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겹겹이 두르고 강과 호수를 껴안은 강원 춘천은 거대한 물의 정원 같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 도시와 물길로 유연하게 연결되고, 잔잔한 물가에는 이야기가 꽃처럼 피어난다.

만화경 같은 춘천 원도심
만화경 속 세상 같다. 따로 떼어 놓으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오래된 번화가인데, 전체를 보면 하나의 단어로 수식하기 어려운 무질서함이 외려 특별한 장면을 만들어 낸다.
“춘천에 왔으니 닭갈비부터 먹어야지!”
춘천역에 도착하자마자 명동 닭갈비 골목으로 향했다. 기차가 출발할 때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입구에서 황금 옷을 입은 닭 조형물이 반긴다. 이내 첫 번째 고민이 시작됐다. 어느 집으로 갈 것인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스무 개 남짓한 닭갈빗집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집집마다 블루리본 스티커, 맛집으로 소개된 TV 방송 화면, 유명 크리에이터가 다녀간 곳 등을 강조하는 홍보 문구가 붙어 있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정선미 문화해설사는 어디든 기본 이상의 맛을 내니 철판에 볶아 먹을 것인지, 숯불에 구워 먹을 것인지만 결정하라고 한다.
춘천 닭갈비의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일으키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닭은 소나 돼지에 비해 키우기가 수월했다. 매일 달걀을 낳고, 금세 성체가 됐다. 도심 외곽에 양계장이 우후죽순 생긴 이유다. 양계 농가에서는 팔고 남은 닭을 화롯불이나 연탄불에 구워 먹었고, 닭을 뼈째 토막 내 얇게 포를 떠서 갈비처럼 만들어 파는 음식점들이 번화가인 중앙로에 문을 열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명동에 닭갈비 골목이 형성됐다. 철판에 각종 채소를 넣고 함께 볶아 먹는 닭갈비는 저렴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주머니 가벼운 학생과 군인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다.


손편지처럼 다정한 원도심
닭갈비 골목을 나와 유동 인구가 많은 명동에 들어섰다. 뷰티 체험 공간으로 진화한 화장품 가게, 화사한 조명이 시선을 끄는 인형 뽑기 숍, 평범한 오늘을 소중히 기록하려는 이들로 채워진 포토 부스 등 1020세대의 취향을 반영한 점포들이 눈에 띈다. 애니메이션 <구름빵> 캐릭터 조형물 너머로 중앙시장 입구가 보인다. 철물 시장, 양키 시장, 생활 시장, 제수 시장, 수산시장 등이 한데 어우러져 규모가 제법 크다. 중앙시장은 오랫동안 천천히 변화했다. 비가 내리면 질척이던 흙바닥에는 보도블록이 깔리고 천장에는 비와 햇빛을 막아 주는 차양이 설치됐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50~70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 온 기름집과 떡집, 대를 이어 운영하는 국숫집 등 과거에서 보낸 편지 같은 다정한 집들이 구경하는 재미를 준다.
운수나 운명은 늘 변화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흥망성쇠. 육림고개를 이야기할 때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1980년대부터 육림고개는 매일 조금씩 바람에 삭고 볕에 바랬다. 2006년 육림극장이 폐업하자 빈 점포도 늘었다. 4년 뒤 경춘선이 복선화되고 ITX-청춘이 개통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행자가 급증하자 춘천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육림고개 일대를 막걸리 골목과 젊은이의 거리로 전환하고 청년몰을 유치했다. 낡은 주택을 개조한 카페, 감각적인 막걸리 바, 청년 농부의 정성이 깃든 건강한 밥집이 들어서면서 거리 풍경이 변했다. 터줏대감 격인 올챙이국수집, 기름집, 뻥튀기집 같은 노포가 자리를 지키면서 춘천만의 색을 만들어 가는 듯했다.


