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이룬 공간과 사람, 일곱 가지 이야기
광주의 브랜드

들락 DLAC
순환하는 문화의 여정
옛 전남도청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도시의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5.18민주화운동의 터전에서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로 승화하고자 2015년 문을 연 이후 무수한 활동을 거치며 성장해 온 ‘아시아 문화의 창’. 그런 ACC가 최근에는 전국의 문구 ‘덕후’들이 광주에 오면 꼭 들르는 여행 코스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2023년 론칭한 자체 브랜드 ‘들락 DLAC(이하 들락)’ 덕분이다. 언뜻 평범한 편집숍처럼 보이지만, 들락의 진열장은 모던한 디자인 너머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1960∼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과 신민요, 전통 장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LP 음반부터 도시 기록자를 위한 키트, 매호 다른 단어로 아시아 문화를 조명하는 매거진까지, 어느 하나 그저 ‘예쁘다’라는 감탄사로 후루룩 넘길 만한 것이 없다. 사실 이곳에서 내놓는 상품은 단순히 아름답고 유니크한 ‘완성품’이라기보다 브랜드가 문화를 순환하는 ‘과정’에 가깝다. ACC가 아시아 문화 예술의 가치를 전시, 공연, 교육 등의 콘텐츠로 선보인다면 들락은 이를 상품화해 그 경험을 일상으로 확장시키는 데 비전을 둔다. 전시 연계 및 협력 프로젝트 제품, 도서 등 굵직한 라인업에 따라 상품 발굴 및 개발을 지속하는 이유다. 사람과 지역, 문화와 예술, 선물 같은 이야기까지 살뜰히 담아낸, 소장 가치 높은 물건을 만나볼 때다.
주소 광주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운영 시간 10:00~18:00(수·토요일 20:00, 월요일 휴무)
interview

권성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문화사업개발팀 팀장
‘들락 DLAC’이란 이름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재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표현을 찾다가 ‘Dots and Lines to Asian Culture(독자적이며 연결된 아시아 문화)’의 이니셜로 ‘DLAC’이라 명명했어요. 점은 저마다의 고유한 주체, 선은 점들을 연결하는 활동이라 생각했죠. 물론 ‘들락날락하다’ 할 때의 우리말 ‘들락’의 의미도 있고요. ACC의 콘텐츠는 물론 로컬 브랜드로서 정체성을 담아내려는 노력도 엿보여요. 광주의 지역성이나 정체성을 논할 때, 저는 ACC가 자리한 부지의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5.18민주화운동의 근거지에 건립한 ACC의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바로 들락이 이어 가야 할 지역성이라 보고 있죠. 대표적 예가 지난해 전시 연계 상품으로 개발한 <어떤 땅> 키트 북입니다. ACC 건립 전 이 땅에 존재했던 도로와 골목·문화재·삶의 터전 등을 조명하는 체험 북으로,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무대가 된 곳곳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담았어요. 올해 들락은 또 어떤 여정을 이어 갈까요? 일단 기본적인 플랫폼과 체계는 갖췄으니, 그 기반 위에서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게 올해의 목표예요. 특히 2025년은 ACC가 개관 10주년을 맞은 해인데, 누구나 ‘ACC의 문화 상품’ 하면 들락이 떠오르게 할 거예요.
광주의 차 문화

티 에디트
차와 예술이 맞닿은 자리
예부터 의재로를 터전으로 삼은 이들에게 ‘차’란 예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차와 예술이 맞닿은 길, 과거 무등산 자락에서 그림을 그리고 춘설차를 재배하며 남종화의 화맥과 호남의 다맥을 이어 온 의재 허백련 선생의 정신이 깃든 까닭이다. 오늘날 차 관련업 종사자만 100여 명에 이르는 의재로 초입에서 ‘티 에디트’의 팽주 남수연 대표가 춘설차를 내놓는 이유도 이와 같다. “만든 이의 역사가 담긴 차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맛도 맛이지만, 허백련 선생이 직접 채엽하고 제다한 차로 춘설차가 상징하는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어요.” 의재로에서 나고 자란 그는 1960년대 한옥을 개조한 티 하우스에서 춘설차를 비롯한 광주·전남 차를 선별해 소개하고, 지역 재료를 차에 가미하거나 다식으로 구성해 선보인다. 고객이 직접 우려서 즐기는 싱글 오리진 티와 블렌디드 티 외에도 지역 특산물을 조합한 베리에이션 티, 허브와 술을 더한 칵테일 티 등 좀 더 가볍게 차를 경험하는 메뉴도 꾸준히 개발 중이다. 이곳의 특별한 매력은 오래된 한옥의 멋을 재해석한 공간 자체에 있다. 의재 선생을 포함한 옛 광주 예술가들의 작품과 모던한 그래픽 디자인이 어우러진 내부는 물론 무등산 풍경을 본떠 돌과 식물로 꾸민 정원 역시 눈길을 끈다. 이 그윽한 차의 공간은 삶과 예술이 경쟁하지 않는다는, 그리하여 예술은 늘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의재 선생의 정신을 일깨운다.
주소 광주시 동구 의재로 9
운영 시간 12:00~22:00(월·화요일 휴무)
광주의 콘텐츠

