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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할 수 없는 사물과의 대화 <구본창: 사물의 초상>

2024년 12월 26일

  • writer 이미선(프리랜서)
  • photographer 황필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세계적인 아시아 현대미술 거장을 소개하는 기획 전시 ‘ACC 포커스’를 새롭게 선보이며 시리즈의 첫 주자로 구본창을 택했다. 객관적 기록이라는 전통 역할을 넘어 사진을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확장시킨 사진작가 구본창을 만났다.

좁고 어두운 복도 끝 작은 화면 위로 전쟁의 상흔이 흘러간다. 총탄, 단검, 지뢰 같은 살상 무기부터 참전 군인이 사용했던 철모, 군화, 회중시계 등 여러 사물이 무채색으로 포개진다. 사진작가 구본창이 2010년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기록한 ‘비무장지대’ 연작으로, 작가는 사물을 보여 주지만 관람객의 시선은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영혼과 그 가족의 애잔한 마음을 좇게 된다. 복도 끝을 사선으로 비추는 빛을 따라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사원이 드러난다. 공중에는 조선백자를 프린트한 대형 족자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땅속에서 찾아낸 화려한 신라 금관이 라이트 박스에 담겨 놓여 있다. 작가는 백자와 금관을 보여 주지만, 관람객에게는 해외로 유출돼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백자의 혼과 흙에 파묻혀 잊힐 운명을 타고난 금관의 혼이 어른거린다.

대한민국 현대사진의 시작

구본창은 객관적 기록이라는 사진의 전통 역할을 넘어 주관적인 표현을 담아내며 사진을 현대미술의 장르로 확장시킨 인물이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1986년 한국으로 돌아온 구본창은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사진에 반영했다. 셀피 사진 조각을 이어 자화상을 만들고, 대형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인화지를 꿰매기도 했으며, 필름을 긁는 스크래치 기법을 쓰기도 하고, 슬라이드 필름에 색을 칠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사회적 사건을 기록하거나 실제 대상을 피사체로 삼기보다 내적 의지에 따라 감성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사진 전시 <사진, 새시좌>를 기획하며 연출 사진을 한국에 소개했다. 평론가들은 이 순간을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이라 부른다.
자아에 대한 탐색과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실험적 작품을 이어 오며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업을 지속하던 그는 아버지와 작별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숨’ 연작은 죽음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진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식물이 마르듯 사람에게서 수분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기록한 작품인데, 숨이 멈추는 찰나에 있는 보편적인 것들을 보여 준다. 이후 그는 자연의 순환을 주제로 고요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시간의 그림’ ‘먼지’ ‘화이트’ ‘인테리어’ 등의 연작을 선보였고, ‘백자’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에 사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오래된 믿음은 한국 문화유산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시선으로 이어졌다. 탈, 조선백자, 곱돌 공예품, 지화, 청화백자, 신라 금관 같은 사물 연작 시리즈는 이렇게 우리 곁으로 오게 됐다.

사진가의 시선으로 시처럼 써 내려간 사물의 초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대표 기획 전시 시리즈 ‘ACC 포커스’가 지난해부터 인류 문화 예술의 틀을 바꾼 아시아 현대미술 거장을 소개하는 개인전 형식으로 바뀌었다. <구본창: 사물의 초상>전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전시로, 구본창이 2000년 이후 작업한 주요 사물 연작을 통해 사물의 서사를 살펴보고 그 안에 존재하는 한국성과 아시아적 정서에 주목한다. 사물 연작 160여 점을 비롯해 수집품과 아카이브 200여 점을 공개하는 이번 전시는 3개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 ‘역사를 품은 사물에 숨결을 입히다’에서는 조선백자와 신라 금관 설치 작품을 비롯해 청화백자 연작과 곱돌 연작 등 공적인 사물의 초상을 선보인다. 2부 ‘일상 속 사소한 사물을 발견하다’에서는 구본창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일상적 물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5세기 프랑스에서 건물 모퉁이나 문을 마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샤스루’를 비롯해 ‘탈’ ‘꼭두’ ‘비누’ ‘식기 포장재’ ‘거울’ 등 사적인 사물의 연작을 만날 수 있다. 3부 ‘구본창의 시선과 마주하다’에서는 지금은 전설이 된 소설가 한강·박완서, 배우 윤여정·안성기·배두나 등 예술인들의 초상과 함께 작가의 수집품을 공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신라 시대 금령총 금관.
전국 각지 탈춤 패의 정적인 모습을 담은 초상 사진 ‘탈’ 연작.
구본창
구본창, ‘리플렉션 10(Reflection 10)’, Archival Pigment Print, 123×98cm, 1983 © 구본창
구본창, ‘컬렉션 18(Collection 18)’, Archival Pigment Print, 123×98cm, 2019 © 구본창
1998년 ‘꼭두’ 도록 <한국의 나무꼭두> 속 ‘꼭두’ 시리즈
전국 각지 탈춤 패의 정적인 모습을 담은 초상 사진 ‘탈’ 연작.

2024년 3월 막을 내린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는 78일간 12만 명 가까운 이들이 관람했다. 관람객은 짧은 시간 안에 대형 전시로 다시 만나게 돼 기쁘지만, 작가는 부담이 컸을 것 같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주로 융·복합 전시가 열리는 공간으로, 층고가 높고 공간이 넓다. 전시장에 왔을 때 어린 시절에 보던 TV 만화 <플란다스의 개>가 떠올랐다. 꿈이 화가인 네로는 루벤스의 작품 ‘성모 승천’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돈이 없던 네로는 루벤스의 작품을 가림막으로 가려진 채 감상해야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로는 크리스마스에만 무료로 공개하는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성당으로 간다. 층고가 높은 넓은 전시장을 보고 그 성당이 떠올랐다.