볼수록 매력적인 육림고개
육림고개의 진짜 매력은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분주함에 있다. 육림고개의 굴곡진 역사는 이제 새로운 챕터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며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숨겨진 공간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페 처방전’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켜 온 현대한약방이 2016년에 오픈한 찻집이다. 젊은 세대가 보다 쉽게 전통 한약을 접할 수 있도록 전문 한약사가 조제한 건강한 한방차와 음료를 선보인다. 소화 기능이 약하고 몸이 찬 사람에게 좋은 보양 차인 십전대보차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즐겨 마시던 쌍화탕을 보강한 쌍화차가 시그너처 메뉴다. 예약하면 맥을 짚어 건강 상태를 체크하거나 한약을 지을 수 있다. 어린아이부터 청년층, 중장년층까지 한 공간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육림고개가 지켜 가야 할 정체성이 아닌가 싶었다.
육림고개에서 약사고개로 가는 길, 라일락 고목을 품은 말쑥한 얼굴의 옛집이 보인다. 책 읽는 공간 ‘첫서재’다. 휴직 후 춘천에 내려온 남형석·문정윤 부부가 1963년에 지은 옛집을 고쳐 2021년 공유 서재로 꾸몄다. 라운지를 중심으로 양쪽에 부부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글책방과 그림책방을 만들고, 별채인 독립 서재를 두었다. 라운지 옆에는 다락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시선은 벽면을 가득 채운 메모에 머문다. 오픈할 당시 부부는 세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시간 동안 서재를 빌려주고 이용료는 편지로 받기, 최대 4박 5일 동안 다락을 내주고 숙박비는 5년 후 돈 이외의 무언가로 받기, 12칸짜리 진열대에 창작자 12명의 첫 작품을 전시·판매하고 수수료는 5년 후 돈 이외의 무언가로 받기. 많은 이들이 책을 읽기 위해, 또는 편지를 쓰기 위해 첫서재를 다녀갔고, 각자의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다. 결국 휴직 기간인 20개월 동안만 머물려던 부부는 춘천에 정착했다. 현재 첫서재는 운영 방식을 공간 대여로 바꿨다.
첫서재 마당에서는 죽림동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1920년 곰실 본당으로 시작해 8년 후 약사고개에 둥지를 튼 춘천 최초의 성당이다. 1949년 신축 기공식을 치른 후 완공 단계에 이르렀으나 한국전쟁으로 한쪽 벽면이 무너지면서 부속 건물이 파괴됐고, 1951년 무너진 성당을 수리해 1953년 축성했다. 1998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가톨릭 미술가회 작가들의 작품으로 성당을 장식했다. 덕분에 ‘가톨릭 미술의 보고’로 불리는 죽림동성당은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특히 아름답다. 2003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성당 입구에는 한국전쟁 직후 수녀들로 구성된 의료진이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주민을 돌보던 ‘성 골롬반 의원’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있고, 뒤뜰에는 한국전쟁 때 순교한 성직자의 무덤이 있다.

새로운 질서가 된 만화경 같은 거리
육림고개 맛집, 육림닭강정이 요선동으로 이사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백년가게로 선정된 실비막국수, 페이스트리 식감의 수제 약과를 선보이는 버들골, 동부콩으로 만든 대왕 쑥굴레떡 ‘동쑥이’로 유명한 이삭떡방 등이 옹기종기 모인 골목이다. 춘천 야생화에서 얻은 벌꿀로 벌꿀주인 미드(mead)를 만드는 로컬 양조장 미더리봉자도 이곳에 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였던 권수연 대표는 몇 해 전 도시 양봉 사업을 접하고 청년 농부가 됐다. 벌을 키우며 양봉 부산물을 개발하다 미드 주조에 도전했다. 시행착오 끝에 춘천 야생화를 먹고 자란 벌의 꿀을 소양강 물로 희석한 다음 효모를 섞어 발효시켜 ‘비왈츠 오리지널’을 개발했다. 비왈츠(BeeWaltz)는 벌들이 꿀을 발견하면 동료들을 모으기 위해 팔자 모양으로 춤을 추는 데서 착안한 이름이다. 이후 야생화 꿀을 6시간 이상 캐러멜라이즈해 만든 비왈츠 보쉐와 강촌의 유기농 장미 농원에서 재배한 식용 장미를 이용해 비왈츠 로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춘천에는 비왈츠를 포함해 열여덟 곳의 로컬 양조장이 있다. 막걸리부터 위스키까지 거의 모든 주종을 생산하는데, 모두 춘천의 맑은 물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바람을 따라 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길과 원도심이 만나는 교차로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는 거대한 설치물 ‘소양아트서클’이 눈에 띈다. 총길이 188미터의 보행 전용 육교로, 알록달록한 색상과 다채로운 패턴이 인상적이다. 구조물 위에 올라서자 소양강과 삼악산, 소양강스카이워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말이면 소양아트서클 위 전망대에서 버스킹, 코미디 쇼, 라이브 연주회, 인형극 퍼포먼스, 국악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연다.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연을 관람한다. 소양아트서클이 발을 딛는 순간마다 예술 작품을 만나는 곳이라는 말에 절로 공감이 된다.
낮과 밤이 교차되는 시간, 해가 저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소양강 처녀상과 소양강스카이워크가 시야에 들어온다. 소양아트서클에서 내려와 ‘소양강 처녀’를 흥얼거리며 소양강스카이워크 쪽으로 향했다. 강 쪽으로 174미터 돌출한 전망대로, 156미터 구간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다. 4센티미터 두께의 특수 강화유리 세 장을 겹쳐 안전성을 확보했다는데, 발아래를 보니 아찔하다. 팔을 벌리고 춤추듯 걷는 아이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 위를 나는 요정이 된 것 같아 기분 좋아요”라는 귀여운 답이 돌아온다.
해가 저문 후 번개시장을 찾았다. 의암댐 건설로 호수가 생긴 후 통통배에 농산물을 싣고 와 신작로에 벌인 난전에서 시작된 시장이다. 오전 4시 즈음 시작해 9시가 되기 전에 번개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2014년 난전에 가깝던 시장을 정비해 깔끔한 전통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번개시장은 혹서기와 혹한기를 제외한 금·토·일요일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야시장으로 열린다. 신나는 버스킹 공연과 노래자랑, 플리마켓 등이 펼쳐진다. 올해는 10월 10일까지 이어진다.

