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기다림 끝에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건, 생동하는 동시대 미술을 싣고 온 기묘한 우주선이 마침내 불시착했음을 의미한다.


2026년 3월 드디어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서서울미술관)이 공식 개관했다. 서울시 최초의 공공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이자 서남권 최초의 공립 미술관이고, 서울시립미술관(SeMA) 체제의 여덟 번째 공간이다. 기본 구상이 시작된 2015년 이래로 국제지명 설계공모를 통해 문을 열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으니 ‘드디어’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다. 2025년 준공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관 일정이 조정되며 다시 1년이 지나는 동안 미술 애호가들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문화 인프라가 부족했던 서울 서남권의 문화 지형을 새롭게 재편할 예술적 거점의 탄생을 기다린 지역 주민들에게는 더더욱 간절한 시간이었다.
사실 기대가 큰 만큼 짐도 무거웠다. 서서울미술관이 자리 잡은 금천구 금나래중앙공원 부지는 과거 육군 도하 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주민들에겐 오랫동안 거의 유일한 녹지 쉼터였다. 누군가는 공동의 정원이자 거실과도 같았던 공간을 빼앗긴 듯 아쉬울 테고, 누군가는 친숙한 회화 대신 난해한 뉴미디어 미술관의 등장이 낯설기도 할 테다. 그러나 지역의 맥락을 좀 더 들여다보면 왜 여기, 그리고 뉴미디어여야 하는지 필연적인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금천구는 대한민국 근대화를 견인한 노동집약적산업의 과거와 IT·디지털 플랫폼의 현재가 중첩된 독특한 서사를 품고 있다. 회색 공장 지대에서 국내 최대 디지털 산업 단지로 거듭난 역동적인 궤적을 떠올려 보면, 기술 발전과 함께 탄생해 예술과의 융합을 지향하는 뉴미디어 아트야말로 지역 정체성을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해 낼 최적의 매개체인 셈이다.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다양한 쓰임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뉴미디어,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
서서울미술관은 영상, 음향, 조명을 넘나드는 물리적 설치부터 퍼포먼스와 개념 미술, 인터넷 및 코딩 아트, 소프트웨어 기반의 무형 작업을 아우르는 광대한 뉴미디어 스펙트럼을 지향한다. 뉴미디어란 대체 무엇인가. 기술 친화적인 일부 애호가뿐 아니라 벽에 걸린 그림을 보러 미술관을 찾던 관람객에게도 열린 공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나운 서서울미술관장은 깊은 고민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뉴미디어는 단순한 신기술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모든 실험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올드미디어라 할지라도 새로운 시선으로 매체를 활용하고 재해석한다면 뉴미디어라고 부를 수 있죠. 서서울미술관은 경계를 허무는 모든 창작과 실험을 주목합니다.”
뉴미디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유기적인 융합이다. 기술 진보와 발을 맞추되 결코 기술에 침잠하지 않는다. 고성능 AI의 결과물을 그 자체로 예술이라 할 수 없듯, 찰나의 신기함이나 시각적 유희만으로는 뉴미디어가 될 수 없다. 기술을 재료 삼아 현대사회의 복잡한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고뇌와 철학이 담기고, 시대의 미학적 담론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뉴미디어 아트를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이라 부르는 이유다.
건축물도 키를 낮춰 ‘공원 속에 위치한 일상의 미술관’을 구현했다. 지하철역과 주거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덕분에 주민들은 출퇴근길이나 산책길에 자연스럽게 예술과 조우한다. 로비와 1층은 투명한 유리 벽을 통해 공원의 사계절을 내부로 끌어들인다. 백미는 파사드다. 해머드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을 사용해 물결처럼 반짝이는 은빛 외벽은 이곳에서 펼쳐질 미래적 풍경을 암시한다. 울퉁불퉁한 금속 표면이 계절에 따라 변하는 주변 풍경을 담아내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근사한 미디어 아트다. 내부 공간 역시 새로운 언어를 실험하려는 지향점을 충실히 따랐다.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으로 이어지는 구조에 세 개의 전시실과 다목적 홀을 배치해 영상, 사운드, 인터넷 아트 등 변화무쌍한 현대 예술을 유연하게 수용한다. 이와 함께 디지털 기반 예술을 창작하고 연구하는 미디어랩을 마련해 단순한 전시장을 넘어 뉴미디어 예술 생태계 허브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새로운 생태계, 세 개의 전시
서서울미술관은 개관과 함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세 개의 전시를 선보인다. 첫 번째 프로그램은 SeMA 퍼포먼스 <호흡>이다.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27명(팀)의 작가들이 미술관 지하 주차장부터 옥상까지 미술관의 모든 공간을 무대로 실험적인 창작 작품을 선보인다(매주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총 70여 회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사전 온라인 예약이 필요하다). 개관일에 많은 예술계 관계자와 미디어가 모인 가운데 진행한 2개의 퍼포먼스는 이 새로운 미술관이 ‘무경계의 예술’을 어떤 방식으로 품어 낼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전자음악 작곡가 듀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사운드 퍼포먼스 <공기에 관하여>가 시작되자, 정적인 화이트 큐브가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행성의 한복판처럼 변모했다. 공기의 진동을 매개로 소리의 파동을 담아내는 이들의 작업은 아리랑과 클래식, 모스부호 등 온갖 이질적인 소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소리라는 비물질적 매체가 물리적 공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증명해 보였다.
