상한 겨울 나무 덕분에 산세며 계곡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근사해요. 도시에 있을 땐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쓸쓸했지만, 여기선 나무 그늘과 산자락에서 느껴지는 우주적 쓸쓸함을 곱씹어요. 더 치열하게 고독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이랑 싸우기도 하죠.
그야말로 자발적 고립이군요. 어떻게 해야 ‘잘’ 외로울 수 있을까요.
가만히 차를 우려 마시면서 물소리를 하염없이 들어 보세요. ‘하염없다’ 같은 단어가 별안간 심연에서 솟아오르거든요. 이곳에선 그야말로 모든 일이 하염없죠. 요즘 빠진 취미가 이런 단어 놀이예요. 그러다 보면 나랑 잘 지내는 법을 배우게 돼요. 기분 좋으면 기분 좋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나요. 최근에 독감을 크게 앓았는데, 덕분에 잠을 마냥 자고 일어나니 ‘쾌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우리 따라 선생님(‘스튜디오 따라’의 포토그래퍼 전재호)한테 전화 왔을 때도 그랬고요. 매일 같은 일상인 것 같다가도 환기가 되잖아요.
시골살이를 꿈꾸는 이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요.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떠나세요. 나중에 가서 ‘그때 떠났어야 했는데, 그때 땅값이 얼마였는데’ 하며 후회하지 말고요.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요. 시골에서 살다 보면 이 생활에 맞는 근육이 새로 생겨나요. 이즈음엔 버스만 타면 세상 모르게 깊고 달게 잠들거든요. 그렇게 비축한 에너지를 시골 생활에 사용하고 있어요.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새로운 내가 만들어져요.
말끝마다 “아, 행복해”라고 외치시는데, 진심으로 느껴져서 마냥 부럽습니다. 어떻게 ‘효재처럼’ 살 수 있을까요.
제 행복의 원칙 중 하나는 잘 먹는 거예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요. 먹고 나서 일하는 사람, 일하고 나서 먹는 사람. 저는 당연히 먹고 나서 일하는 사람이죠. 우리 집 냉장고엔 삶은 문어가 떨어질 날이 없어요. 맛 좋은 괴산 배추, 옥수수, 고추, 콩도 늘 비축해 놓아요. 언제나 맛있게 먹어야 하니까. 안 그러면 삶이 억울하잖아요.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서 누리는 거예요. 그때그때 “맛있다” 외치고, “예쁘다” 소리 지르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