K-미식 2026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
야시장과 트로트 공연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대표 맛집이 참여하는 미식 축제로 전환하면서 호평받은 K-미식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가 열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닭갈비(200그램 9900원)와 막국수(6900원) 가격을 지정해 바가지요금을 없애고, 다회 용기를 권장해 쓰레기 발생을 줄이는 것은 물론 QR코드 주문 시스템을 운영한다. 지역 예술인 공연과 다양한 장르의 가수 공연, 마임·인형극 등을 연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축제 기간에 한해 막국수·닭갈비 포장 키트도 판매한다.
기간 10월 14일~18일
장소 강원 춘천 공지천 산책로 일원
문의 070-7576-1657

물 위에 새기는 낭만
서울 용산에서 출발해 청량리와 춘천을 잇는 ITX-청춘의 이름은 ‘청량리’와 ‘춘천’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운명처럼
춘천은 오래전부터 호수의 낭만을 품은 청춘의 도시로 불렸다.
춘천은 호수의 도시로 불리지만 60여 년 전만 해도 강의 도시였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곳에 도시가 발달했고, 강을 따라 사람과 물건을 나르는 배가 닿던 나루터가 20여 곳에 달했다. 1967년 의암댐을 건설하면서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협곡이 막혔고, 인공 호수인 의암호가 탄생했다. 댐을 건설하면서 수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궁금하다면, 소양강스카이워크 앞에서 쏘가리상을 받치고 있는 시멘트 구조물을 참고하면 된다. 일제강점기에 화천댐을 짓는 데 필요한 건설자재를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삭도인데, 수면이 높아지면서 대부분 물에 잠기고 윗부분만 남았다. 의암호 중심에 있는 상중도와 하중도도 원래 하나의 섬이었다. 댐 건설 후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갈라 물길을 냈다고 한다. 호수가 된 강과 물길이 바뀌며 달라진 도시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겠다.