광주극장
오래된 극장의 미래
오늘날 광주 여행의 거점으로 많은 이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를 꼽는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라 불리는 금남로가 근현대사의 핵심 무대라면, 충장로는 구도심의 유서 깊은 문화 예술 거리다. 1910년대 이후 오랜 시간 부흥했던 흔적이 골목마다 짙게 밴 광주 레트로 투어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수십 년 세월을 머금은 장인들의 상점, 빈티지한 다방이며 음악 감상실 등 멋스러운 공간이 많지만,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장소를 고른다면 올해로 90주년을 맞은 광주극장일 것이다. 1935년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한 호남 지역 최초의 극장이자 현존하는 한국 최고령 단관 극장으로, 광주극장이 지닌 상징성은 단순한 랜드마크 이상이다. 예술 영화 전용관으로 운영하는 지금도 꾸준히 상영작을 검색하는 단골층이 탄탄한데, 근래에는 극장 자체를 구경하러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 그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거나, 유해 시설로 지정돼 폐쇄 명령을 받거나, 멀티플렉스에 밀려 설 자리를 잃는 부침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버티며 존재해 온 덕분이다. 물론 시대와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동시대적 감성으로 쉼 없이 독립 예술 영화를 발굴하는 한편, 해마다 영화제를 기획하고 굿즈를 제작하거나 영화 간판 학교를 여는 등 극장의 유산을 콘텐츠로 계승하려는 움직임 역시 견고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충장로에 속속 들어선 지역 청년들의 문화 예술 공간이 이 오래된 극장의 여정에 새로운 활기를 더하고 있다.
주소 광주시 동구 충장로46번길 10
광주의 미식

아우르
지역과 미식을 아우르다
미식의 성지로 꼽히는 광주·전남 일대의 식문화를 논할 때 식재료만큼 흔들림 없는 지표도 드물다. 비옥한 땅과 바다가 가꿔 넉넉하게 내준 식재료는 지역 역사와 전통, 현지인의 삶과 뒤엉켜 듬직한 맛의 지도를 일궈 왔으니까. ‘풍부한 특산물과 함께 입안을 돌며 혀끝까지 남는 진한 맛’은 로컬 크리에이터 김이린 대표가 주목한 광주·전남 식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전남의 소멸 위기 지역에 집중하며 광주로 향한 그는 지역 식문화를 보존하고 오감으로 전달하기 위해 동명동의 90년 된 한옥을 재건해 ‘아우르’를 열었다. 우리말 ‘아우르다’와 영어 ‘부엉이(owl)’에서 따온 이름 그대로, 지역과 미식을 아우르며 낮과 밤의 정취를 두루 향유하는 로컬 다이닝 공간이다. 지역에 대한 기획자의 진심은 메뉴판에서부터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주 뿌리 파 장아찌를 곁들인 살치살 스테이크와 영암 한우 설깃살로 만든 육회 타르타르, 완도 감태로 맛을 낸 감태 파스타 등 재료의 원산지가 메뉴 이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녁에는 미디어 아트와 더불어 각종 요리에 현지 주류를 페어링하거나 아예 하나의 지역을 선정해 코스로 선보일 때도 있다. 아우르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는 변화다. 계절마다 메뉴 구성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대표가 소개하는 주류와 로컬 상품 리스트 역시 수시로 바뀐다. 언제든 아우르를 찾는다면 당장 눈앞에 놓인 요리나 술도, 그림처럼 통창을 파고드는 원도심의 풍경도 바로 이 계절, 이 순간 가장 눈부신 것이란 의미다.
주소 광주시 동구 동명로14번길 45-21
운영 시간 11:30~22:00
interview

김이린 아우르 대표
소멸 위기 지역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식문화를 선택했네요. 전남은 한국 최대의 농산품 원산지인 데다, 워낙 품질 좋은 식재료가 많잖아요. 그렇기에 오랜 시간 맛으로 유명했고요. 결국 이 지역을 알리기 위해선 맛이 중요한 요소라 판단했죠. 사람들이 지역 식문화를 즐기며 ‘이런 곳에 이런 특산물이 있구나’ 하고 인식하게 된다면 저희가 진행하는 비즈니스의 의미도 조금씩 쌓여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오픈한 지 1년 반쯤 됐죠. 기획 의도와 방향성이 잘 유지됐나요? 그간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러면서 바뀐 부분도 많았는데, 신기하게도 거리를 두고 정리해 보니 처음 기획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가더라고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주요 재료 산지라 할 수 있는 전남 소도시 사이에 놓인 광주의 역할이 궁금해요. 광주는 ‘아우르는 곳’이에요. 여러 지역의 식재료와 식문화를 아울러 사람들에게 잘 보여 주는 중간 역할을 하는 셈이죠. 앞으로 아우르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갈까요? ‘아우르만의 다이닝’을 명확하게 만들어 가고 싶어요. 그 첫 단계로 지역 식재료를 활용했다면, 이제는 다른 문화적 요소도 적극 도입할 계획이에요. 기획 다이닝과 팝업 스토어 같은 프로젝트 역시 더 자주, 다양하게 진행하려고 해요.
광주의 역사