구본창이 사랑한 사물에 띄우는 연애 편지가 될 줄 알았는데, 서정적인 사물의 장례식 느낌이다.
전시장을 오가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했고, ‘사물’이란 테마 아래 사물의 서사를 끌어내겠다고 생각했다. 3관은 유물로 대표되는 공적인 사물의 초상으로, 4관은 사적인 사물의 초상으로 채웠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풀어야 할 숙제도 많았다. 사진을 벽에 거는 대신 공간감을 살려 전시하기로 했다. 층고가 높고 넓은 전시장에 조도를 낮춰 경건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사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입구에 가벽을 세워 긴 복도를 지나 본전시장에 들어오도록 동선을 짜고, 백자 14점을 족자에 프린트해 공중에 걸었다. 그리고 ‘황금’ 연작 9점을 프린트해 라이트 박스에 담아 바닥에 놓았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백자의 혼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금관을 발굴하는 느낌을 살렸다.

아시아 문화를 테마로 융·복합 전시를 보여 주는 공간이라는 장소성이 전시에 미친 영향이 있나.
‘백자’ 연작의 경우 해외 박물관 소장품만 선택해 프린트했다. 그리고 광주라는 지역성을 살려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한 달항아리 작품을 한 점은 밝게, 한 점은 어둡게 프린트해 전시하기도 했다. ‘황금’ 연작에는 신라 금관과 함께 백제 금동관 한 점을 전시했다. 처음 공개하는 ‘코리아 판타지’는 한국 4대 고궁의 단청을 재해석한 영상 작품이다. 고궁 천장과 단청의 문양을 오버랩해 만화경처럼 리듬감을 표현했다. ‘탈’ 연작은 실물 크기로 프린트해 패널을 한 방향으로 세우고, 뒤쪽에 ‘꼭두’ 연작을 전시해 반전을 주었으며, ‘V’ 자 가벽을 세워 공간을 구분하기도 했다.

‘황금’ 연작의 신라 금관을 촬영하기 위해 7년을 기다려 작업했다고 들었다.
교과서나 박물관 도록에 실린 금관 사진이 늘 아쉬웠다. 찬란했던 신라 문화와 당대 최고 장인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진으로 백자의 가치를 되찾아 준 것처럼, 나의 시선을 통해 신라의 찬란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몇 가지 필연적인 사건도 겹쳤다. ‘백자’ 연작을 작업하기 전 전시 때문에 호주에 간 적이 있다. 근처 금광을 견학했고, 금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을 만났다. 몇 년 후 교환교수로 페루 리마를 방문했을 때는 잉카 유물에 마음이 쓰였다. 잉카문명은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웠으나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사라졌고, 유물만 덩그러니 남아 박물관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초대해 준 대학 총장 덕에 박물관이 소장한 잉카 유물을 촬영할 수 있었고, 그것이 포트폴리오가 됐다. 경주국립박물관에 편지를 썼고, 성사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제대로 된 ‘초상’ 사진이 필요한 유물이 많은데, 특별히 신라 금관에 더 관심이 간 이유가 있나.
금관은 당대 최고 장인이 당대 최고 세공 기술로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땅에 묻힐 목적으로 제작했고, 고분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땅속에 묻혀 있었을 거다. 내 사진을 통해 대중이 신라 금관을 다시 ‘발굴’해 주길 바랐다. 나는 애처로움을 발견하면 쉬이 지나치질 못한다. ‘백자’ 연작은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백자가 애처로워 보여 사진에 담아 영혼이라도 고국으로 데려오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다. ‘비누’ 연작도 마찬가지다. 비누는 완벽하게 사라지는 게 가장 잘 산 삶이다. 그런데 찌꺼기처럼 남아 갈라지고 부서지다 버려지는 것이 슬퍼 보였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애처로움을 발견하는 기질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어린 시절 나는 외톨이였고, 혼자 있는 시간이 편했다. 사물을 발견하고 사물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크고 새로운 장난감이 아닌 마당에서 주운 돌이나 키 작은 풀잎, 기르던 강아지와 나눈 대화가 한동안은 소중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때부터 영혼이라는 말이 내 안에 깊이 새겨졌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 물건이 나와 관계를 맺는 순간 영혼이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물에 마음을 줬던 것 같다. 사물을 처연하게 바라보고 외로움을 읽어 내는 능력은 나 자신을 사물에 투영하면서 기른 능력이자 대상을 해석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인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밝은 인상의 배우도 내 사진 속에서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재미있는 수집품이 많다. 이러한 사물들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나는 물건이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나와 인연이 있거나 이야기가 담긴 물건은 충분히 아름답고 존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신기하게도 아무 의미 없던 물건이 다시 아름답게 보이는 시점이 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거나 신문이나 뉴스에서 어떤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예전에 경험했거나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순간이 내가 가진 물건들과 결합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물건을 잘 못 버린다. 과거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또는 여행 중에 이러한 경험을 했지만,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를 보면서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독자에게 전시를 관람하는 팁을 알려 달라.
나는 모로코 상점에서 판매하는 기념품보다 수많은 여행객이 들췄을 천막 자락에 신경이 쓰이고, 고급 식기보다 식기가 담겼던 통에 남은 오래된 자국에 시선이 간다. 전시 포스터에 사용한 ‘컵’은 일본 여행 중 발견한 것이다. 식당 계산대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투명한 컵 안쪽 면을 빨간 색연필 자국이 채우고 있었다. 박서보 선생의 묘법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시간을 품은 사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세월의 때가 묻은 사물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ACC FOUS
<구본창: 사물의 초상>

기간 3월 30일까지
장소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의 1899-5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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