물을 벗 삼아 낯선 속도로 여행하기
여행하는 속도가 달라지면 감상도 달라질까. 춘천레저태권도조직위원회 홈페이지(clt.or.kr)에 접속해 자전거를 타고 의암호 변을 달리는 ‘에코라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자전거와 안전 장비를 대여해 줘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여행자에게 제격인 프로그램이다. 라이딩 코스는 소양아트서클 근처 자전거여행자의집에서 출발해 소양2교를 건너 세월교까지 갔다가 복귀하는 ‘세월교 코스’와 춘천대교, 하중도수변생태공원을 지나 출발지로 돌아오는 ‘하중도 생태 코스’로 나뉜다. 전자는 총길이 19킬로미터로 90분, 후자는 총길이 14킬로미터로 70분이 소요된다. 고민 끝에 하중도 생태 코스를 택했다. 자전거여행자의집에서 만나 참가 기념품으로 받은 라이드 조끼를 착용한 뒤 헬멧을 쓰고 출발했다. 페달을 밟자 시원한 강바람이 따가운 볕을 밀어낸다. 소양강 처녀상을 지나 춘천대교로 접어들었다.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 위를 미끄러지는 수상스키어와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파라모터 글라이더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레저 천국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레고랜드 정문에서 하중도수변생태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숲이 터널을 이루며 그늘을 만들어 낸다. 풍광 좋은 곳에 멈춰 사진을 찍거나 선상 카페에 앉아 간식을 즐기는 시간도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다. 소양강 처녀상, 춘천대교, 하중도수변생태공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등 숨은 이야기가 있는 스폿마다 가이드의 해설이 곁들여져 더욱 만족스러웠다. 속도가 달라지면 시야가 변하는 게 확실하다. 여행하는 내내 지났던 길 위에서 낯선 춘천과 만난 기분이다.
물 위에서 보는 춘천은 어떤 모습일까. 바다 같은 호수를 품은 춘천에서는 다양한 수상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건 나무 카누다. 통나무를 길게 잘라 속을 파낸, 인류 역사를 바꾼 발명품을 타고 호수 위에 떠 있는 상상을 하니 심박수가 빨라진다. 춘천중도물레길 홈페이지(ccmullegil.co.kr)에 접속해 코스를 살폈다. 하중도 아래 물길까지 다녀오는 ‘자연생태공원길’과 삼악산과 의암댐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길’ 중 초심자도 비교적 도전하기 쉬운 전자를 택했다. 예약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해 안전 교육을 받았다. 선크림을 덧바르고 챙이 큰 모자를 쓰고 카누에 올랐다. 선체가 날렵해 흔들리거나 뒤집힐까 겁났는데 의외로 안정적이다. 강사의 조언대로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지만 않으면 물에 빠질 일은 없어 보인다. 선착장에서 멀어질수록 잔잔한 호수가 더욱 고요하게 느껴진다. 하중도에 다다르자 물과 땅의 경계를 잇는 수생식물 군락 덕분에 자연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다. 산마루에 긴 그림자를 남기며 뉘엿뉘엿 해가 넘어간다. 반짝이는 윤슬 위를 통통한 밀잠자리가 서성인다.

산 위에서 호수 감상하는 방법
2013년 청동 조형물로 재탄생한 인어상을 보러 가는 길에 어깨에 밧줄을 두르고 절벽 아래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암벽등반의 성지 ‘춘클릿지’로 향하는 춘천스포츠클라이밍협회의 임동균·정재혁 강사다. 임동균 강사는 ‘어프로치(등반이 시작되는 지점까지의 거리)가 20미터로 짧고 조금만 올라가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인기 코스’라고 춘클릿지를 설명했다. 직각에 가까운 암벽 한 구간을 ‘피치’라고 하는데, 암벽등반은 피치를 끊어서 올라가는 멀티피치와 한 번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하드풀로 나뉜다. 춘클릿지는 멀티피치 코스로 높이가 200미터에 이르는데, 30~40미터 길이의 피치 일곱 개를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1피치가 끝나는 지점부터 의암호의 멋진 풍경이 펼쳐지며, 4피치가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두 사람을 따라 1피치가 시작되는 암벽 아래에 섰다. 아찔한 경사에 더럭 겁이 났다. 허리 벨트에 로프를 단단히 고정하는 정재혁 강사에게 10년 넘게 암벽을 오르는 이유를 물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는 전신운동이라든지 등산로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정복하는 쾌감 같은 것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패하는 스포츠’라 좋다고 했다.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자 목적이란 뜻이다. 가파른 바위벽을 시험문제 풀 듯 신중하게 오르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의암호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삼악산은 높이 655미터의 주봉 용화봉을 포함해 청운봉, 등선봉까지 세 개의 봉우리를 품은 산이다. 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암봉을 이루는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경관이 수려해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2021년 의암호를 가로질러 삼악산 상단을 연결하는 춘천 삼악산 호수케이블카가 운행을 시작했다. 3.61킬로미터로 국내 최장 길이다. 바닥까지 투명한 유리로 만든 크리스털 캐빈에 몸을 실었다. 유리창에 적힌 “안녕, 삼악산”이라는 문구 너머로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와 물길 따라 형성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의암호 정차장에서 삼악산 정차장까지는 20분가량 소요된다. 삼악산 정차장 뒤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로 향했다. ‘ㄷ’ 자로 설계된 삼악산스카이워크는 아찔한 높이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겁난다. 춘천을 여행하는 동안 매일 따라다니던 수식어 ‘호반의 도시’, 이곳에 서니 비로소 도시의 시간들이 읽히는 듯하다.