이어지는 황수현의 퍼포먼스 <세계>는 더 깊은 몰입으로 이끌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퍼포머들은 각자의 속도와 호흡으로 비언어적 소리를 뱉어 내며 기묘하게 움직였다. 익숙지 않은 소리와 생경한 몸짓에 매료되어 어느새 경계 밖 세계를 경험하게 될 즈음, 갑자기 빛이 들어오며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까지 탁 트인 층고를 따라 설치한 롤스크린이 일제히 개방되며 외부 풍경이 전시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반전의 카타르시스!
1층 제1전시실에서 열리는 <우리의 시간은 여기서부터(Mneme Topos)>는 서서울미술관의 건립 서사를 조명하는 전시다. 김태동, 브이엔알, 컨템포로컬 등 다섯 팀의 작가들이 사진과 텍스트, 증강 현실 등 다양한 매체로 지역의 역사성과 미술관의 탄생 과정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건립 현장의 축적된 시간을 픽셀 단위로 해체하고 재구성한 콜라주, 콘크리트를 붓고 철골을 용접하며 땀 흘린 작업자들의 노동을 포착한 사진 작업이 미술관 로비, 하역장, 잔디 마당 등 다양한 공간을 채우며 과거의 기억 위에서 미래의 감각을 깨운다.
미술관 외부 정원에는 서서울미술관의 브랜드가 될 ‘SeMA 프로젝트 V’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얄루 작가의 <신인호 랜딩>이 불시착했다. 금천구의 작은 정원에 안착한 녹슨 우주선은 여덟 개의 작은 LED 패널을 장착한 채 빛을 발한다. 이 우주선의 주인은 86세의 K-팝 아이돌이자 ‘할머니 해적’인 신인호다. 작가의 외할머니를 모델로 한 이 다성적 오페라 작업은 도시의 데이터 위에 내려앉은 할머니 해적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의 과거와 미래, 구전설화가 뒤섞인 생경하고도 유쾌한 서사를 펼쳐 보인다.
우주선을 둘러싼 환경 또한 하나의 무대다. 우주선 주변으로 다양한 이름의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초등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간헐적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굉음과 우주선에서 흘러나오는 미래적이면서도 처량한 음악이 뒤섞여 불협화음을 이루는 가운데, 도무지 해석 불가능한 현장에 불시착한 할머니 해적의 행보를 쫓으며 느끼는 기묘한 해방감! 부지불식간에 가뿐하게 경계를 넘어서는 인식과 감각의 확장이야말로 뉴미디어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른다.
서서울미술관이 그 속살을 드러낸 지 어느덧 반나절. 정말이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이 ‘신상 미술관’은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일상이 되는 공간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통창 너머를 엿보는 어르신들과 산책 나온 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미술관 구석구석에 꽂힌다. 금천구청과 근처 문화체육센터를 오가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에 담장 너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해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오래 걸렸지만 덕분에 가장 궁금한 미술관이 된 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예술은 소리이자 움직임이고, 존재이자 소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 미술관이 그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있을까. 서서울미술관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청소년은 기계로소이다
뜨거웠던 오프닝의 열기가 가라앉을 즈음, 뉴미디어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가 찾아온다. 서서울미술관이 3년여에 걸쳐 수집한 72점의 뉴미디어 소장품 중 대형 작품 10여 점을 최초로 공개하는 <서서울의 투명한 |청소년| 기계>전이다. 정보와 네트워크, 신체가 긴밀하게 얽힌 환경에서 성장하는 청소년을 ‘기계’로 설정하고, 인간 존재의 새로운 형식을 사유하게 하는 과감한 시도가 흥미롭다. 전시와 함께 청소년이 직접 참여해 경험을 확장하는 ‘유스 스튜디오’도 운영한다. 본능적으로 기술을 습득하는 오늘날의 청소년 세대가 다양한 방식으로 뉴미디어 아트를 감각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5월 14일부터 7월 26일까지 열린다.