전일빌딩 245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품은 역사는 그 공간이 실재하는 한 결코 감춰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도시의 매일 매 순간을 켜켜이 쌓아, 잊고 있던 사람들의 눈앞에 느닷없이 선연한 과거를 꺼내 보인다. 이를테면 뜨겁고도 서늘했던 1980년 5월의 광주. 동구 금남로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 곳곳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중 유독 치열하게 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해 온 것이 바로 전일빌딩이다. 당시 금남로에서 가장 높이 올라선 랜드마크로 마지막까지 시민과 함께 저항했던 건물, 무엇보다 245개 총탄 흔적으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입증한 대표적 5.18 사적지다. 그간 언론사와 증권사, 은행, 학원 등이 들어섰던 이곳은 2020년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역사 문화 공간 ‘전일빌딩245’로 다시 태어났다. 건축 형태와 공간을 ‘245’라는 숫자로 상징화해 건물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스토리텔링을 담는 것이 새로운 브랜딩의 핵심이었다. 현재 9층과 10층에 자리한 멀티미디어 전시관 ‘19800518’은 리모델링의 가장 혁혁한 결과물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의 헬기 사격 사건을 영상과 설치미술, VR을 비롯한 각종 시각 자료로 조명한다. 차분히 관람을 마친 뒤 옥상 공간인 전일마루에 오르면 일제강점기의 만세 운동과 5.18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현대사의 현장인 금남로 일대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시대의 비극과 영광을 온몸에 새기며 50여 년간 한자리를 지켜 낸 이 10층 빌딩은 과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도시의 이정표다.
주소 광주시 동구 금남로 245 전일마루
운영 시간 09:00~22:00(동절기 21:00), 전시관 10:00~19:00
광주의 인문학

동구 인문학당
모두의 집으로
예향으로 이름 높은 광주에서도 동구는 유독 인문학적 자존감이 강한 동네다. 예부터 무등산 자락에 뿌리내린 문화 예술 자산과 굵직한 역사 현장, 번성했던 상점가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데다, 이를 기록하고 개방해 주민과 나누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2022년에 문을 연 동구 인문학당은 이러한 문화 도시 정책의 새로운 거점이자 동구가 비교적 최근에 발굴한 또 하나의 인문 자산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여러 건축양식을 절충한 본채 외관. 삼각 지붕의 서양식 2층 건물과 일본식 복도가 있는 단층 한옥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다. 1954년에 지은 이 기묘한 근대 가옥은 2020년 동구가 공영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해방 직후 과도기의 건축 특성과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았다. 결국 지자체는 주민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가옥을 남기기로 결정했고, 지역 예술인 38명이 참여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모두를 위한 인문형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현재 동구 인문학당은 전시 및 휴식 공간을 품은 본채 맞은편에 신축 건물 두 동을 더해 각각 인문관과 공유 부엌으로 활용한다. 각종 강연이며 주민 참여 프로그램이 열리는 인문관에서는 시대별 만화책 3000여 권을 총망라한 기획 도서전 <만화책의 향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대와 삶이 교차하는 이색적인 정취 너머, 누구나 보고 읽고 사유하며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그득하다.
주소 광주시 동구 동계천로 168-5
운영 시간 10:00~18:00(월요일 휴무)
광주의 예술

유네스코 미디어 아트 창의벨트
빛으로 그린 도시의 밤
여행자가 감각하는 도시는 한낮의 들끓는 색깔이나 감촉, 소리, 냄새만이 아니다. 때로 세상의 속도가 잦아들고, 사위가 고요해지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에야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빛을 매개하는 예술, 미디어 아트가 그렇다. ‘빛고을’ 광주와 미디어 아트의 만남은 백남준을 비롯해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특별전을 선보인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시는 이이남, 진시영, 박상화 등 1세대 미디어 아트 작가를 낳았고, 이후 예향이란 수식어에 걸맞은 실험적 융복합 작품이 쏟아져 나오며 국내외 예술계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미디어 아트 특화 도시 광주의 여정은 2014년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미디어 아트 창의도시로 선정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해마다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열고, 거점 역할을 할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을 개관했으며, ‘유네스코 미디어 아트 창의벨트’란 이름의 공공 미술 작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총 다섯 권역의 창의벨트는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금남로 일대, 사직공원과 양림동 일원, 도시철도 광주송정역 등 도심 구석구석을 아우른다. 지난 11년간 광주가 이 분야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온 빛의 궤적인 셈이다. 운영 시간대는 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분명한 건, 이 도시의 밤이 낮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것. 미술관이 아닌 거리에서, 일상에서, 빛과 어둠이 명멸하는 도심부의 야경 한가운데서, 미디어 아트는 지금 광주의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