예술 도시 춘천을 만드는 문화 공간
산과 호수가 춘천을 낭만의 도시로 만들었다면 마임, 연극, 인형극, 애니메이션 등은 춘천을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중이다. 춘천마임축제는 세계 3대 마임 축제로 자리 잡았고, 춘천인형극제는 매년 가을 아시아 최대 규모로 열린다. 소규모 공연 전문 ‘축제극장몸짓’과 국내 유일의 인형극 전용 ‘춘천인형극장’, 국내 최초 ‘애니메이션박물관’ 등이 그 토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덕분에 춘천은 1년 내내 공연을 즐기고 배울 수 있는 도시가 됐다. 2003년에 개관한 애니메이션박물관은 6만 점이 넘는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를 보존 및 전시한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춘천역과 마주 보고 있는데, 2029년 서면대교가 개통할 때까지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박물관은 2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애니메이션의 기원과 탄생, 제작 기법 등을 전시했다. 1만 년 전 알타미라 동굴벽화부터 한국 애니메이션 탄생의 역사를 펼치더니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가스 영사기, 페이퍼 영사기, 유리 필름 등 진귀한 자료를 보여 준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표된 각종 애니메이션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한 공간에서는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2층에서는 미국, 일본, 중국, 유럽 등 세계 애니메이션의 시대별 변천사를 소개한다. 1989년 제1회 춘천인형극제가 열리면서 태동한 춘천인형극박물관은 2004년에 개관했다. 중요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사당패 꼭두각시놀음 인형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 인형극단에서 사용했던 인형을 전시한다. 또 마리오네트라 불리는 줄 인형, 손 인형, 장대 인형 등 세계 각국의 특색 있는 전통 인형 17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바로 옆 춘천인형극장에서는 기획 공연도 개최된다. 춘천인형극제 홈페이지(cocobau.com)에서 다양한 공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행을 마무리하기 전 춘천역 뒤편의 화동2571에 들렀다. 춘천과 강원도의 로컬 식재료를 활용해 다국적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 라토피아와 청년 셰프가 개발한 메뉴와 브랜드를 선보이는 마켓2571 등이 모인 먹거리 복합 공간이다. 라토피아에서 치킨 레드 스튜를 주문했다. 춘천 대표 음식인 닭갈비를 유럽풍으로 재해석한 요리다. 오랜 시간 정성껏 끓인 토마토의 풍미가 담백한 닭고기에 감칠맛을 더한다. 남은 국물로 조리해 주는 리소토도 별미다. 닭 요리를 즐기는 방식이 하나 추가된 기분이다. 계절별 나물을 듬뿍 넣은 잠봉 나물 파스타와 강원도식 집 된장에 부드러운 크림을 더한 된장 라구 파스타, 버섯 페스토로 풍미를 더한 버섯 페스토 파스타 등도 맛보고 싶다. 화동2571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9월 11일부터 이틀간 이곳에서 춘천 술 페스타가 개최된다. 전통주와 어울리는 다양한 미식 안주 콘텐츠, 양조살롱 등 복합 로컬 문화 축제가 호숫가의 낭만을 더할 것이다. 춘천에 다시 와야 할 이유를 남겨 두고 열차에 올랐다.

제38회 춘천인형극제
춘천인형극제는 1989년 첫 개최 이후 춘천을 세계 인형극의 중심으로 만든 축제로 국적과 장르,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가와 시민이 한데 어우러지는 페스티벌이다. 올해도 세계 각국 최정상 아티스트가 선보이는 인형극 공연부터 춘천 전역을 화려하게 물들일 퍼펫 카니발, 인형극 아트마켓 등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기간 9월 10일~16일
장소 강원 춘천인형극장 및 춘천시 일원
문의 033-242-8452

육동한 춘천시장 다시 피는 춘천
원도심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 코스를 육동한 춘천시장에게 물었다.
올가을 춘천에 가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춘천의 가을은 축제 열기로 가득합니다. 먼저 9월 10일부터 16일까지 제38회 춘천인형극제가 열립니다. 10개국에서 출품한 105개 작품과 퍼레이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어요.
9월 16일부터 20일까지는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가 이어집니다. 80여 개국에서 2000여 명의 국가대표급 선수단이 참가하는 국제 대회입니다. 10월에는 9일부터 3일 동안 춘천커피축제가, 14일부터 5일 동안 K-미식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가 공지천 수변에서 열립니다. 축제를 즐기며 공지천을 산책하거나 소양아트서클에서 노을을 감상해 보세요. 춘천 삼악산 호수케이블카에 올라 단풍으로 물든 산과 호수를 감상할 것도 추천합니다.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는 지난해에 축제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탈피해 미식에 집중하면서 만족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춘천막국수닭갈비축제는 지난해부터 상업형 부스를 줄이고 춘천 대표 막국수·닭갈비 업소와 지역 소상공인이 참여하도록 운영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 결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춘천의 진짜 맛’을 만나는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올해는 세계의 음식과 문화를 함께 경험하는 글로벌 미식 콘텐츠와 K-치킨벨트 연계 프로그램을 새롭게 선보입니다. 취식 공간을 넓히고 반려동물 놀이터와 가족 체험 프로그램도 보강합니다. 농부 장터와 플리마켓을 둘러보고, 수변 공연을 즐기며, 업소마다 다른 맛의 막국수와 닭갈비를 비교해 보길 권합니다.
시장님은 춘천 효자동에서 나고 자란 춘천 사람입니다. 곳곳에 많은 추억이 있을 듯합니다.
효자동 골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구들과 명동, 중앙시장을 오갔고, 학교 가던 길에 있는 오래된 가게와 항상 마주치던 이웃 주민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도로 아래로 사라졌던 약사천에 맑은 물이 흐르면서 시민들의 산책길이 된 모습을 보면 감회가 새로워요. 그 익숙한 풍경에 청년들의 새로운 문화가 스며들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 위에 새로운 삶을 채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음 세대에게도 추억과 꿈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시장님이 가이드가 되어 원도심 세 시간 여행을 제안한다면, 어떤 코스를 안내할지 궁금합니다.
중앙시장에서 출발해 명동 닭갈비 골목과 춘천 지하상가를 둘러보고 죽림동성당과 육림고개까지 걸은 다음 소양아트서클로 이동하는 코스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시장 골목을 거닐며 상인들과 손님들이 만드는 다정한 분위기를 느껴 보세요. 명동 닭갈비 골목에 들어서면 철판 위에서 닭갈비가 지글지글 익는 소리와 매콤한 향이 발걸음을 붙잡을 겁니다. 식사 후에는 지하상가에서 쇼핑을 하고 죽림동성당의 아름다움을 감상한 다음 육림고개의 개성 만점 상점들을 둘러보세요. 마지막으로 소양아트서클에서 노을을 감상하면 완벽한 여행이 될 겁니다.
원도심 외에 꼭 가 봐야 할 숨은 명소가 있다면 추천해 주세요.
춘천은 호반의 도시입니다. 호수는 멀리서 봐도 아름답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더 매력적이죠. 춘천 삼악산 호수케이블카를 타면 의암호를 가로지르는 하늘길에서 산과 호수가 빚어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출렁다리인 춘천사이로248을 건너 하중도수변생태공원까지 걷다 보면 의암호의 아름다움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춘천다운 체험은 의암호 물레길 카누입니다. 노를 저어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면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어 황홀한 고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이나 노을이 붉게 번지는 저녁 무렵 호수 위에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 보길 바랍니다.
소양아트서클 공개, 원도심을 되살리는 리본(Re-Born) 시티 프로젝트 진행, 춘천시립미술관 설립 추진 등으로 춘천 여행 지형이 바뀌고 있습니다. 시장님이 그리는 춘천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호수와 원도심, 문화 예술이 하나의 생활·관광 동선으로 이어지는 도시를 꿈꿉니다. 소양아트서클은 시민과 여행자가 호반 풍경 속에 머물며 예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명동과 중앙시장, 지하상가, 육림고개를 연결해 원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리본 시티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2030년 개관 예정인 시립미술관은 춘천이 간직한 예술 자산을 모으고, 지역 예술가의 창작과 시민의 문화생활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에게는 일상적 문화 예술을, 예술가에게는 더 넓은 기회와 무대를, 여행자에게는 춘천에 하루 더 머물 이유를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